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노 다케시

게닌 BIG 3
타모리아카시야 산마비트 타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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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명ビートたけし비트 타케시[1]
본명北野 武기타노 타케시
생년월일1947년 1월 18일
출생일본 도쿄도 아다치 구
신체168cm, O형
직업게닌,사회자,배우,영화감독
소속사오피스 기타노 [2]
데뷔년도1972년
혼인여부기혼[3]
동기쇼후쿠테이 츠루베
별명세계의 기타노, 타케쨩

1 개요

자기만의 색깔을 잃지 않는 영화를 꾸준히 만들어온 명감독
아카시야 산마, 타모리와 함께 일본 게닌 BIG 3로 일컫어지는 인물

2 유년 시절

1947년 도쿄도에서 4남매중 막내로 태어나 페인트 가게를 운영하는 아버지[4] 밑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에 살던 동네가 야쿠자가 눈 앞에서 죽는 모습도 목격할 정도로 심히 막장이었는데 이 때의 경험이 오히려 영화를 만들 때 도움이 됐다고 한다.[5] 어린 시절부터 수학에 조예가 깊고 스포츠 면에서도 꽤나 우수했던 다케시는 어머니의 추천으로 메이지 대학 기계공학과에 입학했지만 전공투[6]에 연루되어 대학에서 재적당하게 된다.

3 연예계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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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에서 재적당한 후, 생활고 때문에 백화점 직원으로 일한 것을 시작으로 다방보이, 클럽보이같은 밑바닥 막장일을 비롯해서 별의별 3D일을 하던 다케시는 같이 스트립쇼 극장 ‘프랑스좌’의 엘리베이터 보이로 일하던 동료인 비트 기요시의 제안으로 1972년, "투비트"라는 이름의 만담 콤비를 결성하여 게닌(개그맨)으로 데뷔한다. 투비트는 술집, 카바레 등을 전전하다가 1975년 오오타 프로덕션과 계약에 성공하고 본격적으로 TV에 출연하기 시작한다. 투비트는 1979년 요시모토 흥업 소속의 젊은 게닌들과 함께 <The Manzai>[7]에 츨연하기 시작하면서 인지도를 높이기 시작하였다.

4 단독 활동과 전성기

1981년, <The Manzai>가 종영된 이후 비트 기요시가 개그는 이제 그만두고 싶다고 하여 투비트로서의 활동은 거의 없어지고[8] 비트 다케시는 <비트 타케시의 올 나잇 일본(ビートたけしのオールナイトニッポン)>이라는 라디오 방송과 <우리들은 익살족 (オレたちひょうきん族)>이라는 콩트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단독 활동을 시작한다. <비트 타케시의 올 나잇 일본>은 비트 타케시가 처음으로 투비트로서가 아닌 단독으로 진행한 프로그램으로 라디오 프로그램 명의로 야외 공개방송을 개최하여 이를 라디오로 생중계, 시청자들이 보내준 사연들 중 가장 비현실적이거나 황당한 사연을 뽑아서 상을 주는 것, 초대된 연예인 게스트에게 시사 문제에서부터 연예계 루머의 진실 여부, 성적 취향에 대한 얘기 등 사전 인터뷰나 대본에서는 존재하지 않던 사항들을 갑자기 질문하여 당황한 게스트가 자신의 실제 의견을 말하게하는 등 혁신적인 기획들을 시도, 일본의 시청자들은 물론 연예계 종사자들에게도 큰 인기와 관심을 끌어서 '전설의 올 나잇 일본'으로 불린다. <비트 타케시의 올 나잇 일본>은 비트 타케시가 만자이붐 시절부터 프라이데이 습격사건 후 영화 감독으로 데뷔하기 전까지 유일하게 중도 하차하지 않고 꾸준히 진행한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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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익살족(효킨족)>은 '만담을 주로 하는 2세대 게닌(개그맨)들이 소속사에 얽매이지 않고 연합해서 출연하는 콩트 코미디 프로그램'이라는 컨셉으로 1981년부터 1989년까지 토요일 저녁 8시에 방영되었으며 비트 타케시와 아카시야 산마의 코미디 드라마 <타케짱 맨>, 당시 TBS에서 인기리에 방영 중이던 음악 프로그램 <더 베스트 텐>의 포멧을 패러디한 <시마다 신스케의 웃긴 베스트 탠>, 개그맨들이 프로레슬링에 도전하는[9] <웃긴 프로레슬링 시간>, 프로그램 말미에 NG 장면을 보여주고 NG를 낸 개그맨에게 물벼락 벌칙을 주는 모습을 방영하는 <웃긴 참회실> 등 참신한 코너들을 선보이며 당시까지만 해도 일본에서 제일 잘 나가던 코미디언인 더 드리프터즈의 대표방송 <8시다! 전원집합>을 시청률로 이기는데 성공한다. 다만, 프라이데이 습격 사건의 여파와 <카토쨩 켄쨩의 기분 좋은 TV (1986 ~ 1992)>에서 최초로 선보인 시청자 홈비디오 코너가 인기를 끌면서 드리프터즈가 다시 시청률 1위를 탈환하였다. 더 드리프터즈와 효킨족 게닌들의 시청률 경쟁은 '토요일 저녁의 전쟁'이라는 명칭으로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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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부터 1996년까지 방송된 니혼 TV <천재! 타케시의 기운이 솟는 TV>의 한 장면.

