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광복군

(광복군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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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천에 위치했던 광복군 간부 훈련소 한광반 제 1기 사진. 광복군으로 유명한 장준하, 김준엽, 윤경빈 등이 속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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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9월 17일, 중경에서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식을 마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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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9월 17일, 중경에서 한국 광복군 창설 기념식이 끝난 뒤 오찬장에서 축사하는 김구 주석(왼쪽에 일어선 이)과 임시정부 요인 엄항섭(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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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 한국 광복군 제2지대 대원 기념사진, 한국 광복군의 영어 이니셜 K. I. A를 광복군이 집체 모양으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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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월 1일, 한국 광복군 제5지대 창설 기념사진.

韓國 光復軍, Korean Liberation Army

1 개요

삼천만 대중 부르는 소리에

젊은 가슴 붉은 피는 펄펄뛰고
반만년 역사 씩씩한 정기에
광복군의 깃발 높이 휘날린다
칼집고 일어서니 원수 치 떨고
피 뿌려 물든 골 영생탑 세워지네
광복군의 정신 쇠같이 굳세고
광복군의 사명 무겁고 크도다
굳게 뭉쳐 원수 때려라 부셔라
한 맘 한 뜻 용감히 앞서서 가세
독립 독립 조국 광복
민주 국가 세워보자
 
-광복군 행진곡-

대한민국 임시정부 휘하에 창설되었던 직속 군대로, 육군으로만 구성되어 있었다.광복 후엔 대한민국 육군이 한국 광복군의 역사를 계승했음을 밝히고 있다.

2 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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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훈련중인 한국 광복군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중국 국민당중국 공산당의 2차 국공합작이 이뤄졌고, 이전과 달리 공동의 적 일본제국을 상대해야 하는 장제스는 태도를 바꿔 임정이 무력수단을 갖출 수 있도록 전폭적인 지원을 하였다. 여기에는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의거로 조선인들에 대한 우호적인 분위기가 조성된 데다, 장제스와 김구 개인이 돈독한 사이가 된 점도 한몫했다.

그리하여 1939년 창군된 한국 독립당 당군을 기반, 지청천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충칭에서 1940년 9월 17일 한국 광복군이 결성되었다. 초기 인원은 30여 명이었으나 이는 한국독립당 내부에서 어느 정도 이상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장교급 인사만 참여한 것이었으며 이후 병사를 모집하였다. 초창기에는 병력 모집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1942년 조선의용대 중에서 화북으로 가지 않고 김원봉과 함께 잔류한 300여 명을 흡수하면서 골격을 갖추었다. 그러나 그 규모는 1,000명 이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전반적으로 자유시 참변 이후 독립군의 규모는 쭉 줄어드는 추세였는데, 1920년 경 만주 지역의 독립군은 약 4,000여 명 규모였으나 일본만주를 점령해 퇴각하고 이어 자유시 참변을 겪으면서 반토막 이하로 줄어들었고, 만주에서 게릴라전을 펼칠 당시 한국 독립군의 병력은 약 1,600여 명 정도였다. 1930년대 만주에서 동북항일연군 산하에서 활동했던 조선인 무장부대들도 그 숫자는 몇백명 수준이었던걸로 추정된다. 그나마 한인 거주자가 많았던 만주에서 이 정도였는데 중국 본토, 그것도 한참 내륙인 충칭에서 사람을 모으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 부분은 많이 안타까운 사실인데, 사실 광복군은 김원봉의 조선 의용의 규모보다도 못했던 게 현실이었다. 광복군 창설 초창기에는 청년들이 모여들지 않아 30명의 장교들로 편제만 짜서 결국 '사병들은 거의 없는 군대'를 만들었던게 시초였다. 나중에 1942년에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300여명이 합류한 것이 광복군에 있어서 매우 '커다란 전력'이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한 김원봉은 화북에 파견된 조선의용[1]과 통합시켜 규모를 확대시키고자 노력했으나, 임정의 원로계 인사들의 반발로 이게 결국 이뤄지지 못했다. 공산주의자는 믿을 수 없다. 지휘부만 합류하라.[2] 남의사출신도 많다.

때문에 전면전의 전투 역할은 참여하지 못했으며, 중일전쟁이나 미얀마 전선에서 첩보와 통신, 한국인 회유 등의 업무를 맡았다. 중국 국민당은 "한국 광복군 9개 준승 사항" 이라는 이름으로 한국 광복군의 활동을 제약했으며, 이러한 제약은 1944년 말에 가서야 풀렸다. 즉, 초창기에는 중화민국 육군의 지휘를 받다가 광복 직전에 지휘권을 환수받은 것. 사실 이에 대해 뭐라고 하기도 힘든 것이,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 아프리카 어느 망명 정부가 들어와서 산골짜기에 사령부를 차리고 젊은이들을 모아 군사훈련을 한다면, 암만 우방국이래도 신경이 상당히 거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나마 국가원수인 장제스 총통이 윤봉길과 김구 덕에 조선과 임정에 호의적이었던지라 이 정도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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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전선의 인면전구공작대[3] 대원 일동. 이들은 제1지대 소속이다. 가운데 있는 인물은 한지성으로 김원봉의 최측근 인사였다. 오른쪽에 있는 사람은 조선에서 오랫동안 선교사로 일했던 캐나다 육군의 롤랜드 베이컨 예비역 대위로, 광복군 대원들 사이에서 조선의 벗이라 불릴 정도로 한국과 깊은 인연을 맻은 사람이었다.

