1 기본 정보
성명 | 김주수(金疇洙) |
생년월일 | 1928년 5월 15일 |
활동분야 | 법학(민법학) |
특히 한국 가족법(친족상속법) 분야에서 최고의 실력자로 칭송 받았던 민법학자.[1] 호주제 폐지에 앞장 섰던 사람[2]으로도 유명하다. 경희대, 성균관대, 연세대 등에서 교수로서 재직하였고 연세대학교 법과대학 학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2 생애
1928년에 평안남도 성천군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1941년~1946년에 경성사범학교를 다녔다. 해방 후 1946년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하였으며, 6·25 때에 몸이 좋지 않아서 학교를 1년 쉰 후에,[3] 한국전쟁이 끝난 후인 1953년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였다.
대학 3학년 때, 그러니까 몸이 안 좋아 학교를 잘 안 나갈 때 과목 시험을 쳤는데 최고성적을 올려서, 당시 서울법대 가족법 담당이었던 정광현 교수[4]가 ‘출석률이 아주 나쁜데 이상하다’ 하고 부른 다음에 “졸업하면 꼭 대학원에 입학해서 교수가 됐으면 좋겠다”고 격려했다고 한다. 그 후 졸업 무렵에 정광현 교수가 또 “대학원에 와라. 내 밑에서 공부해라”고 해서, 정광현 교수의 격려로 대학원에 들어갔다고 한다. [5]
정광현 교수 밑에서 석사과정을 밟을 당시에 이미 스물 여섯살의 나이로 홍익대 강단에 섰다. 그리고 석사학위를 받은 스물 일곱살의 나이에 경희대 법대 교수로 부임했다. 그때가 1955년이었다.
1958년 호주제를 담은 민법이 제정될 당시 정부 초안을 본 후부터 가족법학자의 길을 걷게 됐다.[6] 1963년에는 가족법학회를 창립하였으며, 1964년에는 '친족상속법' 교과서를 단독저서로 발간하였는데, 기존의 민법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인 내용의 교과서여서 수많은 학자, 교수들과 학생들을 충격과 공포에 몰아넣기도 하였다.
그렇게 경희대에서 약 20년 가까이 교수생활을 하다가, 1974년에 성균관대의 초빙을 받고[7] 그곳으로 옮겨서 약 6년 반을 성균관대학교 법과대학에 몸 담았다. 그 당시 이숙종 국회의원[8]이나 이효재, 이태영 박사 등 여성운동의 큰 산맥들과 함께 남녀평등 및 가정민주화를 위해 열심히 활동하였다.
이런 와중에서 김교수의 활동을 마뜩찮아 하던 성균관 유림 세력의 투서로 1978년엔 대만으로 ‘유배 아닌 유배’를 당했고[9] 몇 년 후 연세대로 옮겨야 했다. 이렇게 성균관대에서 거의 쫓겨나다시피 연세대학교로 옮겼던 일은 1980년대 초반 법학계를 떠들썩하게 한 '사건'이었다.[10] 그의 연세대행이 알려지자 학생들이 며칠동안 “유림 압력으로 연대에 가시는 것이다. 절대 못가신다”는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그렇게 1981년에 연세대로 옮긴 후 유림의 간섭이 없어지자 상당히 활발하게 연구도 하고 발표도 하며 기염을 토했다. 가족법학회도 그 당시 크게 발전시켰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여소야대 국회가 되자, 친권과 상속분에서의 남녀평등을 골자로 한 가족법 개정안을 직접 기초하여, 당시 평화민주당 소속이었던 조승형 국회의원[11]의 협조로 1989년 이를 통과시키기도 하였다. 한국 민법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개정을 이때 주도적으로 추진하여 결국 성공시켜버린 셈이다.
연세대에서 12년 간의 교수생활 끝에 정년퇴임을 한 후, 1994년에 다시 경희대로 돌아와 겸임교수로 14년 반을 근무했다. 그의 후학으로 대전의 한남대학교 이경희 교수(남성이다.) 연세대학교 교수인 이화숙, 신림동 고시촌의 민법강사로 유명한 권순한 박사 그리고 김주수의 아들인 중앙대학교 김상용(金相瑢) 교수[12]가 있다.
- ↑ 민법의 최고 실력자로 많은 사람들이 첫손에 꼽았던 사람은 물론 서울법대의 곽윤직 교수였지만, 그 곽윤직 교수의 교과서들 가운데 바이블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저서는 오로지 '상속법' 한 권뿐이었다. 참고로, 곽윤직 교수가 상속법 교과서만을 집필하고, 친족법 분야에 대하여 다룬 교과서를 출판하지 않은 것은, '재산법' 분야에 한정하여 연구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다. 친족법은 신분법이지만, 상속법은 상속관계를 다루면서 재산법과 일부 겹치는 부분이 있기에 재산법 연구의 완성이라는 의미에서 집필한 것이라고...
- ↑ 헌법재판소가 동성동본 금혼법의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릴 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덕분에 유림에게서 온갖 수난을 겪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 ↑ 아마 그때 몸이 좋아서 군대에 끌려갔으면 죽었을 거라고 한다. 폐가 안 좋아서 요양을 하려고 시골에 가 있으면서 1년을 쉬었다고 한다.
- ↑ 당시 한국에서 유일한 가족법학자로 윤치호의 사위였다.
- ↑ 당시 다른 선생님들도 “내 밑으로 와서 공부하라”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고 한다. 상법 교수인 서돈각 교수도 김주수 교수에게 “나한테 와서 했으면 좋겠다”고 했고, 심지어는 정광현 교수에게 가서 “김주수를 나에게 양보하라”고 떼를 쓰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런데 정광현 선생님은 “안 된다. 내가 키울 것이다”라고 하며, 끝까지 양보하지 않았다고 한다.
- ↑ 후에 그 순간에 대해서 “이런 불합리한 법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우리나라 전통도 아니고 헌법에 규정된 양성평등에도 전면 배치되는 호주제를 담는 것은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국가에선 있을 수 없다는 분노까지 치밀었죠.”라고 회고했다.
- ↑ 성균관대 총장을 지냈던 현승종 교수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영입했다고 한다.
- ↑ 성신여대에서 학장을 지내기도 했다.
- ↑ 이때부터 '죽일 놈' '매국노' '지구를 떠나라' 등의 욕설과 협박에 시달렸다고 한다.
- ↑ 사실 성균관대에서 “와달라, 와달라”고 사정해서 옮긴 것인데, 그렇게 성대에서 유림의 저항에 부딪히리라곤 생각도 못했다고 한다. ‘그래도 대학인데 유림이 내게 직접 와서 뭐라고 하겠느냐’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유림들이 당시 성균관대 총장이던 현승종 교수에게 찾아가 삿대질하면서 “김주수 이 사람 당장 쫓아내라”고 난리를 치고, 총장은 “교수는 신분이 보장돼있는데 내가 어떻게 쫓아내느냐”고 곤혹스러워 하는 사태가 계속되니, 김주수 교수도 견딜 수 없었다고 한다. 결국 현승종 총장이 물러난 이후, 김주수 교수도 사표를 쓰는 식으로 성균관대를 떠나게 됐다고 한다.
- ↑ 당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속하였다.
- ↑ 연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인 김상용(金相容)과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