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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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대통령장(複章)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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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삼김병조김붕준김상옥김성수
김완규김익상김지섭김하락나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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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썬문창범문태수민긍호민종식
박동환박열박승환박용만박은식
박준승백용성신규식신돌석신석구
신채호신홍식쑨커쑹자오런안재홍
양기탁양전백양한묵E. 배설언더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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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성이동녕이동휘이명룡이범석
이범윤이봉창이상설이상재이승희
이위종이은찬이인영이재명이종일
이종훈이필주임예환장건상장인환
전명운전해산정환직조성환조완구
주자화주시경지청천채상덕천청
최석순최성모탕지야오편강렬홍기조
홍범도홍병기황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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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 10월 12일[1] ~ 1943년 10월 25일

홍범도(洪範圖). 대한민국독립운동가이자 의병. 광복을 불과 2년 남겨두고 소련에서 사망했다. 그래도 고려인들 사이에서는 고려인 1세대 영웅으로 기억되는 편.

공식홈페이지 #

1 유년기

평양 출신[2]. 양반집 머슴하던 아버지에게서 태어나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태어날 때 홍범도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출산 후유증으로 돌아가셨고 머슴살이 하던 아버지마저 9살에 세상을 떠난다. 이 때문에 어린 홍범도는 자신의 뿌리조차 모른 채 다른 양반집에 머슴으로 보내진다. 10대 중반이던 1883년에 머슴살이를 청산하고 인생을 바꿔보고 싶다는 맘에 평양 감영의 나팔수로 입대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이탈한다. 여러모로 열악했던 군대와 대우에 못 이겨서라는 이야기가 있다.[3][4] 이후 이래저래 맘을 달래고자 금강산에 있는 절에 불제자로 출가한다. 평생 교육이란걸 못받았던 홍범도는 이때 절에서 글을 깨치고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배우게 된다. 이순신장군도 이때 알았다고 한다. 비구니였던 아내도 이때 알게 되어 나중에 결혼까지 하게 된다. 항일 투쟁노선 외길을 걸었던 홍범도 개인에게 있어선 이때가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2 의병 활동

이후 절을 떠나 황해도로 아내와 거주지를 옮겨 한동안 제지소에서 일했다. 그러나 1886년 3년치 임금을 체불한 고용주를 말다툼 끝에 살해하고 도주, 강원도 북부 산악지대에서 산포수 생활을 했다. 이때부터 1895년 을미의병 발생 시기까지 10년 동안 평범한 사냥꾼으로 생활했다.총을 잘쏘기로 유명해서[5]일대 포수들에게 지지를 얻고, 포계(砲契)라는 포수 권익 단체를 만들고 대장이 된다.

1895년 을미의병 발생 직후 강원도 철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다.이유는 일제의 총포기화류 일제 단속법이 발령됐기때문. 포수로 생계를 책임지던 홍범도와 조합원들에게 있어서 의병투쟁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어쩔수없는 일이었다. 당시 의병은 14명으로 전해지며, 대부분 함께 사냥 일을 하던 강원도 산포수들이었다. 이 시절의 그는 말 그대로 전설의 스나이퍼. 동료들 먼저 가라고 해놓고는 홀로 수십명을 쏴죽이고 돌아왔다라는 야사도 있다. 이후 유인석 의병대에 합류하여 전투에 들어갔으나 1896년 이후 을미의병의 기세가 사그러지자 홍범도 역시 의병을 해체하고 귀향, 다시 산포수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1905년 대한제국을사조약 체결 시점에서는 딱히 의병활동을 하지 않았으나, 1907년 고종 퇴위와 군대해산을 전후한 (정미칠적 참조)에 따른 정미의병운동이 시작되고,이젠 강제 총기수거령으로 생계까지 막막해지자 함경도 갑산 일대의 포수들을 모아 다시 궐기한다. 홍범도는 최대 6~700명으로 생각되는 의병대를 이끌고 주로 함경도와 강원도 북부를 무대로 하는 유격전을 벌였다. 말이 무대지 사실상 산속 수백리를 축지법 급으로 숨어다녔다는 이야기가 된다.이때 민중에서는 나는 홍범도라는 별명까지 붙는다.[6]이 시기 일본 헌병대 및 육군 정규부대를 상대로 대소 37회의 전투를 벌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런 의병투쟁에도 불구하고 1910년 결국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탄되면서 의병항쟁 여건은 지속적으로 악화돼 왔으며, 이 시기 국내 무장독립투쟁단체들의 일반적인 조류에 따라 홍범도 역시 결국 1911년 연해주로 망명,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점으로 하는 독립운동단체와 연계해서 수시로 월경, 접경지대의 친일파 및 일본 군경을 괴롭히는 유격전을 수행했다.