임팔 전투 당시, 버마 전선의 영국군의 요청에 따라 현지 영국 육군 부대에 배속되어 근무한 인면전구공작대가 사실상 유일한 실전 참가 부대라 할 수 있는데, 국민당 정부로부터 눈칫밥 먹으며 연명하던 것에 비해 영국군은 현지 사령관이었던 영국 해군원수 루이스 마운트배튼 제독이 직접 이들을 언급할 정도로 관심을 가졌고, 또한 지속적으로 이들의 파견 및 증원을 요청하고 자신들이 숙식은 물론 급여와 피복 등까지 자진해서 부담하는 등 매우 후한 대우를 받았다.

인면전구공작대 역시 이러한 대우에 걸맞은 활약상을 보여줬는데, 이들은 1943년 8월 영국군 총사령부가 있는 인도 캘커타에 도착하여 4개월간 교육 후 1944년 3월 영국군 장교 신분으로 임팔전선에 투입되었고, 1944년 5월, 포위된 줄 알고 현지에서 죽을 각오로 싸우려던 영국 육군 17사단 에게 포위망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을 문응국 대원이 감청을 통해 알아내어 퇴각 타이밍을 놓치지 않게 해 전력을 보전케 하는 등으로 호평을 받았다. 또한 인면전구공작대 파견 대원들은 기본적으로 영어와 일본어 모두 구사할 수 있었으며 적진 교란방송, 일본군 포로심문, 문건번역 등, 심리전에 투입되었다. 실제로 일본군 15사단 조선인 군속들이 선무공작방송을 듣고 단체로 투항하는 일도 있었다.
이후 영국군은 지속적으로 중경의 임시정부에 인원 증파를 요청하였으며 중국 국민당에 의해 불허된 인원을 제외한 나머지 대원을 임시정부 차원에서 1945년 3월 파견하려 했지만 종전으로 무산되었다. 남은 공작대원들은 1945년 5월, 연합군의 랑군탈환전에 종사하였으며 1945년 9월 10일 전원 중경의 광복군총사령부로 복귀하였다.

1945년 8월, 미국 OSS(CIA의 전신)와 접촉해 연합 훈련을 받고 50여 명의 대원을 미 해군 잠수함을 통해 침투시키는 서울 진공 작전에 투입하려 하기도 하였으나 일본의 항복으로 무산되었다.

김구의 비서인 선우진고려대학교 전 총장이었던 김준엽, 국방장관을 역임한 이범석 등의 인사들이 광복군 출신이다.

2.1 진공작전이 시행됐더라면?

