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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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嬉老(金嬉老) 1928년 11월 20일 ~ 2010년 3월 26일

재일 조선인. 아버지 권명술(權命述)과 어머니 박득숙(朴得淑) 사이에서 출생했다. 3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가 넝마주이를 하며 생계를 꾸렸다. 1933년 어머니가 재혼하면서부터 의붓아버지의 성을 따 김희로라고 불렸다. 현재는 친아버지의 성을 따서 권희로라는 이름을 쓰지만 김희로로 널리 알려져 있다.

재일조선인으로 일본에 살았는데 극빈층으로 빈곤하게 생활했다. 소학교 때부터 민족에 관계돼 차별당하면서 조선인은 다닐 곳이 못된다고 학교를 그만두었다.

의붓아버지의 구박으로 13살에 가출하여 배가 고파 음식을 훔쳐먹었고, 수차례 감옥에 들어갔다 나오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혼인과 사업에 실패하고 마흔 살이던 1968년 2월 20일 채권자에게 청부받아 빚을 독촉하던 야쿠자 2명이 "조센징, 더러운 돼지새끼"라고 한 말에 격분해 라이플로 이 작자들을 사살했는데 이 작자들은 실제로는 야쿠자도 아니고 야쿠자들의 꼬붕이었고, 킬빌에 잠깐 나오는 엄마 젖이나 먹고와야 할 고딩 수준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라이플을 가지고 있다는 거 자체가 당초 살해할 의도가 있었단 거다.

이후 다이너마이트 이건 또 어디서 났대?;; 와 라이플, 실탄을 갖고 도주, 가와네(川根) 온천장[1]에 있는 여관 후지미야에서 투숙객들을 인질로 잡고 경찰관들과 대치하다 4일(88시간) 만인 24일 검거당했다. 인질극 와중에 개를 사살하기도 했다.

이 인질극은 당시 TV를 이용해 생생하게 중계되었고 권희로는 "경찰관의 한국인 차별을 고발하고자 사건을 일으켰다"라고 주장하면서 TV를 이용해 경찰관들에게 사과를 받아 내 파문을 일으켰다. 체포당한 후 8년간 벌인 재판 끝에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구마모토 형무소에 수감당했다.

누가 권희로에게 다이너마이트와 라이플을 주었는지는 지금도 미궁에 빠져있는데 경찰청 측에서도 함구했다. 참고로 이때 사용한 무기는 호와 M300으로서 같은 탄약을 쓰는 M1 카빈의 30발들이 탄창과 조준경이 부착된 라이플. 이 사건 이후 일본의 총도법이 더 엄격하게 개정됐다.

권희로가 가석방되게끔 하고자 1980년대 후반부터 승려 박삼중과 재일동포 사업가 조만길 등이 '재일 한국인 김희로 씨 석방 후원회'를 만들어 노력해 왔다. 1981년에는 돈(頓)모(52) 여인과 옥중 결혼식을 가졌다.

권희로의 이야기는 1970년 단행본 『분노는 폭포처럼』으로 국내에 소개되기도 했고 기자 출신 작가인 혼다 야스히루(本田靖春)의 <私戰>(시센)으로 나왔었다. 1990년대 초에는 이 <私戰>(시센)을 원작으로 김영빈 감독·유인촌 주연 영화 <김의 전쟁>이 제작되기도 했다. [2]

그 결과 1999년 9월 7일, 31년 만에 석방돼 7년 이상 복역한 외국인 장기수는 법으로 국외 추방토록 규정된 일본 법규에 따라 승려 박삼중과 한국으로 왔고 친아버지의 성을 따라 권희로라는 이름으로 대한민국 귀화했다.

귀국 후에는 중앙일보의 후원받게 된다. 권희로의 후견인이었던 승려 박삼중과 오래 인연한 통일문화연구소 차장 김준범의 힘을 빌려 독점 계약을 성사한다. 1999년 9월 10일, 권희로가 중앙일보를 방문해 당시 사장 홍석현을 만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한국일보에서 사설로 지나친 대접을 질타하자 많은 네티즌[3]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다.

물론 중앙일보의 대접은 극진했다. 평생 구독권을 선물했고 호암갤러리에 모시고 갔으며, 삼성서울병원에서 2박 3일간 정밀 건강 진단받게 조처했다. 그 후 모두 19회에 걸쳐 중앙일보에는 수기 <어머니, 미움을 넘어섰어요>가 연재된다. 연재가 끝난 후 중앙일보는 중앙M&B를 이용해 수기를 단행본으로 엮어 출판한다. 확실히 단물을 빼먹은 셈인데 권희로가 지은 죄를 생각하면...