3 러시아로

홍범도가 훗날 공산주의 독립운동단체와 인연을 맺게 된 것도 이곳 블라디보스토크에서였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러시아 혁명의 저지를 위해 국제 간섭군이 러시아에 진주할 때 일본군이 연해주에 진주했는데, 일본군은 이 기회를 틈타 홍범도를 포함한 연해주 소재 조선 무장독립운동단체를 소탕하려 했다. 이에 대응해 조선측 무장독립운동단체도 적극적인 교전을 벌임과 함께 그나마 자신들 편이라고 생각되던 적위군과 손을 잡게 되었다. 이것이 홍범도와 공산당의 첫 만남이었다. 이후 함경북도로 수 차례 진출, 1919년 10월 혜산진 일대에서의 유격전 성과로 지명도를 높인 홍범도는 1920년 봉오동 일대에서 잡다한 무장독립운동단체가 연합해서 결성한 대한북로군독부 예하 북로제1군 사령부장(부사령관)으로 선출되었다.

이어서 1920년 6월에 봉오동 전투를 치르고, 그로부터 불과 4개월 뒤 청산리 전투에 참여, 상당한 활약을 했다.[7] 그러나 이후 계속된 일본군의 토벌전 및 만주 군벌과의 충돌로 인해 부득이하게 홍범도를 포함한 독립군 세력은 소련 영내로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

1921년 연해주 및 시베리아로 후퇴한 독립군은 결국 소련의 지원을 받기 위해 자유시로 이동했으며, 이 시기 홍범도는 그간의 무훈으로 새로 창설된 대한독립군단 부총재가 돼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홍범도는 독립군 내 공산당 파벌싸움으로 발생한 자유시 참변을 겪고 결국 소련군에 편입, 소련군으로서의 군 경력을 시작해야만 했다.[8] 그리고 그나마도 오래 가지 못해, 1922년 일본의 연해주 간섭군 철수를 조건으로 일본측이 요구한 항일무장투쟁단체의 해산이 이루어지고 나서 결국 홍범도 이하 공산측 독립군은 무장해제,다른 동료들은 상해 임정으로 다른 지방으로 뿔뿔히 흩어졌으나 돌아갈곳도 가족도 없던 홍범도는 결국 러시아에 남아.소련 시민으로서의 삶을 시작해야만 하게 되었다.

이후 그간의 무훈으로 얻은 인망에 힘입어 1923년 연해주 남부에서 한인 콜호즈의 지도자가 되었고, 1927년에는 소련 공산당에 정식으로 입당했다. 이후 연해주의 고려인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서 지속적으로 활동해 왔으나,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이뤄진 고려인 강제이주 정책으로 인해 당시 소련 영토였던 현재의 카자흐스탄 땅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이후 카자흐스탄의 도시 크즐로르다(Қызылорда) 시의 고려인 극장에서 고려인 희곡작가 태장춘의 배려로 수위장을 맡았고 연금을 받으며 살다가 1943년 10월 노환으로 별세했다.이때 극장의 극작가가 홍범도를 주제로 한 연극을 구상하게 되면서 이때 홍범도의 일대기가 만들어졌다. 참으로 천운이라고 밖에 설명할수없는.. 이후 극작가는 홍범도를 주제로한 연극 '홍범도'를 만들게 되고 1943년에 초연을 하여 현재도 카자흐스탄에서 상연을 하고 있다고 한다. 홍범도의 묘지는 지금도 크즐로르다 공동묘지에 있으며, 스탈린이 죽고 소수민족 탄압이 중지되면서 업적을 인정받고 복권되어 지금은 크즐로르다에도 홍범도 거리가 있다.

1962년 10월 25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2016년 2월 해군은 손원일급 잠수함의 7번함을 '홍범도함'으로 명명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홍범도함은 4월 5일 진수되었다.

3.1 기타

경력이 경력이고 해서 종종 독소전쟁 참전 떡밥 심지어는 스탈린그라드 전투 참전 떡밥 이 돌곤 하는 인물이다. 하긴 시가전이었으니 스나이핑이 제대로 먹혔겠다 1941년 6월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지역 한인들과 함께 의용군 편성을 자원했다는 떡밥이 있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게 사실이었다 해도 소련 당국이 고려인만의 부대를 창설하는 것은 절대 엄금했다는 것이었다. 이는 고려인만이 아니었다. 독소전에 참전한 소수민족들은 민족별로 구분된 부대를 창설하지 못하도록 규제됐으며, 심지어 아예 참전을 금지당한 경우도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당시 불가침조약을 체결하고 있던 일본을 자극할 수 있다는 점이 고려인 참전 금지 사태에 어느 정도 작용했다고 하나, 이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요소였다. 실제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전이 확인된 같은 고려인(또는 조선인)출신은 북한의 남일이다. 이 사람은 6.25때 인민군 총참모장을 역임했으며, 휴전회담때도 북한 대표로 나왔다.