일본의 항복이 조금만 늦춰졌다면 진공작전이 시행되어 분단이 안 됐을 것이니 강대국으로부터 간섭받지 않는 자주적인 나라가 되었을 것이니 하는 떡밥들이 예전부터 유구하지만 솔직히 희망이 없다고 봐야 한다. 우선 광복군의 병력이 형편없을 정도로 빈약해서 일본군을 이길 수준이 못 된다는 것은 둘째치고 광복군 지휘관들이 이순신이 빙의가 되어서 연전연승으로 이긴다 쳐도 임정 주도의 정부가 수립될 가능성은 제로다. 소련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도 임정을 인정하지 않았는데[4] 장제스 지지만 있어봐야 한반도에서 가장 지분이 큰 두 열강을 설득하지 못하면 도루묵이고 잘해봐야 무시고 최악의 상황에선 연합군에게 토벌을 당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한국 광복군은 '승리'가 목표였다기보다는 어디까지나 '참전' 자체에 의의를 둬야 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자주적인 주권정부로 발전하기는 어려운 것이 나치에게 본국이 점령당하고 자국 정부가 망명정부의 처지로 전락한 상황에서 본국내에서 바르샤바 봉기로 수십만이 죽어나간 폴란드나 수만 단위로 총 들고 일어났던 체코슬로바키아, 2차 대전 막판에 나치 독일과 동맹 관계를 파기하여 독일의 뒷통수를 쳐 연합국으로 돌아서 나치 독일을 역으로 공격했던 루마니아, 불가리아 같이 나치 패망 후 뒤이어 들어온 소련군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공산 국가화되어[5] 냉전 체제가 몰락할때까지 수년간 소련의 위성국가로 주눅들던 일부 동유럽 국가들의 사례들을 감안해도 그럴 리가 없음을 명백히 알 수 있다.[6] 프랑스의 사례는 한국과 다른 것이 프랑스는 존재감이 적던 아시아 식민지인 한국과 달리 세계 2,3위를 다투던 강대국급 열강이었는데 미국이 낼름 먹는다는 것 자체가 가능성 없는 소리고 프랑스 식민지 중엔 비시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 지역이나 영국의 개입으로 탈환된 시리아 지역도 있었다. 그리고 애초에 프랑스는 엄연히 2차 대전의 초기부터 참전했던 참전국이었다. 비록 몇 주 만에 밀렸다지만 독일군과 전투를 벌였던 국가이기 때문에 전쟁 시작하기도 전에 식민지 상태였던 한반도와는 상황이 많이 다른 편이다. 게다가 자유 프랑스의 병력은 44년에 이미 40만명이 넘었고, 전쟁 막바지에는 130만이 넘었다.[7]이는 숫적으로 연합군에서 5번째로 많은 병력이었다. 별로 한 게 없다고 하는데 서부전선의 주력인 미군-영국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독일 본토로 진격하는 동안 자유 프랑스군은 파리를 탈환하고 남프랑스의 독일군과 싸웠으며 만명이 넘는 전사자를 내고, 15만 이상의 독일군을 붙잡는데 성공한다. 자유 프랑스의 상황이 이랬는데 1,000명 정도에 불과한 광복군이 전쟁을 한다해도 승전국 대우를 받았을 것이라는건 가능성이 없다.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정통성이 있다고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강대국의 인정을 받기 어려운게, 이미 소련은 정당성 만렙+@인 폴란드 임시 정부를 깡그리 무시하고 폴란드 인민 공화국을 세운바 있다. 폴란드 임시 정부는 그야말로 정당성 끝판왕이다. 이들은 헌법에서부터 폴란드 제2공화국을 계승하고 있었으며, 2차 대전 개전시부터 추축국과 싸웠고, 2차 대전 기간 내내 영국에서 추축국과 싸웠으며, 수 많은 전사자를 내었다. 참고로 이들은 폴란드 인민공화국이 건립된 45년부터 90년까지도 계속 영국에 머무르며 소련이 세운 폴란드 인민공화국을 부정했고, 1990년 페레스트로이카와 소련 해체의 결과로 민주적인 폴란드 제3공화국이 탄생하자 폴란드 제2공화국의 헌법 전문, 대통령기, 국새, 국장을 전부 제3공화국의 수장인 레흐 바웬사에게 물려주면서 자연스럽게 해체하였다. 당시 상황이 이랬는데 소련은 한국을 특별히 예외를 인정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해줄 가능성은 적다.

광복군의 국내 진공 작전이 시작되었으면 어느 정도 활약을 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도 상당히 비관적인데 일제강점기 조선에는 일본 육군 2개 보병사단이 주둔하고 있었다(헌병, 해군 육전대로 동원 가능한 일본 해군 인원 제외). 당시 광복군은 많아야 500명~1,000명 수준으로 광복군이 진공 작전을 했다고 하더라도 해방시킬 만한 힘이 없었다고 보아야 맞다. 여기에 17명으로 시작했다는 피델 카스트로라울 카스트로, 체 게바라의 쿠바 혁명을 언급하기도 하지만, 결국 통치 구조를 깡끄리 몰아낼 수 있는 대군이 없는 이상 일부 후방 교란으로 일제의 한국 통치엔 흠집도 안 난다. 이미 일제가 경술국치 전후로 수만명에 달했던 의병들을 싹쓸이한 걸 상기해보자.

그리고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 라울 카스트로의 경우, 체 게바라가 한 건 혁명이지 전쟁이 아니고, 그가 상대한 건 정부군이지 타국의 군대가 아니었다. 당시 쿠바의 바티스타 정부는 극도로 부패한 독재정권인 데다 2만이나 되는 시민을 학살했으므로 시민은 물론 정부군 내부에서도 반감이 엄청 많았다. 따라서 바티스타 정부군은 사기가 아주 낮았고 같은 나라 사람인 쿠바혁명군과 싸울 바에는 도망치거나 항복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고, 심지어 혁명군에 합류하는 경우도 많았다. 반면 광복군의 상대는 일본 제국의 정규 육군 보병사단이다. 광복군이 진입했다고 이들이 바티스타 정부군처럼 물러날 가능성은 적다. 후방 교란의 가능성은 둘째 치고 혁명과 전쟁을 착각한 전혀 무관계한 예시이다.

당시 국내에서 나름 비밀결사 형태로 활동했던 독립운동 단체가 있었음은 염두해 둬야겠지만 워낙 전력차가 압도적이고, 설령 이렇게 저렇게 일본군을 상대로 이긴다고 해도 뒤이어 진주해 오는 소련군은 감당불가이다. 소련의 입장에서 큰 변수는 되지 않는다. 아무리 패전 직전의 일본군이라 해도 광복군 1,000명 정도 가지고는 조선 주둔군으로도 이길 수 있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무장투쟁에서 광복군은 굉장히 협소한 활동을 했고, 만주에서 있었던 독립군이나 조선인 무장세력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전해온 것은 우수한 게릴라 전술을 펼쳤기 때문이다. 국내 진공을 한다면 좁은 한반도에서 마냥 게릴라전만 할 수 있는게 아니라 어느 시점에서 반드시 일본과 정면대결을 했을수밖에 없는데, 이 정도 전력차로는 이길 수가 없었다.

