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괘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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羅州 掛書 事件

신치운이 말하기를, "성상께서 이미 이처럼 의심하시니, 신은 자복을 청합니다. 신은 갑진년 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신의 역심(逆心)이며, 심정연의 흉서 역시 신이 한 것입니다."[1]라고 하니, 임금이 분통하여 눈물을 흘리고, 시위(侍衛)하는 장사(將士)들도 모두 마음이 떨리고 통분해서 곧바로 손으로 그의 살을 짓이기고자 하였다.

致雲曰: "上旣疑之如是, 臣請自服。 臣自甲辰後, 不喫蟹醬, 此乃臣之逆心, 鼎衍凶書, 亦臣所爲也。" 上憤痛流涕, 侍衛將士莫不崩心痛骨, 直欲手臠其肉。
- 영조 실록 84권, 영조 31년 5월 20일 2번째 기사[2]

1 개요

영조 31년(1755년) 일어난 괘서 사건. 이 해가 을해년이기 때문에 '을해옥사'라고 부르기도 하며 사건을 주도한 윤지(尹志)의 이름을 붙여 '윤지의 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2 내용

2.1 배경

숙종 말년 누구를 후계자로 지정할 것인지를 놓고 연잉군을 지지하였던 노론세자를 지지하였던 소론 사이의 다툼은 격화된다. 우여곡절 끝에 세자였던 경종이 즉위에 성공하지만, 숙종 말기부터 이미 정국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은 경종을 압박하여 연잉군을 세제로 삼는 데 성공한다. 급기야 일부 노론 세력이 세제의 대리청정을 요구하는 초강수[3]까지 동원하였지만, 이런 무리수는 결국 소론의 반발을 불러왔고 소론 강경파 김일경이 주도한 정미환국을 통해 노론을 실각하게 된다.

이어 목호룡의 고변으로 노론의 주요 가문을 풍비박살 내버린 신임옥사가 발발하고 급기야 세제였던 연잉군의 이름까지 여기에 오르내리게 되면서 목숨을 위협받게 된다. 그렇지만 연잉군 본인의 정면돌파 작전과 더불어 경종의 보호 덕분에 연잉군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고 허약했던 경종이 즉위 4년만에[4] 사망하면서 연잉군은 보위를 이어받게 된다.

즉위 직후 영조는 보복을 감행하여 김일경과 목호룡을 제거한다.[5] 이후 영조 3년에 실각한 소론 강경파의 주도하에 이인좌의 난이 발발하였고 반군이 경기도까지 진출하기도 하였지만 결국은 진압된다.

2.2 진행

이인좌의 난 직전에 있었던 정미환국 이후 비교적 긴 시간 동안 조정에는 소위 탕평책이 적용되어 노론과 소론 사이의 표면적인 균형이 이루어지게 된다. 애초에 왕의 마음은 자신의 후견 세력이었던 노론에게 기울어져 있었으며, 이인좌의 난을 비롯한 소론/남인 강경파(준론)들의 연이은 반란 음모라 쓰고 자살골이라 읽는다가 중앙 정계에 자리 잡은 소론 온건파(완론)들의 정치적인 입지를 갈수록 위축시켰기 때문. 결국 1740년 소론 완론 내에서 가장 강경파였던 이광좌가 사망한 이후 신임옥사가 무고로 처리되고 노론 4대신을 비롯한 사건의 희생자들이 복권되면서 사실상 소론의 입지라는 것은 없어진 것과 마찬가지였다.

김일경의 옥사 이후 30년 가까이 유배를 가 있던 윤지는 이러한 상황을 활용하여 소론 내 불만세력들을 규합하는 한편으로 나주 목사들과 모의하여 거사를 일으킬 것을 계획한다. 반란을 일으키기 전에 백성들의 민심을 동요시킬 목적으로 무당들의 푸닥거리를 통하여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한편, 영조 31년 1월에는 나주 객사에 국왕을 비방하는 벽서를 붙이지만 거사를 채 일으키기도 전에 적발되고 만다. 벽서에 관련된 보고를 받은 조정 측에서는 '무신년 일당들의 소행일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렸고 윤지를 비롯한 관련자들이 그대로 체포되어 한성으로 압송된다.

