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83년 11월 30일에 결성된 혼성 그룹이자 민중가요 노래패. 줄여서 '노찾사'라고 한다. 1980년대에 군부독재로 인해 민주화 투쟁이 많이 벌어졌고, 그와중에 1983년 가을 즈음에 서울 시내 여러 대학의 노래패들이 자연스레 모인 것이다. 그래서 초창기 멤버는 무려 23명이였다.[1]
1984년 아침 이슬로 유명한 김민기가 프로젝트 음반을 기획, 제작하였으나 정권의 탄압으로 여러 우여곡절을 겪었다. 공윤의 사전심의를 뚫고 정식발매를 목표로 하면서 여러가지 타협을 할 수 밖에 없었고, 애초에 기획자 김민기와 노찾사 멤버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른 음반이 되어버렸다. 이마저도 당시의 엄혹한 시대상황 때문에 판매량도 많지 않았다.
그러다가 6월 항쟁으로 민주화 분위기가 도래하면서 (비록 공윤의 사전심의는 그대로라도) 노찾사는 자신들의 음악을 온전하게 발표할 수 있게 된다. 이미 6월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을 거치면서 노찾사는 수많은 집회, 시위 현장과 대학내에서 수많은 현장공연을 하면서 자신들의 자작곡과 당대의 인기 민중가요들을 부르고 있었다.
1989년 2집이 발매되면서, 엄청난 대중적 반향을 일으키게 된다. 노찾사 2집은 발매 1년만에 최소한 80만장 이상이 팔린 것으로 추정되며, <솔아솔아 푸르른 솔아>, <광야에서>, <사계>를 비롯해서 거의 모든 노래가 대중적으로 히트하였다. 심지어 <사계#s-1.5>는 TV와 라디오를 막론하고 단 한번의 방송출연도 없이 KBS 가요톱텐 3위까지 올랐으며, MBC의 대학생 퀴즈 프로그램 '퀴즈아카데미'의 오프닝으로 쓰였다. 그외에도 학생과 노동자들의 집회, 시위 현장은 물론 다양한 장소에서 불리워지면서 노찾사 2집은 명반의 반열에 올랐다.
그 뒤에도 1990년대 내내 앨범 발매와 함께 투쟁현장을 찾아다니면서 꾸준히 활동했지만, 사회운동의 퇴조와 함께 노찾사의 대중적인 영향력도 시나브로 사그라들었다. 2000년 이후에는 새 노래보다는 간간히 모여서 공연을 하고 있다.
1980년대 초창기 서울 지역 대학 노래패들 중에서도 엄선된 멤버들이었기 때문에, 재능이 넘쳐나는 사람들이 많았다. 노찾사를 떠나서 개인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가장 유명한 이는 바로 김광석 그리고 안치환이다. 한국대중음악상 창설을 주도하고 최근엔 나는 가수다 심사위원으로 많이 알려진 김창남 성공회대 교수와 <살다보면>이란 포크송을 히트시켰던 권진원도 노찾사 출신이다.
2 음반
볼드체로 되어있는 곡은 그 음반의 타이틀곡이다.
2.1 1집 '노래를 찾는 사람들'
1987년 발매
- 01 갈 수 없는 고향
- 02 바람 씽씽
- 03 산하
- 04 내 눈길 닿는 곳 어디나
- 05 그루터기
- 06 일요일이 다가는 소리
- 07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08 기도
- 09 바다여 바다여
2.2 2집 '노래를 찾는 사람들'
1989년 발매
- 01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 02 광야에서
- 03 사계#s-1.5[2]
- 04 마른 잎 다시 살아나
- 05 그날이 오면
- 06 저 평등의 땅에
- 07 이 산하에
- 08 오월의 노래
- 09 잠들지 않는 남도
2.3 3집 '노래를 찾는 사람들'
1991년 발매
2.4 4집 '노래를 찾는 사람들'
1994년 발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