폴란드의 경우, 연합군의 일원으로 60만에 가까운 장병들이 싸웠고[8] 여기에 국내에서 100만에 이르는 빨치산[9]들이 활약했으나 승전국 대우를 받지 못하고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래도 해방 후 미국과 소련에 의해 남북한으로 분단된 한국과 달리 이 쪽은 나치 독일이 차지하던 동프로이센과 포메른, 슐레지엔등 구 독일 영토들을 할양받았다. 대신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서부 지역의 폴란드 땅들과 빌뉴스등 리투아니아 일부 영토는 소련에게 엄청나게 뜯겼지만(...)[10] 그리고 전후 본국으로 귀국한 15,000여명의 자유 폴란드군 장병들은 나치 독일 완장 차던 놈들 대신 자리잡은 빨간 완장 찬 매국노[11]들에게 반동 취급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소련군의 38도 이북까지 진군하는 것은 이미 얄타 회담에서 결정된 사항이다. 설사 광복군이 일기당천으로 한반도에 주둔한 일본군을 싸그리 몰아낸다해도, 38도선 이북까지 소련군이 내려오는 것은 얄타 회담을 뒤엎지 않는한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75만 일본 관동군을 개박살낸 150만의 소련군과 27,000문이 넘는 야포, 5,000대가 넘는 탱크, 4,000대에 가까운 군용기를 상대로 싸우는 건 사실상 불가능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광복군의 국내진공작전이 계획대로 이루어지고 거기에 더해서 어느정도 성과를 냈다면, 광복군도 한반도에서 전투를 했다는 "의의"만 생길뿐, 강대국의 간섭을 안받는다거나, 남북분단이 없었다거나 하는 식은 이뤄지기 어렵다.

3 병력

병력을 보자면, 위에도 언급되어 있는 무장세력과 연결고리를 찾아야 하는데, 김구를 포함한 임정 보수파가 사회주의 냄새 나는 세력과의 연결을 거부한 경력이 오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다. 후일 북한 조선인민군의 모체가 되는 조선의용군만 봐도 그 본체는 임정에 합류한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의용대였다. 하지만 김원봉이 전투를 소극적으로 한다라는 이유로 대부분이 이탈하여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라는 이름으로 만주에서 전투를 벌인 것이다. 이것이 김두봉이 이끌던 세력과 결합된 것이 바로 조선의용군이었다. 본문에도 적혀있지만 김원봉은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와 연결해서 임정직할병력을 늘리려고 했지만, 김구는 이것이 사회주의자 김원봉의 세력이 될 것이다는 이유로 거부했다.[12] 이 병력은 일제시대 말기 기준으로 봐도 적어도 8천여는 된다.[13] 광복군에 비하면 몇 배나 되는 병력이다. 결국 조선의용군은 일제에 함께 대항했다는 이유로 중국 공산당 팔로군에 소속되어서 나중에는 국공내전까지 참여한 베테랑 부대가 되었다. 6.25 전쟁 초기 북한군이 개인수준에서도 한국군을 압도했던 이유중 하나가 이거다.

8.15이후 일본군으로 징집되었던 조선인들을 모아서 약 3개 사단을 편성한뒤 국내로 입성할려는 계획이 있었으나 광복군을 껄그럽게 생각하던 미군정에 의해서 중국을 압박하여 해산하여 개인자격으로 귀국할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8월 18일, 김준엽, 장준하, 노능서 등 광복군 대원들이 미 육군 고문단과 같이 미 육군 항공대의 비행기를 타고 국내진입을 시도했으나 전쟁 다 끝난 시점에서 쓸데없이 발악한 일본 육군 방공포병저항탓에 발길을 돌렸다.

4 계급

병력수에 비해 계급이 너무 많아서, 윗 계급에 아래계급부하를 2명씩 배치하지도 못한다.[14]

계급장은 이 블로그를 볼 것. 계급 체계는 상당 부분 대한제국군에서 따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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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광복군 계급
장관(将官)
정장(正將)

부장(副將)

참장(參將)
영관(領官)
정령(正領)

부령(副領)

참령(參領)
위관(尉官)
정위(正尉)

부위(副尉)

참위(參尉)

준위(准尉)
하사관
(下士官)

복무정사(服務正士)

정사(正士)

중사(中士)

참사(參士)
병사(兵士)
상등병(上等兵)

일등병(一等兵)

이등병(二等兵)

5 장비

광복군은 국민혁명군 육군의 지원을 받고 있어, 이들이 사용한 독일(제3제국)과 미국, 영국제 장비를 혼용했다. 중일전쟁 중 대거 노획된 일본군 병기도 상당수 사용하였다. 추가바람.

