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남

1 한국의 축구 선수

김호남(축구선수)로.

2 박정희의 첫째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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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남(金好南, 1920년 ~ 1991년)은 박정희의 첫 번째 부인이다. 보통 사람들이 박정희의 부인으로 알고 있는 사람은 육영수다. 그러나 박정희가 육영수와 결혼할 당시 총각은 아니었고, 첫 부인 김호남과 결혼했다가 이혼한 상태였다.[1]

김호남의 부친은 박정희의 아버지인 박성빈과 친구 사이였다고 한다. 박정희와 결혼할 당시 김호남은 17세로, 일제강점기 당시에는10대 후반에 결혼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문제는 역시 시골 빈농 출신으로, 대구사범에 진학하여 신식교육을 받았던[2] 박정희로선 좀 더 나이가 든 뒤에 자신과 맞는 여성과 혼인하길 원했다. 그러나 아버지 박성빈은 47세에 낳은 막내의 결혼을 꼭 보고 싶어서, "내가 죽기 전에 막내가 장가가는 건 보고 가야겠다"며 사실상 반강제로 혼인시켰다. 박정희가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초임교사로 발령난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3]

김호남은 딸 박재옥[4]을 키우며 시가에서 지냈다. 주위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 시절 여성답게 시부모를 극진히 모시는 착한 며느리였다고 한다. 그러나 마음에도 없는 혼인을 한 박정희는 타지에서 홀로 교직생활을 하며 월급을 부인에게 준 적이 없었고, 방학이 되어 어쩌다 고향에 내려와도 김호남과는 가급적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5] 이게 너무 심했던지 박정희가 모처럼 고향에 내려왔을 때, 화가 난 큰형 박상희가 박정희를 거의 패다시피(...)하며 김호남의 방에 집어넣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심상소학교를 사직한 뒤 만주로 건너가 만주군에서 복무할 때에도, 박정희는 새 결혼을 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김호남에게 안부를 전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광복 이후 경력자 우대로 잠시 광복군 평진지대 중대장을 맡다, 귀국한 뒤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근무할 때 박정희는 새 결혼을 하고자했다. 박정희는 김호남에게 이혼을 요구했으나, 김호남은 박정희가 찾아올 때마다 도망치며 거부했다. 결국 박정희는 결혼이 아닌, 사실혼 관계의 동거로 이현란과 지내게 된다.[6] 이후 군부 숙군 사업으로 박정희가 투옥된 뒤, 이현란은 박정희를 떠났다.[7] 한국전쟁 발발 이후, 육군 소령으로 복직한 박정희는 소개로 만난 육영수와 혼인을 결심했다. 결혼식을 올리기 2달 전, 박정희는 김호남을 찾아가 다시금 이혼을 요구했다. 김호남도 더는 견디기 힘들었는지 이혼을 승낙했고,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다. 박정희육영수는 1950년 12월, 대구에서 결혼했다.

불교 관련 인사들이 나름 호의적으로 평가하는 인물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박정희 정부에서 불교 교단을 지원해준 연유에서 기인한다. 특히 김호남이 출가한 사실을 알게 된 육영수는 김호남이 머무는 사찰을 적극 지원하였다.[8] 이를 부담스러워해 김호남이 타 지역 다른 사찰로 옮기면 육영수가 다시 행방을 쫓아 그 사찰을 지원해주는 일이 반복되었다고 한다. 일례로 상무대가 광주광역시에 있을 무렵에 김호남이 상무대 내의 진중 사찰 무각사로 옮겨 머물렀는데, 이를 안 육이 다시 지원을 해주어, 상무대 이전 후에도 지역의 대찰로 남을만큼 세가 커졌던 것.

정작 남편과 같이 살 때는 여인의 행복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떨어진 후에야 아이러니하게 남편 덕을 보게된 가련한 여인.

드라마 제 3공화국에선 오연수가 김호남을 연기, 완전 순둥이로 싸늘한 남편의 이혼요구를 울며불며 거부하지만 결국 이혼에 합의해준 후 그 후론 출연이 없다.
  1. 이런 내력을 알고도 육영수는 결혼을 강행했다. 극도로 가부장적이던 부친 육종관에 대한, 부인과 딸의 반발심 탓이었다고 한다. 사주단자를 교환하면서 여럿 점쟁이들에게 사주를 보였는데, 이구동성으로 '이혼한 경력이 있는 남자를 만나면 사주가 중화되어 남편복이 매우 좋아진다'고 풀이했다고 한다.
  2. 당시 식민지 조선에는 경성사범, 평양사범, 대구사범 단 3곳의 사범학교가 있었다. 일체 월사금을 받지 않으며, 용돈조의 격려금까지 받는데다 졸업과 동시에 사범학교 훈도(평교사)로 발령받아 직업도 보장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 식민지 조선에 단 3곳 밖에 없는 사범학교는 폭발적인 인기와 경쟁률을 누렸다.
  3. 박정희는 경북 문경 심상소학교에서 근무했는데, 물에 빠진 학생을 구출해내기도 하고 이웃들과 막걸리를 마시며 격의없이 지내 학부형들도 흡족하게 여겼다. 이때 나이가 찬 딸을 둔 학부형이 있었는데, 박정희를 미덥게 여겨 혼담이 나왔다. 박정희도 좋아하는 눈치였으나, 술자리에서 반 농담조로 "그럽시다"하며 웃고 넘길 뿐 확답을 주지 않았다. 그러다 사람들이 없을 때, 고향에 부인이 있음을 넌지시 말하며 사양했다고 한다. 혼담이 나오기 전까지 박정희는 결혼사실조차 말하지 않을 만큼, 반강제로 했던 결혼을 혐오하고 있었다.
  4. 박정희가 준장 시절 부관을 지냈던, 육군장교 한병기와 결혼했다. 한병기는 훗날 외교관으로 전직하여, 주 칠레 대사를 지냈다. 외교관 남편을 둔 탓에, 박정희가 사망할 당시 박재옥 부부는 외국에 있었다. 1997년 대선 때에는 박정희의 조카 박준홍과 함께 김대중을 지지했다.
  5. 방학 때조차 부인과 마주치기 싫어, 거의 내려간 적이 없었다고 한다. 이 시절 박정희의 제자들은 가끔씩 곱게 차려입은 할머니가 박선생님을 찾아오곤 했다고 증언했는데, 바로 박정희의 어머니인 백남의였다. 아들이 내려오질 않으니, 어머니가 대신 올라갔던 셈(...).
  6. 한 때 이현란과의 사이에 아들이 있었다는 낭설이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이현란 생전인 1988년, 자유기고가 강인옥과의 인터뷰에 따르면 "내가 그 때 애 낳을 새가 어디 있어? 차라리 애가 있으면 붙잡혀 못 나왔을 거야."라고 했다. 사실 두 사람이 지낸 기간이 많이 짧기도 했다.
  7. 이현란은 북한 출신으로, 북한정권을 피해 월남한 처지였다. 그런 마당에 졸지에 '빨갱이 마누라'가 된 셈이니 분노가 극에 달했다고 한다. 한국전쟁의 발발과 함께 북한이 낙동강 이남을 제외한 남한 전역을 석권했을 때, 당연히 북한군에 붙었을 줄 알았던 박정희가 북한에 가지 않고 국군에 현직으로 복귀한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8. 어찌보면 전처의 자식이자 계모의 입장인데도, 김호남의 딸인 박재옥이 혼기가 차자 좋은 혼처를 구해주기 위해 백방으로 알아본 것도 육영수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