<비트 타케시의 올 나잇 일본>과 <우리들은 익살족>에 출연하여 스타덤에 오른 비트 다케시는 이러한 인기를 발판으로 당시 막 부흥하기 시작하던 버라이어티 방송에도 적극적으로 출연하기 시작한다. 그는 버라이어티 방송에 레귤러로 출연할때면 같이 출현한 연예인들에게 갑자기 비속어를 구사하거나 뒤통수를 때려서 당황하게 하거나 화를 내게했고 진행자로 출연하는 방송에서는 중간 광고가 끝나고 방송이 재게되었는데도 아무 말도 안하고 가만히 있다가 출연진이나 스탭들이 어리둥절 하는 타이밍에 갑자기 멘트를 치거나, 코너 진행 도중에 갑자기 썡뚱맞게 탭댄스[10]를 추는 등 파격적인 코미디 스타일을 선보이면서 국민 코미디언의 위치에 오른다. 이 당시의 유행어 코마네치는 지금도 간간히 쓰이는 일본에선 전설 아닌 레전드급 유행어. 이러한 비트 다케시의 인기는 실로 대단하여 8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골든 타임 시간대(저녁 7시 ~ 10시) 예능 프로그램 대다수에 비트 다케시가 출연할 정도였다. 참고로 비트 다케시가 진행한 칸무리 방송[11]에서 처음 소개되어 대중적으로 유명해진 요소는 몰래카메라, 쉬메일, 비쥬얼계. 이러한 인기를 바탕으로 비트 다케시는 1983년,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작품 <전장의 메리크리스마스>에서 악랄한 군인 하라 겐조 역을 맡으며 영화 배우로 데뷔하였고 비트 다케시가 직접 참여한 비트 타케시의 도전장이라는 게임이 발매되기도 하였다.

다만 이 시기 비트 다케시는 옴진리교의 신자였으며 심지어 교주 아사하라 쇼코와 사적으로 친한 관계였다.1991년에는 비트 타케시의 소개로 아사하라 쇼코가 방송에 출연하기까지 헸다. 옴진리교가 각종 사건을 일으키자 비트 다케시는 자신은 옴진리교의 출가 신도[12]는 아니었고 옴진리교의 교주 아사하라 쇼코가 운영하는 요가 교습소에서 자신의 신경통[13]을 치료받은데다가 당시에는 옴진리교가 그렇게 위험한 종교였는지도 몰랐고 옴진리교가 전파를 타게 도와달라는 아사하라 쇼코의 간곡한 부탁에 넘어갔기에 따지고보면 자신도 옴진리교의 피해자 중 한사람이다.'라는 식으로 빠져나갔다.