5.1 보병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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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총 사격 훈련중인 서안의 광복군 2지대 대원들

전체적으로 요약하자면 중일전쟁에서 쓰인 무기라고 보면 된다. 당시 광복군은 중국에 있으면서 중국에게 원조를 받았기에 중국군이 쓴 무기를 썼고 이 중에선 당연 노획한 일본군의 무기도 있다. 미국 OSS와의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할 때는 중국에 지원받은 것과는 별도로 미국제 그리스건M1 카빈 등을 받기도 했지만, 중국 역시 미국 정부로부터 이런 무기들을 지원받았기에 어차피 겹치는 경우이다.

추가바람

5.2 지상 병기

추가바람.

6 군가


자유프랑스의 비공식 국가로 쓰이던 Le Chant des Partisans라는 곡을 행진곡으로 썼다. 더 자세한것은 독립군가 항목 참고 바람.

7 광복 이후

한편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중국 국민당은 한국 광복군의 이름 아래 패전 후 포로 혹은 항복한 관동군 부대 내 조선인들을 자신들의 군사 세력으로 편입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1945년 11월 장제스의 발언 마찬가지로 중국 공산당 또한 조선의용군의 이름으로 패전 후 갈 곳을 잃은 일본 육군 내 조선인들을 규합하였다(그리고 조선의용군은 2~3만 명 수준까지 성장하여 6.25 전쟁조선인민군으로 편입되게 된다.). 장준하돌베개에 의하면 아편장수나 일본 육군 위안부 조선인 포주도 있었다고 한다.

6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난 지금 논하기는 복잡하지만, 이러한 일들의 영향으로 가짜 광복군 서훈 문제가 불거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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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 광복군들 대부분이 개인자격으로 귀국해야 하는 아픔을 겪었고 국방경비대 창설에서 본위주장으로 광복군들 스스로가 반발하여 입대를 대거 거부하는 사태도 벌어졌다.[16] 하지만 광복군들 대부분이 대한민국 육군 장교부사관으로 입대, 한국전쟁 때 한국 육군에서 활동했다. 거의 대부분의 광복군 출신들이 한국 육군에 입대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다만 숫자 자체가 워낙에 적었던 데다 나이 좀 있는 사람들은 정치쪽으로 빠지고, 군에서 일본 육군이나 만주국 육군 출신들이 많아 목소리를 내기 힘들었다.[17] 자체 항공대를 보유하지 못한 탓에 대한민국 공군에는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했고,[18] 대한민국 해군은 창설 멤버대다수가 상선사관 출신들과 소수의 일본 육해군 출신[19]들로 시작해 아예 연이 없다고 봐도 된다.[20]

광복군이 조선을 광복(해방)시키기 위한 거였지만, 해방 이후에는 건국실천원양성소에 참여해서 건국실천원을 양성하는 일을 했다(주로 강사로서 교육을 했다). 대표적인 인물은 나재하, 조소앙, 엄항섭 등. 김학규도 강사로 있었다.
건국실천원양성소 강사명단 언항섭은 사실 엄항섭인데, 오타가 났다. 평화재향군인회에 있는 명단을 보면 장덕수김활란도 있다. 졸업생(1~2개월 단기 강습형식)은 건국실천원양성소 졸업생 명부는 해당논문 후반부에 있다.#