단지 늙은이가 어떻게 전쟁에 나가느냐는 소련군 장교의 말에 공중으로 코페이카 동전을 던지고 권총으로 명중시켜서 빼어난 사격술을 자랑했다는 흥미로운 일화만 전해져 오는데, 역시 진위 여부는 불분명하다.

많은 사람들이 홍범도 장군이 극장의 수위로 일하다 불행하게 삶을 마친 것으로 알고 있지만, 당시 홍범도가 맡았던 직책은 수위가 아닌 수위장이었고 실제론 희곡작가 태장춘의 배려로 수위일은 거의 하지않고도 봉급을 받아 비교적 여유있게 생활할 수 있었다. 홍범도가 한국독립운동사에 끼친 영향력을 감안하면 너무나도 부족한 말년이지만, 해방 뒤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에게 고문당한뒤 생명의 위협을 느껴 월북한 김원봉의 사례나 빨갱이란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학살당한 수많은 독립지사들의 사례와 비교해보면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라 볼 수 있다.

과거 MBC에서 방영한 드라마 '까레이스키(김희애, 차인표, 한석규 출연)'에 등장하는 '박하치 장군(김동현 분)'이 그를 모태로 하고 있다. 드라마에서는 딱히 그가 홍범도 장군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독립운동을 한 장군이고, 자유시 참변으로 인해 부대를 잃었고, 말년에 극장 경비원으로 일생을 마쳤다는 점에서 영락없는 홍범도 인증.

다만 여기서 박하치 장군은 실제와는 다르게 극장을 침범한 괴한을 쫓다가 공격받고 그대로 운명.(여기서 옛 부하의 아들 부부가 운영하는 극장 관계자가 장군에게 엄청난 멸시를 주고 무례하게 굴지만, 때마침 찾아온 부하 내외가 자신을 알아보고 인사하자 그들이 사과한다)

참고

  1. 음력으로는 8월 27일. 구판 위키에서는 음력 생일만 적혀 있었다. 한국천문연구원에서 제공하는 음양력 변환 서비스로 음력 날짜를 그레고리오력 날짜로 바꾸어 본문에 적었다.
  2. 평안북도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
  3. 우리가 생각하는 탈영과는 전혀 다르다. 저때 조선군은 원래부터가 실 근무 병력과 장부상 병력이 다르고, 장부상 군사의 이름과 실제 복무하는 군사의 이름도 맞지 않는 형편이었다. 입대한 것도 병적에 이름이 있는 노인 또는 사망자를 대신해서 이름만 올린 것일 가능성이 크고, 탈영했다 해도 애초에 인원 확인조차 되지 않으며 복무를 계속하는 게 곧 굶어죽는 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말 다 했다.
  4. 야사에는 꼴같잖은 상관을 피양 박치기로 받아버렸다흠좀무한 이야기도 있다.
  5. 먼 거리에서 총을 쏴,유리병의 입구를 통과해 병의 바닥을 맞추는 신기의 사격실력을 보유했다고 한다. 현대 총기로도 이 정도 사격실력은 마냥 쉽지만은 않으며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당시 총기의 성능을 고려해보면 더더욱 놀라운 실력
  6. 머슴아버지 밑에서 자라 유년기부터 머슴살이를 했기에 엄청난 힘과 체력을 보유했을것으로 추정된다.증언에 의하면 홍범도는 다른 사람들보다 체구도 우람했으며 근육량도 엄청났다고 한다.포수생활을 하면서 산을 자유자재로 타넘었던 원동력.
  7. 청산리 전투의 주도적인 인물로 잘 알려진 김좌진이 우파 인사였던 탓에, 중국내 한인 사회에서는 이 청산리 전투의 주요 지휘관으로 김좌진보다 홍범도를 더욱 높게 친다. 거꾸로 국내에선 홍범도가 결국 소련군과 손을 잡았었다는 점 때문에 1980년대 후반까지도 아예 홍범도 이야기가 거의 나오지 않거나 간단하게 언급만 되고 홍범도의 말년도 '독립운동 하시다 아무도 모르게 쓸쓸히 돌아가셨다' 정도로만 언급되었다. 사실은 김좌진과 홍범도 부대의 공로가 반반이라고 보는 편이 좋으며, 특히 일본군끼리 서로 싸우게 한 작전은 홍범도의 작전이었다.
  8. 자유시참변으로 독립군들의 피해가 컸지만, 최소한 홍범도측 부대의 사상자는 한명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