5 프라이데이 습격사건

그렇게 잘나가던 비트 다케시는 1986년 12월 9일 벌어진 프라이데이 습격사건으로 큰 위기를 겪는다. 사건의 발단은 비트 다케시와 트러블을 일으키고 있던 소속사 오오타 프로덕션이 자사가 보유한 출판사에서 발행하는 잡지에 '유부남인 비트 다케시가 21세의 전문학교 여성과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것 같다.'라는 기사를 실은 것으로 시직된다. 이에 황색언론으로 유명한 잡지 프라이데이는 그의 처가를 스토킹하거나 불륜녀로 제보된 여성을 폭행하는 등 막무가내로 취재를 벌였고 진짜로 비트 다케시 소유의 별장에서 그와 전문학교 여성이 같이 있는 장면을 포착하는데 성공한다. 이에 단단히 화가 난 비트 다케시는 다케시 군단이라 불리우는 후배 게닌들 10명과 함께 1986년 12월 9일 오후 3시, 잡지사를 무단 점거해 소화기를 사용하여 기물을 파손하고 편집부원과 편집장을 폭행한다.# 사건 발생 직후 기자회견.

이후 비트 다케시는 기물파손과 주거침입을 이유로 경찰에 체포되어 1987년 6월 10일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의 판결을 받는다.판결 후 기자회견. 재판 이후 비트 다케시는 1987년 8월부터 방송에 컴백할 수 있었다. 이는 비트 타케시의 인기가 높기도 했거니와 프라이데이 자체가 워낙 악명 높은 주간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고토다 마사하루 당시 관방장관 역시 '비트 군의 마음은 잘 이해하지만, 직접 행동은 안 된다.'라고 발언했는데 여기에 대해서 비트 타케시는 '비트 군이 아니라 타케시 군이지'라고 했다고(…). 이 사건의 여파로 주간지의 보도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졌다. 공교롭게도 프라이데이의 발행사인 코단샤의 사장이 이 시기 갑자기 사망했는데 이 사건의 충격이라는 추측도 있었다.

6 영화 활동

1988년, 프라이데이 습격사건의 여파가 어느 정도 가라앉자 비트 다케시는 당시 자신의 소속사였던 오오타 프로덕션에서 나와서 오피스 기타노를 설립하고 다케시 군단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따르는 후배 게닌들을 공식적으로 모집하기 시작한다.[14] 또한 프라이데이 습격사건으로 방송계에서 입지가 약해질대로 약해진 상태였던 다케시는 이를 타개하게 위해 후카사쿠 킨지 감독의 추천으로 1989년그 남자 흉폭하다》를 감독하면서 영화계로 진출하게 된다.[15] 하지만 비트 다케시의 감독 데뷔는 쉽지 않았다. 코미디언으로 활발히 활동하던 시기에는 "골때리게 웃기는 천재 코미디언"이라는 찬사를 받았지만 위의 사건이 발생한 직후, 갑자기 영화 감독으로 데뷔한다는 소식을 발표하자 몇 년 동안 대중들의 분노어린 평가와 숱한 조롱을 받은 것. 비트 다케시는 SBS와의 인터뷰에서 대중들에게 각인된 이러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없애기까지 수년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고 말했다.

이후 비트 다케시는 《3-4×10월(月) (1990)》,《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あの夏、いちばん静かな海。(1991)) 등을 감독하면서 재기에 성공하고 《소나티네 (1993)》는 칸 영화제에 출품되어 유럽 등 해외에서까지 인정받으며 제 2의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하지만 1994년 8월 2일, 비트 다케시는 술에 만취한채로 불륜녀집에서 나오다가 오토바이 교통사고를 일으켜서 또 다시 크나큰 위기를 겪는다. 당시 비트 다케시의 상태는 살아있다는게 기적일 정도로 처참했다. 도로 가로등 한가운데 피투성이로 쓰러진 그를 맞은편 차선에 달려오던 택시기사가 발견했는데 만약 그대로 방치되었다면 뒷차에 깔려 죽었을거라는 씁쓸한 농담도 했다. 당시 사고로 함몰된 그의 얼굴뼈 전체를 복구하기 위해 긴급 프로젝트와 의료진이 투입되었고 다행히 수술은 잘 끝났지만 사스가 일본 후유증으로 그는 얼굴 일부가 마비되어 표정을 제대로 짓지 못하게 된 것을 물론, 후각 신경이 마비되고 안구의 초점이 흐려졌으며 극심한 두통에까지 시달린다고 한다. 또 불륜을 저지른 것도 모자라서 음주운전까지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회적으로도 큰 지탄을 받았다. 아내와도 이혼 직전까지 갔다고 한다. [16] 참고로 퇴원 직후 일그러진 얼굴로 토크쇼를 하듯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 1995년 비트 타케시는 명절 특집으로 방영된 <비트 다케시의 오와라이 울트라퀴즈>를 시작으로 다시 코미디언으로 복귀하여 TV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기 시작했고, 1996년 발표한 《키즈 리턴》으로 감독으로도 재기하게 된다.

