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운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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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영표형, 거기서 뭐해요?
羅雲奎
1902년 10월 17일 ~ 1937년 8월 9일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영화배우/영화감독. 호는 춘사(春史).

1 개요

함경북도 회령 출생으로 조선왕조의 군관이었던 나형권의 셋째 아들이다. 학교 졸업 후인 1920년에는 홍범도가 이끌던 독립군에 들어간 적도 있다고 한다. 그후 1924년 일본 자금으로 돌아가던 영화사인 '조선 키네마'에 들어가 배우로 출연하는데, 처음에는 엑스트라 배우나 맡다가 '농중조'에서 비중있는 역할로 등장해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

2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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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적인 특징으로는 사진에서 보면 알겠지만 강렬한 시선이다. 딱봐도 포스가 느껴진다. 이 때문인지 교과서에 나운규 사진이 실려있다면 100% 제일 위에 사진이다[2] 참고로 나운규 눈밑에 검댕을 칠한것은 독일 표현주의 영화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학생들에 따라서는 나운규 하면 그냥 눈빛 정도로만 기억하기도 한다. 실제로 등장하는 영화에서도 보면 딴사람들은 다 멀쩡한데 혼자서만 거의 90년대에 근접하는 시대를 뛰어넘는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는 등 뭔가 시대초월적인게 느껴진다.

이 눈빛에 관한 에피소드로 심지어 같은 영화사 소속의 선배 배우마저도 "너는 악역이나 범죄자 같은 배역이 어울린다" 라고 했을 정도라고 하고(...) 실제로 '벙어리 삼룡이'에서 주인공 삼룡이역을 맡기도 했으니 사진에는 한치의 과장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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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의외로 평소모습을 찍은 사진을 보면 윗사진처럼 강렬하지는 않은 편이다. 이건 손아섭 닮았다 콩짤?

1926년에는 직접 메가폰을 잡고 영화 아리랑을 제작하면서 스타급 감독으로도 떠올랐고 조선 영화의 황금기를 불러왔다는 평을 받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무절제한 여자관계로 인해 비난도 받았다. 가정이 있었음에도 오향선이라는 기생과 동거하였으며 심지어 기생과 뱃놀이를 하기 위해 촬영 장비들을 팔았다는 루머도 있을 정도였다.[3] 이후로도 작품활동을 꾸준히 하고, 자기 작품에 배우로 등장하기도 하면서 꾸준히 배우생활도 했지만... 안타깝게도 당시로써는 난치병이던 결핵으로 인해 36세의 나이로 1937년에 죽고 말았다.

나운규의 말기작들에 출연했었던 원로배우 고 전택이가 남긴 증언에 의하면, 어떤 여성이 배우가 되고 싶어서 나운규가 묵는 여관까지 찾아 왔는데, 그러다가 어느새 나운규와 눈이 맞고 말았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그 여성의 남편이 격분하여 여관에 쳐들어와 각목을 휘두르는 사태가 발생했는데, 마침 그 자리에 있었던 전택이가 일본도를 휘두르며 (...) 나운규를 보호한 덕분에 나운규가 간신히 봉변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사실 영화 아리랑은, 영화 자체가 일제 강점기 시대에 제작된 반일 영화였던 탓에 심의를 통과시키기 위해 일본인 이름으로 심의를 넣어 무삭제로 통과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이게 빌미가 되어 이후 제작한 작품들은 심의 통과가 어려워진데다, 심의 통과를 해도 엄청나게 가위질을 당하는 등, 나운규는 영화 제작을 하면서 끊임없이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그리고 상황이 이렇게 되자 조선 키네마 영화사에서 독립하여 나운규 프로덕션을 서립하고 독자 노선을 걸었으나, 여전히 심의 통과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통속적인 영화나, 자신이 영화에서 보여주던 정서와는 동떨어진 일본 영화에도 출연하는등 어렵사리 활동을 이어갔다. 이는 어떻게든 영화판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몸부림의 일환이었고, 결국 작은 극단 소속 배우로 활동하기도 했다.

결국 이 과정에서 대표작이었던 아리랑 후속작으로 아리랑 2탄, 3탄을 제작하기도 했으나 1편만 못한 후속작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실패했다. 특히 3탄은 당시 최신 기술이었던 유성 영화로 제작 되었는데, 여러모로 유성 영화로써의 퀄리티도 좋지 않았던 듯.

그리고 그렇게 커리어가 끝나나 싶었지만 천만 다행히도 사망 직전 개봉한 영화 오몽녀가 대흥행하면서 영화 감독으로써 자존심을 되찾게 되었다. 특히 기존의 작품들은 제작, 시나리오, 감독, 주연등을 혼자 다 했다면, 오몽녀는 오롯이 감독으로만 참여하여 이목을 끌었었다.

작품마다 실려있는 반일코드와 해방코드가 특징. 나운규는 1920년에 독립운동단체인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에 가입, 항일전을 전개하여 활동하는등 홍범도 장군 밑에서 독립운동 하기도 했었다. 이 때문에 독립투사로 인정받기도 하며, 1993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나운규를 기리기 위해 90년부터 한국영화감독협회 주관으로 '춘사영화상,이 제정됐으며 물론 한국영화,영화인대상으로 수상한다. 목록 특이한점은 그 해에 줄사람이 없다고 판단되는 상은 수상하지 않는다. 2014년에 감독상 수상자가 없다.

나운규의 2남 1녀 중 둘째 아들 나봉한도 196-70년대 영화감독으로 활동했다.

영화 아리랑 개봉 90주년을 맞아 최초로 나운규 사망 후 썼던 여배우들의 추모글이 발굴되었다. #

3 기타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으로 영화판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놨다는 평가를 듣고 이후 뇌물수수혐의로 구속된 조희문이라는 천하의 개쌍놈은 '아리랑은 나운규가 만든 작품이 아니라 일본인 감독이 연출한 작품이다' 라고 혼자 주장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헛소리이다.

  1. 흔히 아리랑 1편의 스틸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 아리랑 2편의 스틸이다.
  2. 학교대사전에서도 나운규는 왜인지 교과서에선 이 사진만 나온다고 쓰여있다
  3. 오향선은 유신방이라는 이름으로 배우 활동을 하였다. 성격도 까칠한 편이였는지 당대 영화인들 사이에서는 평가가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