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봉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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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鳳漢
(1713년~1778년)

혜경궁 홍씨의 친정아버지, 영조의 바깥사돈, 사도세자의 장인어른, 정조의 외할아버지. 노론의 척신이며 권신. 후에 시파(時波)로 이어지는 북당(北黨)의 영수

1 초기

선조의 6대손이자, 정명공주와 영안위 홍주원의 5세손이며, 수재 홍현보의 아들로, 좌의정 홍인한의 형이자 정조의 외조부이다. 홍국영 일가 역시 그의 친족으로 8촌 형인 홍창한의 손자였다.

2 영조 시절

음보로 참봉에 등용되어 세자익위사 세마로 있을 때인 1743년 딸이 세자빈으로 뽑혔다. 1744년 문과에 급제. 사관이 되었다.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45년 종이품으로 특진 광주 부윤이 되었다. 그가 갑자기 과거급제 직후 종이품으로 승진하여 양사의 비판이 있었으나 왕이 특별히 무마시켰다. 이후 영조 연간의 최강의 실력자로 부상한다.

광주 부윤을 비롯하여 어영대장으로 오랫동안 활동하였으며, 예조참판으로 연접도감제조를 지낸 후 1752년에는 동지경연사 53년에는 비변사당상으로 임진절목을 편찬하는데 참여하였다. 1754년 비국당상이 되어 청인들이 애양책문 밖에서 거주하며 개간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1755년 구관당상·평안도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이어 좌참찬에 승진하였으며, 1759년 세손사가 되었다.

1761년 사위 사도세자평양 원유사건으로 노론계 정승 이천보, 이후, 민백상 등이 자살한 뒤 일약 승진, 우의정에 발탁되었다. 1761년 우의정이 되고, 이어 좌의정을 거쳐 판돈녕부사로 전임되었다가 1761년 영의정에 이르렀다. 세자에 대한 사건으로 파직되었다가 다시 좌의정이 되어 경외민의 이동법을 만들어 함부로 행동함을 금하였으며, 여러 가지 폐습과 관리의 협잡 등을 시정하는 한편 당습의 제거·군사의 보충·독봉의 폐해를 개혁하였다

사도세자 문제에 있어서 반대파들에게 사도세자의 비행을 은폐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에 대해 한중록에서 혜경궁 홍씨는 충절의 결과이자 사도세자를 영조의 정신 학대 수준인 진노로부터 보호하고자 어쩔 수 없이 의리와 실리의 우선순위를 뒤바꾼 결과라고 변호한다. 물론 자기 아버지이니만큼 본인 주관을 담아 옹호한 측면이 없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사도세자를 보호하는 데 가장 앞장 선 인물 중 하나라는 점은 확실하다. 특히 사도세자가 홍봉한에게 자신의 정신질환에 대해 토로하며 이에 대한 약을 구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적이 있어서 사도세자 역시 홍봉한에게 의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편지는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

그해 윤 5월는 사위인 사도세자가 뒤주 안에 갇혀 굶어 죽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사도세자의 처형에 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물'[1]을 바치는 등[2] 사형 집행에 적극 동참했고[3] 이후 반홍봉한파인 한유가 그것을 비판했다가 영조의 심기를 건드려서 처형된다. 그는 형식상 영의정 겸 세자사부로서 세자의 스승이라는 직책을 겸직하고 있었기에 사직서를 내고 보름 동안 나가 있다가 다시 영의정으로 복직했다.

1768년 다시 영의정이 되어 울릉도의 사적을 널리 조사하여 책을 만들어 일본인들의 점유를 미리 막게 하였으며, 1771년 영중추부사가 되어 청주의 한유의 망국동 망정승 탄핵을 받고 사직했다 한편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은신군을 물질적으로 후원하다가 영조의 의심을 받기도 했다. 이는 은언군과 은신군의 유배로 종결되었다. 다시 봉조하에 이르러 은신군 은언군의 사건으로 삭직되었다.

집권 말엽에는 경주 김씨와 화해를 주선했지만, 경주 김씨들은 망국동 망정승 상소 등을 이용하면서 그를 맹렬히 탄핵했고 이에 유화책을 접고 각각 삼왕손과 세손을 등에 업고 치열한 접전을 벌였지만 나중에 영조에게 들키면서 경주 김씨들과 사이좋게 실각한다.

3 말년과 최후

경주 김씨와의 권력투쟁 때문에 영조의 눈밖에 나서 실각한 후에는 그의 동생 홍인한과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이 조정의 실세가 된다. 흔히 홍봉한, 홍인한의 사이가 나빴다고 설명이 되지만 홍봉한은 홍인한을 살리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고 의견충돌도 보이지 않는다. 어쨌거나 그의 동생 홍인한이 실세가 되면서 홍봉한의 존재감은 많이 약해졌다.

정조는 외조부인 그에게 은전을 베풀어 아들 홍낙임을 친국의 형식을 빌어 석방하고 홍봉한에겐 1772년 또다시 봉조하에 제수한다. 동생 홍인한의 죽음을 목격한 다음에 1778년에 한성부에서 사망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66세였다.

4 사후

그때 정조가 부원군의 장례에 준하여 장사케 하고, 3년 동안 녹봉을 지급하게 하였으며, 1784년 시호를 내리고 제사하였으며, 1843년 체천 않는 은전을 베풀었다. 고종황제사도세자가 왕으로 추존되고 혜경궁 홍씨도 왕비로 추상되면서 영풍부원군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익정이다.

5 가계

  1. 一物. 뒤주를 의미한다. 당시에는 영 좋지 않은 일을 에둘러서 표현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일물'은 임오화변과 관계 깊은 물건인 뒤주를 필터링한 표현으로 쓰였다.
  2. 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한중록의 기록이나 정조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정작 '일물'이 들어올 때 홍봉한 본인은 입궐도 안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조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그 자리에 이미 와 있었다고 하니 정면충돌. 사관이 날조를 했거나, 정조가 착각을 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학계에서는 어느 쪽으로 더 의견이 기울어 있는 지 추가 바람.
  3. 사도세자가 이미 영조의 눈밖에 난 이상, 변호해봤자 소용도 없을 뿐더러 여차하면 세손까지 위험해질 것을 걱정해 이렇게 행동했다는 해석이 많다. 사실 때를 보면 이미 영조는 왕후의 영혼이 세자의 역모를 경고했다는 말 같지도 않은 명분을 내세우면서까지 처벌을 강행하는 등 이미 사도세자를 살릴 마음 자체가 없었다. 게다가 세자의 광증이 너무 심해진 나머지 생모인 영빈과 아내인 혜경궁까지 세자를 대처분하여 세손이라도 보전해야 한다는 데에서는 의견을 같이 하였고.
  4. 홍봉한 가문에서 일하던 시종 성윤우의 딸이다. 혜경궁 홍씨 처소의 궁녀로 일하다 정조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