1997년, 《하나비》로 베니스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하였다. 참고로 하나비는 일본 문화가 개방된 한국에서 공식적으로 개봉한 첫 번째 일본 영화였다.[17] 하나비 개봉 후 한 인터뷰에서 '가족이란 남들이 보지 않을 때 내다버리고 싶은 존재'라는 충공깽스러운 발언을 했던 것이 은근히 유명하다. 1999년에는 《기쿠지로의 여름(菊次郎の夏)》으로 칸영화제 본선에 진출하였다. 장님 검객을 주연으로 한 《자토이치》 또한 해외에서 호평을 받으며 일본의 거장 감독으로 완전히 자리잡게 된다.

화가로도 실력이 출중하다고 하며, 개인전도 몇 번 열었다고 한다. 2008년 영화 아킬레스와 거북이[18]는 화가로써 자신을 다루고 있다고 한다. 영화를 만들때 일단 기-승-전-결의 4개의 그림을 그린 후[19] 그 그림들을 바탕으로 영화 내용을 만든다고 한다.

2010년에는 오랜만에 야쿠자 영화 아웃레이지를 감독했다. 이 영화는 부산 국제영화제에도 소개되었다.

2011년 시마다 신스케야쿠자간의 커넥션이 폭로되어 연예계 은퇴성명을 발표하자, 비트 다케시가 자신도 프라이데이 사건이 발생했을때, 야쿠자를 찾아가서 사건을 해결해 달라고 부탁하며 무릎을 꿇은 적이 있다고 고백하면서 연예인과 야쿠자의 커넥션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발언하여 논란이 일었다. 다만, 시마다 신스케와는 우리들은 익살족 종영 이후부터는 사적으로 연락을 할만큼 친하지 않았다고 한다.[20][21]

정치적으로 극우 성향을 가지고 있다. 일본 황실을 존경한다며 공개적으로 덴노 지지를 선언했고 예전부터 꾸준히 반미 성향을 어필하고 있다. 극우 정치인 이시하라 신타로의 정치 활동에 참석하고, 공저로 《위험한 일본학》이라는 책을 내어 한국과 중국을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이나 센카쿠 열도 같은 문제들을 제기하며 일본으로부터 돈을 받아낼 목적으로 뻔뻔하게 시비를 거는 나라"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대학 시절에 전공투였던 이 사람이 왜 극우가 되나 싶기도 하지만 사실 전공투와 일본 극우는 반미 성향이 강하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전공투에서 극우로 옮긴 경우도 굉장히 많고 전공투가 악명을 떨치던 시절에도 덴노 체제에 대한 의견 차이만 빼면 극우들과는 교류가 의외로 많았다. 단, 집단적 자위권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극우들과는 달리 "일미안보(日米安保) 문제를 전부 해결하기에 현재의 헌법이 빈약하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지만, 해당 법안은 평화로운 일본을 만들어나가고 있다는 것을 전세계에 보여주는 중요한 상징이다."라는 발언을 하였다.

2015년 나홍진 감독의 영화 곡성에 외지인 역으로 출연해달라는 제의를 받았지만 거절했다고 한다. 당시 나홍진 감독에게 "안 됩니다, 나에게는 해야 할 또 다른 일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대신 일본의 중견배우 쿠니무라 준이 캐스팅되었다. [22]

6.1 감독 작품

굵은 글씨는 주연까지 맡은 작품.

