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의 조건이나 상태를 그대로 인정하며 그에 입각하여 사고하고 행동하는 태도를 찾아왔다면 현실주의 문서로. 국제 정치•외교에서의 리얼리즘을 찾아왔다면 정치현실주의로. |
1 개요
Realism
근현대 예술의 한 부류로 일반적으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ㆍ재현하려고 하는 창작 태도. 리얼리즘을 일단 "사실주의"로 번역하긴 하지만,[1] 사실 "현실주의(現實主義)" 등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다. 문학, 미술 분야에서 조금씩 다른 특성을 가진다. 리얼리즘의 파생물로 자연주의가 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역시 리얼리즘의 영향을 받았으나, 본래 의미에서 변질되어 선전, 선동이 되어버리기도 했다.어째서 예술가에게 현실주의가 통용되냐는 문제에 대해선 집어치우자.
1.1 리얼리즘 문학
사회적 현실을 일을 객관화하여 묘사하는 문학의 한 장르. 여기서 객관화란, 과학에서의 객관이 아닌 '대다수의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일'을 뜻한다. 수많은 경험적 지식중 대표적인 소재를 뽑아 일정한 형식적 구조를 입힌다. 다시 말해 일상적인 현실에 특별한 의미를 주는 방식으로 소재를 정리하는 것이다.
리얼리즘을 이해하기 위해선 '모방'이라는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플라톤은 예술가를 사회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그가 우리가 사는 현실을 절대적인 진리, 그러니까 이데아의 왜곡된 모방일 뿐이고, 예술은 이데아의 모방인 현실을 다시 한번 모방함으로써 이데아에 다가가는 것을 방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방은 현실을 왜곡함으로써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본질을 재현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더해 이데아에 더욱 가까워질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모방은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일이며, 모방의 작품을 보는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다. 현실에선 괴로울 일을 예술 작품으로 표현되면 보고 즐길 수 있는것도 이 때문이다. 현대의 리얼리즘은 이런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론에 입각하고 있다.
아무래도 (대중의 시각으로 보는) 사회의 모습을 많이 반영하는지라, 리얼리즘 문학에서는 소설의 내용에 사회문제가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된다. 묘사가 심화되면 문학이라기보다는 사회과학서에 가까워지기도 한다. 이러한 리얼리즘의 역할은 스탕달의 소설 적과 흑의 한 대목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아, 선생님. 소설이란 커다란 길 위를 오가는 거울입니다. 이 거울은 어떤 때는 하늘의 푸른빛을 우리에게 비춰주고, 어떤 때는 길의 진흙수렁을 비춰줍니다. 그런데 그 거울을 채롱에 지고 다니는 사람을 당신들은 부도덕하다고 비난하지요! 그의 거울이 수렁을 보여주면 당신은 그 거울을 비난하는 겁니다! 차라리 수렁이 있는 큰 길을 비난하고, 또한 물이 썩어 진창이 되도록 방임한 검찰관을 비난하십시오!'
1.2 리얼리즘 미술
어느 한 선원이 배가 스페인에 정박해 있을 때 길에서 피카소와 만나게 되었다.그는 그에게 "저는 당신의 그림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현실적이지 않아서요" 라고 말했고, 피카소는 그런 그에게 "그럼 자네는 뭘 현실답다고 생각하나?"라고 되물었다.
그러자 그가 피카소에게 주머니에 손을 넣어 한 작은 사진을 꺼내 보여주었다.
"제 여자친구 사진입니다."
피카소는 한동안 말없이 그 사진을 바라보다 이렇게 말했다.
"자네 여자친구는 굉장히 예쁘긴 한데, 너무 작구먼.
미술에서 리얼리즘 문제는 1830년대 사진이 발명되면서 본격적으로 문제가 되었다. 쉽게 얘기하면 굳이 사진으로 찍으면 되는데, 왜 똑같이 그려야 하지?라는 물음이 제기된 것이다. 점점 회화는 '자연적 사실성'을 보여주는데 있어 경쟁력을 상실해갔다. 물론 지금도 그런 자연적으로 사실적인 그림이야 만들 수 있다. 극사실주의가 대표적인 부류이다. 하지만 그렇게 들인 노력에 비해 과연 창작과정이나(작가의 측면에서), 감상(관람자의 측면에서)에 있어 보람이 있는가에 대해서 회의감을 가지게 된 게 사실이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물음들을 작가들이 가지게 된거다.