윤지를 비롯한 사건의 주동자들은 영조의 친국 이후 모조리 사형당하였으며, 사건 직후였던 같은 해 5월에는 심정연을 비롯한 소론 준론의 자제들이 과거 시험장에서 나라를 비방하는 답안지를 써서 다시 한 번 피바다가 몰아친다.[6]

2.3 결과

영조는 즉위 초부터 당쟁의 여러 가지 폐단을 없애기 위해 탕평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인좌의 난 이후 정권은 대개 노론계에서 차지하였다. 반면, 실세한 소론들은 거의 신원되지 않았으며, 그들의 원망이 누적되어 당화(黨禍)는 잠재된 채 윤지의 난으로 폭발되었던 것이다. 이는 영조의 탕평책이 여의치 못했음을 반영한 사건이었다. - 나주괘서사건 [羅州掛書事件]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이러한 집단 자결에 가까운 소론 준론의 마지막 발악은 소론이라는 한 붕당의 의리에 치명타를 가했으며, 소론은 사실상 역당으로 전락하고 만다. 또한 연이은 음모에 인내심이 바닥난 영조가 마침내 노론의 청을 받아들여 조태구, 유봉휘를 비롯한 소론 주요 인사들에게 역률을 추죄하는 한편 이광좌의 직첩 역시 박탈하면서 영조 말기 정국은 사실상 노론이 장악하게 된다.[7]
  1. 대놓고 임금에게 '당신이 선왕을 독살했잖아. 빨리 날 죽이란 말이다'라고 바락바락 대든 셈이다.
  2. 여담이지만, 이 발언 자체는 엄밀히 따지자면 나주 괘서 사건과는 별개의 사건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주 괘서 사건 직후, 이 사건에 고무된 신치운을 비롯한 소론 강경파의 자제들이 과거장에서 국왕을 비방하는 글을 쓴 답안지변서사건(答案紙變書事件)을 일으켰고 이후 추포되어 영조의 친국을 받는 자리에서 행한 진술이다.
  3. 건강이 쇠락한 왕이 대리청정을 할 것을 세자에게 요구하여도 신하들이 들고 일어나서 강경히 거부하는게 조선의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하물며 이 당시 경종은 갓 즉위한 30대의 젊은 청년이었는데도 노론은 경종을 사실상 바지사장으로 밀어내려고 한 것이다. 경종이 평균적인 왕권만 가지고 있었더라면 당장 목이 날아가도 시원찮았을 요구였던 셈. 뭐 결국은 신임옥사로 다들 목숨이 달아났다
  4. 이 과정에서 영조가 앓아 누웠던 경종의 수랏상에 게장과 감을 진상했고 경종의 사망 직전 어의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인삼을 처방할 것을 강행하면서 두고두고 경종을 독살했다는 꼬리표가 생애 내내 따라다니게 된다. 상단의 신치운이 '나는 갑진년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다'라고 한 것도 여기서 나온 맥락. 경종 독살설과 관련하여 자세한 사항은 영조 항목과 경종 항목 참조.
  5. 본 항목인 나주 괘서 사건을 주도한 윤지 역시 이 사건에 연계되어서 제주도로 유배된다. 그리고 중간에 나주로 유배지를 옮기기는 하였지만 괘서 사건 전까지 30년 가까이 유배 생활을 하게 된다.
  6.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놓고 '소론 준론의 후예들은 마치 집단 자결을 하듯이 그렇게 사라져갔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7. 엄밀히 따지자면 노론이라는 하나의 붕당이 권력을 독점했다기 보다는 노론 내에서도 특정 가문이 권력을 장악하는, 홍봉한으로 상징되는 척신 정치가 이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