6.2 다케시 영화의 특성

영화 감독으로서 그의 작풍은, 어떤 사조도 따르지 않는 독특한 연출 기법로 이뤄져 있으며, 강렬한 폭력과 무뚝뚝한 유머의 결합이 돋보인다. 같은 일본 감독으로는 오즈 야스지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유머와 진지함을 동시에 가진 일본의 몇 안되는 감독 중 하나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가차없는 딴지와 독설을 날리는 코미디언으로도 일본 내에서도 열심히 활약 중. 자토이치가 흥행한 이후로는 코미디언으로 방송에 출연할 때는 머리를 노랗게 염색하고 출연한다.[24] 배우로서도 비트라는 예명을 사용하기 때문에 타케시가 연출과 주연을 겸한 작품에서는 이름이 두 가지로 나온다.(감독으로서는 물론 기타노 다케시 명의) 2004년작인 다케시즈는 이런 코메디언인 비트 다케시와 감독인 기타노 다케시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영화가 난해하고 그의 다양한 모습을 전부 자세히 알고 있지 않으면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다. 감독 만세는 감독으로서 자기 자신을 성찰한 영화. 좀 더 코미디에 가깝다.

타케시 영화의 교집합적 특징이라면, 1) 롱테이크 2) 폭력성 3) 희극성 4) 심리적 상징성 5) 히사이시 조 6) 자기반영 7) 비슷한 배우 등이다.

롱테이크 장면이 많다. 대사없이, 카메라 시점 변화 없이 하나의 테이크를 그대로 쭈욱 보여주는 것이다. 때때로는 몇분 이상 가기도 한다. 처음 보면 감정적으로 매우 메말라 있고 관조적으로 바라보는 것 같지만, 단순한 관조와 다른 그 시선을 느끼는게 타케시 영화의 매력.

폭력성이 상당하다. 고어적 연출같은 것은 전혀 없지만 맥락없이 갑자기 등장하는 공격적 연출로 인해 매우 폭력적으로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특히 야쿠자 소재의 영화들일 경우 대부분 폭력성을 전반에 깔고 있으며 여과없는 강렬한 공격성 자체가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폭력성과 대비되는 코미디, 개그, 웃음이 많다. 코미디 소재의 영화가 아니라 야쿠자 영화들에서 특히 더 그렇다. 정말 심각한 분위기에서 냉혈한 야쿠자들의 격렬한 폭력성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키면서 동시에 동일인물들의 아이같은, 유치한 행동들을 통해 실소를 유발시키는데. 이러한 아이러니가 그의 영화의 매력 중 하나.

인물들의 심리를 반영하는 상징적인 단서나 아이템들을 영화 내에서 반복해서 늘어놓기도 하며, 주요 소재들은 영화를 뛰어넘어서 반복해서 사용되기도 한다. 자주 사용되는 것이 그가 직접그린 그림.

그의 영화들의 배경음악은 대부분 히사이시 조가 도맡아서 작업하였다.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 소나티네, 하나비, 키즈리턴, 브라더, 돌스, 기쿠지로의 여름까지 총 7편의 영화에서 호흡을 맞췄다.

자기투영적인 모습이 많다. 코미디언, 야쿠자(캐릭터), 감독, 배우 등 정체성이 여러가지인데다 연기하는 캐릭터의 성격이 어느 영화나 대부분 비슷. 심지어는 자신이 감독이 아니고 출연만 한 영화에서도 캐릭터는 비슷하다. 실제 성격까지는 몰라도 비트 다케시의 모습은 대체로 비슷하고 어느 정도 일관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낯선 모습까지 전부 통합하기 위함인지 언젠가부터는 영화를 통해서 자기성찰을 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다케시즈, 감독 만세, 아킬레스와 거북이가 이에 해당.

마치 주성치 영화에 그의 사단이 있는 것처럼, 기타노 영화 속에서도 항상 비슷한 얼굴들이 출연한다. 원래 다케시 군단이라 불리우는 코미디언 후배집단을 거느리고 있어서 이들이 영화에 자주 나오는데다 정극 배우 중에서도 자신의 영화에 자주 기용하는 배우들이 있으니 대표적인 것이 테라지마 스스무와 오오스기 렌. 사실 이들은 워낙 다작을 하는 배우이다보니 다케시 영화에도 나오는 것일 뿐이다. 그래도 테라지마 스스무는 기타노 오피스(기타노 다케시의 소속사) 소속이라그런지 다케시 영화 대부분에 나왔다.