7.1 광복군 출신 국군 지휘관 명단

- 신흥무관학교 졸업. 북로군정서 연성대장으로 청산리 대첩 참전. 이후 한국 광복군에서의 계급은 육군소장에서 중장, 광복군 사령부 참모장에 임명. 광복 후 초대 국방부 장관, 국회의장에 임명
- 중국 귀주강무당과 중국육군대학 졸업, 중국 중앙군 제19사단장 대리, 중국군 소장, 중국군 근무시 윤봉길 의사의 도시락 폭탄 제조, 광복군 참모장으로 계급은 광복군 참장. 국군에서 장성급으로 특별임관, 국군에서 육군 중장으로 시흥지구전투사령관, 제1군단장, 육군종합학교장 역임.
- 청국 육군사관학교 및 중국육군대학 졸업, 중국군 상교, 광복군 총무처장으로 계급은 광복군 참장. 국군에서 공군간부후보생 1기로 장교임관, 공군 중장으로 공군사관학교장 및 제2대 공군참모총장 역임.
- 중국항공사 졸업, 중국 육군 항공대 소교, 국군에서 공군간부후보생 2기로 장교임관, 국군에서 공군 중장으로 제6대 공군참모총장 역임.
- 황포군관학교 제10기 졸업, 중국군 중교, 광복군 계급은 정령. 국군에서 육사3기, 국군에서 11사단장, 보병학교장, 군단장 역임하고 육군 중장까지 승진, 후에 월북.
-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분교 출신, 중국군 소교, 광복군 남원지대장으로 계급은 광복군 정령. 국군에서 육사8기 특별임관, 육군사관학교장, 군수사령관을 역임하고 육군 중장까지 승진. 독립기념관 관장.
  • 육군중장 이준식 장군
- 운남강무당 출신, 중국군 상교, 광복군 지대장 역임, 광복군 계급은 정령, 국군에서 육사8기 특별임관, 육군 중장으로 육군대학총장 역임.
  • 육군소장 유해준 장군
- 황포군관학교 제15기 졸업, 중국군 상위. 광복군 총사령부 참모, 계급은 광복군 부령. 국군에서 육군 소장으로 군부사령관 역임.
  • 육군소장 권준 장군
- 황포군관학교 제4기 졸업, 중국군 상교, 광복군 무한지대장 역임, 광복군 정령. 국군에서 육사8기 특별임관, 육군 소장으로 수도경비사령관 역임.
  • 육군소장 박영준 장군
- 황포군관학교 제17기 졸업, 중국군 상위, 광복군 개봉지구 특파단장, 광복군 부령. 국군에서 육사8기 특별임관, 육군 소장으로 사단장 역임.
  • 육군소장 김국주 장군
- 광복군 서주지구 특파단장, 광복군 참령, 국군에서 육사7기 특별임관, 육군 소장으로 관구부사령관 역임.
  • 육군준장 송호성 장군
- 하남군관강습소 출신, 중국군 상교. 광복군 지대장, 광복군 편련처장, 광복군 계급 참장. 경비대 총사령관 역임. 육군 준장, 한국전 때 월북.
  • 육군준장 오광선 장군
- 보정군관학교 중퇴, 중국군 상교, 신흥무관학교 졸업, 광복군 국내지대장, 광복군 참장. 국군에서 육사8기 특별임관, 육군 준장으로 호국군여단장(현재의 육군 예비군) 역임.
  • 육군준장 김동수 장군
- 황포군관학교 제10기 졸업, 중국군 중교, 광복군 서안지대 근무, 계급은 광복군 정령. 국군 장교로 특별임관, 국군에서 육군 준장으로 사단장 역임.
  • 육군준장 고시복 장군
-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분교 출신, 중국군 중교, 광복군 참모처 과장, 광복군 정령. 국군에서 육사2기, 국군에서 육군 준장으로 병사구사령관 역임.
  • 육군준장 박기성 장군
- 황포군관학교 11기 졸업, 중국 육군대학 졸업, 중국군 중교, 광복군 서안지대에서 근무. 국군에서 육사3기, 국군에서 육군 준장으로 육군 군사감 역임.
  • 육군준장 장호강 장군
- 광복군 제남청도지구 특파단장 역임, 광복군 참령. 국군에서 육사8기 특별임관, 육군 준장으로 군수기지사령부 부사령관 역임.
  • 육군준장 채원개 장군
- 중국 육군 제59사 작전참모, 중국육군제2사 참모처장, 교도단장, 중국제19집단군 총사령부 작전참모, 중국육군제78사 참모장 등 역임. 1942년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총무처장에 취임 후 1944년 광복군 제1지대장 역임. 1949년 육군사관학교 3기특과(三期特科)로 임관, 연대장·사단장을 거쳐 1950년 준장으로 예편.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
- 1932년 상하이 사변 시 제19로군에 소속되어 일본 해군 육전대와 2개월간 교전, 중일전쟁 때 일본 육군 헌병대에 체포되어 9개월간 옥고를 치룬 뒤 국민당 예하 군벌의 소교까지 진급, 해방 후 광복군에 입대했다 귀국. 여순 사건 당시 남조선국방경비대 제14연대장에 재직중이라 무고했음에도 경찰과 보안사령부 등에 시달려 억울하게 형을 살았다.
  • 육군 보병소령 윤태현
- 한국전쟁 초반에 대대장 보직 중 지휘책임을 추궁당해 즉결처분당했다.

7.2 광복 이후 관련 인물들의 사건

  • 최덕신월북양민학살 : 그는 광복군출신으로 장준하김우전과 달리 중국군관학교 출신으로 오랫동안 독립운동을 했다. 그래도 해방 이후에는 육군사관학교에 입소(…)해서 소위가 되었다가 3년도 안 되어 육군사관학교 교장이 되는 초특급 승진을 한다. 그래서 한국전쟁때 사단장도 되었지만...거창학살 사건과 관련되었다(…). 물론 신성모도 책임이 크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에선 반정부 활동(후술)을 하다가 1986년, 부인과 함께 월북했다.

8 출신 인물

기타 인물들은 한국군 내 광복군, 중국군 출신 장군 명단 (총23명) 그외.에서 일부 확인할 수 있다.

9 그 외

2000년대 우후죽순 생겨난 대한제국 황실 복원운동 계열 단체 중 일부 주장에 따르면, 대한광복군의 광복(光復)이 고종황제의 연호였던 광무(光武) 연간을 회복, 수복한다고 하지만, 그 근거가 대체로 미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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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 창설 70주년 정부에서 주최한 행사에서 엉망으로 재현된 모습. 착용자들은 대학생일본군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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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개인 재현자들. 모두 사비를 들였다고 한다. 어째 위의 정부 주최 행사 때보다 퀄리티가 더 나은 듯.