뭐가 리얼한 거지?
1) 겉보기에 사실적으로 보이도록 그리는게 리얼한건가?
2) 습관적으로 아름답다고 하는 걸 그리는게 리얼한건가?
3) 아니면 현실 실상을 고려해 그리는게 리얼한건가?
4) 현실을 직접 보고 그리는게 리얼한건가?
우리가 생각하는 '사실적인' 그림은 보통 1번이나 2번일 것이다.
1번의 경우는 흔히 서양식 원근법이 적용된 그림들이다. 하지만 과연 선원근법(투시도법)이 사실적인 도법인지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실 가장 정확한 원근법으로 그려진 그림을 보려면 우리는 2차원 사물을 그린 평면도를 봐야 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선원근법은 3차원 사물을 표현하기 위해 먼 사물일수록 작게 표현되도록 적절히 사물 형태를 왜곡시켜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각의 인지적 문제로 인해 우리의 눈은 대상을 상대적으로 받아들인다. 우리의 눈은 상대적 색채나 질감차이를 착각하고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체커 그림자 착시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2번의 경우이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만이 리얼한건가? 이는 스테레오타입을 낳는다. 특정 부류의 이미지나 표현을 표준이라고 정하는 편견을 낳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방송에서 보는 사람들은 다 선남선녀만 나오지만, 당연히 세상에는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과연 모델같은 몸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숫자로만 따지면 도리어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들이 비정상이고 기형일 수도 있다. 관습적으로 아름답다고 여기는 이상형이 곧 리얼은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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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프랑수아 밀레, <이삭 줍기>, 1857년
쿠르베, <돌을 깨는 사람들>, 1849년
리얼에 대해 고민한 예술가들은 3번이나 4번처럼 현실 실상을 반영해 그리는 것이 결국 가장 리얼한게 아닐까 생각했다. 장 프랑수아 밀레나 귀스타브 쿠르베가 이를 고민한 가장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것도 실은 말보다 굉장히 어렵다. 밀레의 그림은 사실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적절한 자세의 인물을 적절한 구도에 적절하게 배치한 그림이다. 실제로 그림처럼 사람들이 서서 작업했을진 의문이라는 것. 그런 면에서 쿠르베의 그림은 훨씬 사실적이다. 당대 실상을 직접 보고 그렸다고 밝혔으니까. 하지만 이 역시 문제가 있다. 사진과 달리 그림은 옮겨 그리는데 시간이 걸리고, 그 과정에서 왜곡과 변형이 일어나기 때문.
결국 문제는 사람에 따라 리얼하다고 느끼는 부분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리얼하다는 말에는 그것이 나에게 진실되게(가치있게) 느껴진다는 말도 함축돼있다. 어떤 이는 정밀하게 대상의 외형을 재현하는걸 리얼하다 말하고, 다른 이는 사람들이 이전에 느꼈던 감각을 일깨우고 환기시키는 걸 리얼하다고 말하며, 또 다른 이는 사회의 부조리함을 고발하고 폭로하는걸 리얼하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리얼리즘을 일단 사실주의로 번역하긴 하지만, 사실 현실주의, 진실주의, 실재주의, 실상주의 등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다. 왜냐면 어디에 레알(REAL)의 중점을 두는지는 순전히 작가나 독자 마음이니까.[2]
그 결과 현대예술가들은 사실상 자신만의 리얼을 찾아가는 여정이 되었다. '작가가 느낀 감정'도 리얼일 수 있고, '발자국 같은 흔적'도 리얼일 수 있으며, '어디선가 주워온 기성품'도 리얼일 수 있는 셈. 그러나 전반적으로 예술가들의 작업 철학의 배경에는 프랑스혁명 이후 사고방식이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건 분명하다. 모더니즘은 이전 예술과 달라지는 원인이 여기에 있는데, 한마디로 말하면 반항적(…)으로 바뀐다. 이전 예술이 기존 기법이나 법칙을 지키는데 주력했다면(예를 들면 사실적인 묘사 같은 것), 이후 예술은 그 사실적인 묘사가 허울이고 가식이라고 생각해 이를 해체해 버리려 노력했다. 겉보기만 사실적으로 보인다고 현실을, 실상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지배적인 사고방식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