촬영장이 하드하기로 유명하다. 카세 료가 밝히길 리허설 한 번, 슛 한 번에 촬영이 완료되며 이 때 실수하면 해당 장면이 그대로 날아가버린다고...

6.3 한국계 발언 소동

일본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기자 : 다케시는 재일(한국인)이라는 소리를 자주 듣는데 사실인가요?

다케시 : 응. 어머니 쪽 집안이…

라고 발언한 것을 계기로 한때 한국계라는 소리가 돌았다.

하지만 이후 다케시의 어머니가 다른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그 바보는 착각하고 있어요"라며 자신은 순수한 일본인이 있다고 가정한다면이라고 주장. 어머니의 전 남편의 어머니가 한국계였던걸 외할머니가 한국계였던 걸로 착각한 것으로, 기타노 다케시는 두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인지라 한국 쪽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한다. 기타노 다케시도 이후에 "그건 착각이었습니다. 어머니한테 굉장히 혼났어요"라며 정정.

7 어록

나는 칼싸움 장면에서 칼끼리 부딪히는 걸 싫어한다. 그럴 시간이 어디있나? 단숨에 베어야지.
기자 : 아웃레이지 같은 폭력적인 영화가 세상에 끼칠 영향은 생각해봤는가?

기타노 : 생각해봤다. 그런데 아웃레이지 같은 경우는 대중적인 영화가 결코 아니다. 대중적인 영화라면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함께 웃고 울고 감동을 받을 수 있는 영화가 대중적인 영화다. 그런데 그런 대중적인 영화가 일년 내에 몇십편씩 나와도 세상에는 아직도 전쟁과 테러와 범죄가 존재한다. 그런 상황에서 꼴랑 어쩌다 한번 나오는 비대중적인 나의 폭력영화가 세상에 무슨 대단한 영향을 끼치겠는가.
(아웃 레이지 개봉 후 각국의 영화제에서의 인터뷰 중)[25]

"어렸을 때는 모델이 되고 싶었어요."

"무슨 모델이요?"
"프라모델."

키노 : 당신은 일본에서 성공했다

기타노 : 성공이 뭐냐. 애인은 도망갔고 마누라는 차갑다. 난 성공한 사람이 아니다.
(키노 인터뷰 중)

가족은 누가 보지 않으면 내다 버리고 싶은 존재다.

8 훈훈한 에피소드

다케시 군단에 속한 후배 게닌들, 또는 자신과 친분이 있는 연예인들에게는 대단히 통 큰 선행을 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런 타케시의 훈훈한 에피소드가 관련 방송에서 자주 나오곤 한다. 그 중 유명한 이야기들 몇가지.

타케시 군단 소속의 한 게닌이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래, 결혼 선물로 뭘 갖고 싶냐?"라는 물음에 "세탁기요"라고 대답을 했는데... 며칠 후 타케시로부터 온 소포를 뜯어보니 나온것은 빨래판이었다.

"어휴, 어르신(사극 등에서 자신의 주군을 뜻하는 도노(殿). 타케시 군단 멤버들에겐 이렇게 불린다)이 또 장난 치시는구만"이라며 쓴웃음을 지으며 별 생각 없이 빨래판을 뒤접어 봤더니, 100만엔 짜리 수표가 테이프로 붙여져 있었다고 한다.

자신의 칸무리 방송에서 여성 진행자로서 오랫동안 함께 한 아나운서의 부친이 사망을 했다. 1주일 후 갑자기 그 아나운서를 불러낸 타케시는 갑자기 드라이브를 제안하는데, 드라이브 하면서 가는 길마다 타케시 군단의 멤버들이 코스프레한 채로 맞이했다(주유소에 들렀더니 과달카난 타카가 "어서옵쇼~"라며 뛰어나온다거나, 휴게소에 들렀더니 소노만마 히가시가 과자를 팔고 있다거나 하는 식으로).