10 참고 문서

  • 독립군(한국)
  • 대한민국 국군
    • 대한민국 육군 - 일단 건군기 당시 대다수의 인원이 일본군 학병지원병, 조선인 일본군, 만주군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와 국군은 국군의 뿌리를 대한제국군과 구한말 의병, 광복군이라 자처하고 있다.# 물론 광복군과 군인 출신 독립운동가들 대부분이 국군 창설에 참여한 것이 사실이긴 하다.하지만 광복군 다 합쳐봐야 1천도 안 되니 극히 소수일 수 밖에 이들 가운데 공군으로 들어간 소수를 제외하면 육군으로 들어갔으며, 공군 또한 육군 항공대 시절부터 참여한 경우가 대부분이라 광복군 출신들은 사실상 거의 육군이 되었다고 보면 된다.
    • 대한민국 해군 - 가장 광복군과 거리가 있는 조직이지만, 창군 시부터 일본군 출신자들이 아닌, 독립운동가인 손원일 제독을 위시한 상선사관들이 주류를 이루었기에 일본군 출신들이 가장 많이 배제된 군종이다. 굳이 광복군과 연관을 짓자면, 초대 참모총장인 손원일 제독의 부친인 손정도 목사가 임시정부의 의정원 의장으로 재직하면서 김구와 함께 대일본 무장투쟁을 전개한 것과 손원일 제독 본인이 1930년 상하이의 독립운동 단체의 비밀연락원의 임무로 입국하였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투옥된 경력이 있다는 것이다. 일본 해군이 조선인을 받아들이는 걸 극도로 꺼렸기 때문에 수가 적고, 함정 근무자는 거의 없다시피했기 때문이다. 소수의 일본 해군 출신들은 이후 대부분 해군 육전대 경험을 근거로 대한민국 해병대 창설 시 이쪽으로 옮겨졌다. 한국 해군은 국군으로 묶어 언급될 때를 제외하면 역사에서 광복군과의 연관성은 거의 말하지 않는다. 한편 한국 광복군에 함선이 완전히 없었다고 할수는 없는데 영국 국적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한 독립 운동가였던 조지 루이스 쇼는 계림호라는 배로 광복군이나 임정 요인들의 이동이나 군수물자 이동을 도왔다.
    • 대한민국 공군 - 광복군 참모처장 출신의 최용덕 장군의 주도하에 창군되었다. 물론 일본육군항공사관학교 출신 김정렬,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 장지량 등 일본군 출신도 있었다. 항공계 인물들이 중국과 일본을 빼면 극소수인 탓. 다만 일본 항공계 출신이라 해서 무조건 일본군 출신인 건 아니었으며, 안창남과 같은 일본의 민간 비행학교 출신도 있었다. 공군 창설의 주요 간부 중 한명이었던 4대 공군참모총장 장덕창 장군이 그 예. 최용덕 장군도 중국군에서 복무하면서 동시에 광복군 참모처장을 겸했고, 김구의 아들이자 6대 공군참모총장인 김신 장군 또한 중화민국 공군 출신이었다.
  1. 광복군보다 병력도 많았고 실제전투 성과도 있었지만, 대부분 중일전쟁 기간 동안 중국공산당과 연계해서 활동하였고 해방후에는 북한 인민군의 주력이 되었기에 대한민국에서는 이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가슴아픈 현대사
  2. 실제로 1930년대 후반 이후 만주의 게릴라전은 조선의용군 화북지대와 양세봉조선혁명군을 이어받은 조선인민혁명군이 수행하지만 이들은 훗날 합쳐서 조선인민군이 된다.
  3. 인면전구공작대(印緬戰區功作隊)의 인印은 인도, 면緬은 미얀마를 가리킨다.
  4. 소련은 공산당 계열이 아닌 임정을 인정할 생각이 애초에 없고 영국이나 미국은 임정을 장제스의 괴뢰단체로 보기도 했다.물론 국내진공작전을 미국OSS가 직접 지원했던 것이기에 진공작전 이후로 미국이 임시정부를 내세워서 이용하기 위해서라도 어느정도 인정했을 가능성이 있긴 하다.그러나 전체적인 권력은 여전히 미국이 가져갔을 가능성이 크다.
  5. 특히 체코슬로바키아는 제2차 대전 독일군 해방 후 본국에서 치뤄진 자유 총선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이 총선에서 압승을 거둔 뒤 소련의 지지를 받고 쿠데타를 일으켜 비공산 야당 세력들을 모조리 제거하고 공산정권을 세우는 일까지 있었다.
  6. 하지만 제2차 대전 당시 나치 독일과의 동맹에 적극 참여하고 소련과 동유럽 전선 일대에서 유대인과 슬라브인들을 대량 학살하고 온갗 잔인한 전쟁범죄 만행을 저지르는 등 확실히 전쟁 범죄 국가임이 명백한 루마니아와 달리 불가리아는 나치의 강압에 의해 타의로 독일과 동맹을 맺고 전쟁 기간 내내 대부분 억지로 끌려가다시피했고, 나치 독일 정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나치의 홀로코스트에 반대하며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에 보내지 않고 적극 보호한 이력이 있어 과연 루마니아나 일본, 나치독일, 이탈리아등 다른 추축국들과 같이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으로 일방적으로 분류해야할지는 의문이다. 