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儒林
유교의 가르침을 따르는 무리를 말한다. 주로 조선시대의 사대부 층을 일컫는다. 조선 초중기의 기득권 선비인 훈구파와 비 기득권 사림파 모두를 지칭하는데에도 쓰이며 이후의 영남, 기호학파 혹은 사색 당파 상관없이 '선비들' 이라는 뜻을 가진다. 조선시대에는 기득권층이었던 '양반' 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계승발전 시키기 위하여 과거시험을 치뤘으며 과거시험은 당연히 유교적인 항목을 기준으로 출제되었던 만큼 유림이라는 단어는 양반, 사대부를 다른 말로 가리키는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이후 양반이라 하더라도 관직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많아졌고 이에 엄밀히 구분하기 위하여 관직을 가진 사대부들과는 대비되어 관직을 가지지 않은 선비들을 포괄하는 단어로도 쓰였으며 현재 대한유림학회 등의 명칭에도 사용되고 있다.
2 독립운동가
柳林
1894년 5월 23일~ 1961년 4월 1일
아호는 단주(旦洲)이다. 1894년 경상북도 안동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 본명은 화영(華永)이다.
1915년에 안동에서 부흥회, 1917년에 대구에서 자강회를 조직해서 활동하다 일제에 의해 탄압받고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 안동에서 만세 운동을 했고 이후 만주로 넘어가 김동삼, 이상룡, 지청천 등과 서로군정서를 조직하고 국내로 들어와 특파원으로 활동했다.
1921년 신한청년당, 1922년 타이완의 청두대학 문과에 입학하면서 아나키스트로 성향이 바뀌어 활동했다.
1928년에 정의부에서 활동하고 이듬해 평양으로 들어와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해 활동하다가 1933년 체포되어 징역 5년형을 선고받는다. 출소 이후 중국으로 넘어가 1940년에 한중항일연합군 조직에 힘썼고 1942년에 임시정부에도 참여해 임시의정원 경상도 대표의원을 지냈다.
1944년 국무위원이 되어 1945년 광복 이후 귀국했다. 1946년 아나키즘 성향의 정당인 독립노농당을 창건했다. 이후에도 노농신문을 창건해서 노동자의 권익으로 보호하는데 힘썼다. 1961년 사망 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초기 행적을 제외하면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