월간조선 2001년 1월호를 보면 귀국 후 이전에 옥중 혼인한 여자 돈 모씨와 2000년 2월부터 4월까지 부부로 함께 살았으나 2달 후 돈 모씨는 권희로의 폭언과 폭행을 견디지 못했다면서 권희로의 돈을 가지고 달아났으며 인터뷰에서 자신이 권희로의 돈을 가지고 달아난 것은 "정신상 피해 보상"이라고 주장했다. 참고로 여자 돈 모씨는 1979년 출옥한 후, 권희로에게 온 후원금을 위시해 3억 원을 빼돌린 적이 있었지만, 권희로는 귀국 후에도 그 여자를 포용했다. 그 후 2001년 9월에 체포됐다. 그 여자는 1993년에도 돈을 갖고 튄 적이 있었고 기실 여자 돈 모씨는 내연 관계에 있던 일본인의 본처를 살해한 죄로 수감돼 권희로와 옥중 인연이 됐고 두 번이나 권희로의 돈을 가지고 튀었다. 한 번은 포용했지만...

그 후 권희로는 여자 박 모씨와 내연으로 관계했다. 2000년, 71세의 권희로는 내연의 관계에 있던 여자 41세 박 모씨의 남편을 살해하려 한 혐의로 체포됐다.유혈주의

공주치료감호소[4]장 51세 최상섭(崔相燮)은 권희로가 체포당했을 당시 검찰청에 의뢰받아 권희로가 비정상 가정 환경과 오랜 수형 생활 탓에 인격에 장애가 있게 됐다고 진단했다. 그 후에는 치료감호[5]받았다고... 중앙일보에서는 나중에 후원을 철회했고 권희로를 후원한 승려 박삼중은 재일동포 사회에서 평소 평판이 좋지 않았던 권희로가 죄를 자꾸 저지르자 후회스럽다고 말하면서 지지를 철회했다. 승려 박삼중은 직업상 권희로보다 악질 범죄자들도 만나 본 승려 박삼중이 이럴 정도면 말 다한 건데 그 중에는 김태촌도 있다. 김태촌도 노답이지만... 2006년에는 인질로 잡혔던 일본인과 만나기도 했다.

대한민국으로 귀화하고서는 부산에서 살았으며, 취미는 장 보기와 총기 사격이었다.

2010년 3월 26일 오전 6시 50분께 전립선암으로 투병 중이던 부산광역시 동래구에 소재한 봉생병원에서 죽었다. 향년 82세.

일부 일본인들은 권희로를 영웅시했는데 사채업자를 싫어하는 일본인들의 특성(?)상[6] 그럴 수도 있다.그런데 사채업자 이미지가 좋은 나라가 있나? 전반에 걸친 인식이 좋지 않은 편이다. 혐한들에게는 킨키로우[7]라 불리면서 까인다. 일본에서는 한국인은 죄를 저질러도 애국인 양 미화한다.는 인식이 퍼지게 됐는데 실은 그냥 범죄자 맞다. 차별에 항거해 일어섰다고 생각하진 말자.

대한민국에서 제작된 영화 <김의 전쟁>에서는 유인촌이 권희로 역할을 연기한 적이 있었다. 일본 후지 TV에서도 대한민국보다 1년 전에 같은 제목으로 드라마를 제작했는데 거기서는 기타노 다케시가 연기했었다.

  1. 온천에서 목욕할 수 있게 설비가 된 장소 혹은 온천이 있는 곳.
  2. 정확하게는 일본에서 먼저 극화물이 나왔다.
  3. 인터넷이 이렇게 엄청나게 보급된 건 2000년대 초반
  4. 치료감호법에 의거해 죄를 저지른 심신장애자(정신장애자)나 마약· 알코올 중독자를 수용해 치료하는 시설.
  5. 치료감호법을 좇아 죄를 지은 정신장애자나 알코올ㆍ마약 중독자를 실형 복역에 앞서 치료감호소에 수용하여 치료를 실시하게 하는 보호 처분.
  6. 사채꾼 우시지마를 참고
  7. 일본식 발음, 카타카나로 キンキロー로 표기하는 때가 잦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