이러한 점 때문에 불가리아는 독일의 유엔 상임이사국 진출 문제와 관련해 자신들이 외려 나치의 피해국이라고 주장하며 2차 대전 당시 나치에 피해를 입었던 여타 유럽 국가들(네덜란드, 폴란드, 체코, 노르웨이 등)로부터 외교적으로 동정과 지지도 받아가며, 이들 나라들과 같이 독일의 유엔 상임이사국 진출에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다. 물론 역사를 배운 분이라면 불가리아는 2차 대전때 독일 동맹국인데 누워서 침뱉는거 아니냐고 말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최소 제2차 대전 당시 난징대학살, 위안부등 자국 군대가 저지른 전쟁 범죄 만행들과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가임을 인정하지 않고 되레 전쟁 피해국가 행세를 하려드는 일본 정부와 일본 극우들의 그릇된 역사왜곡 행동들에 비하면 이 나라의 제2차 대전 피해국 주장은 그래도 명분은 있는 편이다.그래도 일본 극우익 정치가들 같은 인간들보다는 불가리아 애들이 백배 더 낫다.
  7. 이는 서부 연합국 한정으로 4위에 이르는 수치이다. 프랑스는 막판에 프랑스가 해방되면서 크게 몸집을 불린 것이었다.
  8. 미국, 소련, 중국, 영국 다음.
  9. 영국으로 망명한 자유 폴란드군과 소련에 포로로 잡혀 있다 친소 폴란드군으로 개편된 병력을 합한 수이다.
  10. 그러나 폴란드가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영유했다가 제2차 대전에서 소련에게 빼앗긴 리투아니아 빌뉴스 시와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서부 지역 영토들은 폴란드 땅이기전에 제1차 대전 후 발발한 소련-폴란드 전쟁 이전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리투아니아등 옛 소련권 국가들이 차지하고 있던 지역이었다. 물론 폴란드가 폴란드 분할로 주권을 잃기 전 주권국이었을 당시 폴란드의 지배와 영향권 아래에 있었던 동네였었고 제1차 대전 후 폴란드에서 이들 지역이 폴란드인들이 다수에 과거 폴란드 땅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합병하기도 했었지만 그런 식의 논리대로라면 연해주도 청왕조때 지배했었으니 중국 영토고, 만주와 요동 지역도 고구려, 발해 왕조때 차지했으니 한국 영토고, 이탈리아 남부 지역, 터키 소아시아 반도와 이스탄불도 원래는 고대 그리스,비잔티움 제국 시기때 원래부터 그리스인 영역권이었으니 그리스 영토라는 소리..
  11. 이중에 우디르급 태세전환을 보인 친나치파들도 있었다. 영화 피아니스트의 주인공 스필만이 아우슈비츠에 끌려가기 직전에 끌어내 준 유태인 경찰이 실제 전후에도 소련 완장을 차고 활동했다고 한다.
  12. 그리고 당시 화북지대원들도 "후방에서 선전전만 하지 말고 만주로 가서 싸우자"는 생각으로 간거라서 과연 돌아왔을지도 의문이다.
  13. 북한의 선전상으로는 8만이지만, 이건 과장이다. 5개 지대로 구성되었는데 각 지대가 1600명을 기본으로 편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4. 계급이 18개로 나뉘니, 2^17해서 13만 1천명이 필요하다. 물론, 따지자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할 수 있다. 현재 국군 군사 계급 수도 21개이고, 이에 따라 2명씩 배치하려면 105만명이 필요하다. 상비군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수치.
  15. 정확히는 중국 정부가 면허생산한 중정식 소총.
  16. 한국군 초기 고위장교단의 형성에서 광복군의 비중이 극도로 낮은 것은 이 이유때문이다.
  17. 국사편찬위에서 낸 건군기 장성들의 회고 책자에 따르면 광복 당시에 군경력자를 보면 일본이나 만주에서 군생활을 경험한 사람은 약 40만, 중국 등에서 경험한 사람은 3만5천 수준이었다고 한다.
  18. 다만 초대 국방차관이자, 2대 공군참모총장인 최용덕 장군이 광복군 참모처장 출신이고, 6대 공군참모총장인 김신 장군은 임시정부 주석인 김구의 아들이었다.
  19. 대부분은 배알못들이라 대한민국 해병대로 쫓겨났다.
  20. 다만 초대 해군참모총장인 손원일 제독은 본인도 독립운동가이고,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 및 교통부 총장을 역임한 손정도 목사의 아들이긴 했다.
  21. 항목을 가서 보면 알겠지만, 정말 시대 잘못 타고 나신 분이다.
  22. 미국 육군사관학교 기록에는 없다. 캘리포니아의 민간군사학교를 다녔다는 말도 있다.
  23. 참고로 이 양반, 타국에 대해 저지른 전쟁범죄는 전무하다! A급 전범으로 기소되었음에도 거의 유일하게 전혀 처벌을 받지 않고 잘 나왔다(...) 괜히 독립군 칭호가 붙은 건 아닌 셈 자국 군인을 간접적으로 학살해서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