다 늙은 아저씨들이 알바생 차림으로 땀 뻘뻘 흘리는 걸 보고, 아나운서는 오랜만에 크게 웃었는데 이때 타케시가 한 말이
"나야 웃기는 게 직업인 사람이라, 이런 식으로 밖에 위로할 방법을 모르겠네. 그래도 간만에 웃는 얼굴 봐서 좋은걸"

연락도 없이 거의 30년 가까이 차이나는 후배 게닌의 공연을 보러 온 비트 타케시와 비트 키요시. 당연히 후배들은 놀라서 어버버 거리는데 당당하게 무대로 나가더니... 파트너인 비트 키요시와 함께 마에세츠(본 무대 시작전에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농담이나 개그를 하는 것. 보통은 본 무대 뛰는 게닌의 후배나 별로 유명하지 않은 게닌들이 맡는 경우가 많다)를 해 버렸다. 수년만의 투비츠로서의 등장에 관객들은 난리가 났고, 퇴장 후에 본무대를 뛰어야 하는 후배들은 그저 대감격. 근데 다른 의미로는 이거 엄청난 공연 방해 이후 공연의 분위기가 너무 좋은것에 감명받은 투비츠는 후배 게닌은 물론 공연 스탭(staff)과 관객들까지 다 끌고가서 식당에서 한턱 크게 냈다

모노마네 게닌인 마츠무라 쿠니히로(松村邦洋)의 특기가 바로 비트 타케시의 성대모사. 다른 모노마네 게닌들도 "맛쨩(마츠무라 쿠니히로의 애칭)이 타케시씨를 시작하면 다른 모노마네 게닌들은 할 일이 없어진다"라고 할 정도로 완성도가 높은데, 어쩌다보니 비트 타케시 본인을 딱 만나 버렸다[26]. "너 임마 마츠무라!"라고 타케시가 버럭 화를 내길래 "어이쿠, 허락없이 성대모사 했다고 혼내시려나 보구나"라며 긴장을 했는데 다음에 하는 말이
"좌우가 반대잖아!"

오토바이 사고로 일그러진 얼굴과 반대쪽 얼굴을 일그린 채로 모노마네를 했다고 할려면 제대로 하라고 혼낸 거였다나. 두 사람이 동시에 출연한 코너.눈 감고 들어보자
.
영화감독으로서의 타케시를 동경하여 제자가 되기 위해 찾아왔다가 2~3년이 지나면 돌아가는 외국인이 꽤 있는 편이라고 한다. 그리고 타케시는 이렇게 귀국하는 외국인 제자들에게 일일이 롤렉스 시계를 선물한다고 하는데, 타케시 군단 멤버인 스이도바시 하카세는 "이게 소문나서, 타케시에게 가면 부자가 되서 돌아온다는 이상한 소문이 외국에 퍼졌다"라는 농담을 하기도 했는데, 지금도 꾸준히 제자 되겠다고 찾아오는 외국인이 있는 거 보면, 완전히 농담만은 아닌 듯도 하다.

  1. 코미디언 활동은 비트 다케시 명의로 나오고, 영화감독 활동은 "기타노 다케시" 명의로 나온다. 그래서 '비트 다케시'로도 이 항목으로 들어올 수 있다.
  2. 기타노 다케시를 중심으로 만든 연예소속사, 이전 소속사는 오오타 프로덕션 소속이었다.
  3. 1983년에 기타노 미키코라는 사람과 결혼했다. 다만, 부인은 결혼 전인 1981년 다케시와 우리들은 익살족에 같이 출연한 것을 제외하면[1] 외부에 언급이 일절 없다. 결별 직전까지 간 사이라 특별히 언급할것도 다케시의 친딸인 기타노 쇼코는 가수로 연예계에 데뷔하였다.
  4. 감독, 출연한 기쿠지로의 여름의 기쿠지로가 아버지의 이름이라고 한다.
  5. 덕분에 야쿠자 영화를 너무 사실적으로 찍어서 영화로만 그를 접한 서양 쪽 사람들은 아예 그를 야쿠자로 착각하여 일본에 들렸다가 쇼 프로그램에 출연한 그를 보고 큰 충격을 받는일이 비일비재하고 자국에서도 다케시의 영화를 보고 감명을 받은 현역 야쿠자가 나름대로 옥의 티를 지적한답시고 그에게 전화를 걸어서 "바다에 시체를 버릴 때는 배를 가른 뒤에 버려야지"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6. 60년대 일본 학생 운동의 대명사. 당시 전공투는 어느 정파에도 속하지 않고 자유로운 학생운동집단의 집결체로 알려져 인기가 좋았다.
  7. 일본에서 만자이 열풍을 일으킨 코미디 프로그램. 1979년에서 1981년까지 방영되었다. 이들은 콩트를 위주로 하던 기존의 게닌들과 달리 언변을 무기로 사회 풍자적인 요소를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큰 주목을 받았다. The Manzai에 출연하여 인지도를 얻기 시작한 게닌으로는 세상살이에 대해 푸념을 하는 수다쟁이 컨셉의 투비트, 사장에게 항의하는 노동자 컨셉으로 각종 사회 문제들을 풍자하는 '신스케 X 류스케', 당대 사회의 유명인들을 익살스럽게 묘사하는 아카시야 산마 등이 있다.
  8. 다만 해체한것은 아니다. 기요시도 다른 프로그램의 패널이나 영화 등에 꾸준히 출연하고 있다.
  9. 후반부 에피소드에서는 실제로 전문 레슬러들과 경기를 가졌다.
  10. 탭댄스춤을 유독 좋아하는것 같다.이런 감독성향에 걸맞게 자토이치와 같은 다케시 영화에는 본인이나 주연배우들이 탭댄스를 추는 장면도 종종 나온다.
  11.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코미디언의 이름이 제목에 들어가는 방송으로 일본에서는 칸무리 방송의 갯수를 코미디언의 인기를 측정하는 중요한 척도로 본다.
  12. 일본에서 한창 옴진리교가 유행할때, 멀쩡히 학교생활 회사생활 하던 이들이 모든것을 다 내려놓고 옴진리교로 출가하는 문제가 정말 심각했었다.
  13. 비트 타케시는 무명 시절의 폭행 사고로 신경을 다쳐서 몸을 움찔대는 증상이 있었다.
  14. 참고로 비트 다케시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팬이며 상당한 야구광이고 다케시 군단이라는 이름도 친선도모로 야구를 할 줄 아는 후배 게닌들을 모아서 만든 동명의 야구팀에서 유래한 것이다. 지금도 다케시 군단의 멤버들은 1군, 2군, 3군 식으로 나뉘어져있다.
  15. 2001년에는 후카사쿠 킨지 감독의 배틀로얄 1편에 담임 교사로 출연. 꽤나 포스 있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16. http://www.ddanzi.com/news/48420.html
  17. 일본 문화 개방 초기에는 극장에 개봉 가능한 일본 영화는 영화제 수상 경력이 있는 영화로 제한되어 있었다.
  18. 음악은 극장판 공의 경계로 오덕계에서 유명한 카지우라 유키가 맡았다.
  19. 일종의 스토리보드라고 생각하면 될듯.
  20. http://tokyoadvance.blogspot.com/2009/09/blog-post_2672.html
  21. http://www.jpnews.kr/sub_read.html?uid=11454
  22. 재미있게도 쿠니무라 준은 기타노 다케시 영화에 출연한 바 있다.
  23. 영화 끝나기 3분 전까지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24. 일본 대도시를 가면, 대형 광고판에 그가 광고 모델로 출연한 광고가 상당히 많다.
  25. 쇼후쿠테니 츠루베 주관의 토크쇼 A-STUDIO에서 밝히길 유럽의 영화제에서도 이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슬래셔무비나 범죄영화를 안좋은 시각으로 바라보는 건 전 세계가 똑같다. 물론 그것에 논리정연하게 반박한 기타노 본인도 대단하지만. 자기도 저렇게 말해놓고서 "나 말 참 잘했네"라고 스스로 뿌듯해 했다고 한다(...)
  26. 모노마네 게닌들의 경우 대상의 특징을 과장되게 묘사해서 웃기는 타입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모사하는 대상자들은 싫어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특히 대상의 희화화가 심한 중견 이상의 모노마네 게닌들은 멀리서 모사 대상자가 보이면 도망부터 치고 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