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 문서 : 대한민국/정치, 대한민국/역사, 제5공화국, 사회 운동 관련 정보, 항쟁
- 같은날 1926년 순종의 장례식날 벌어진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6.10 만세 운동 참조.
이 문서의 제목을 6월 민주 항쟁(으)로 바꾸자는 토론이 진행 중입니다.
이 문서가 6월 민주 항쟁(으)로 이동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어 본 문서에서 토론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토론에서 의견을 제시해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이 틀이 붙은 문서를 토론에서의 합의 없이 이동할 경우 문서 훼손으로 간주되어 차단될 수 있습니다. 토론의 합의에 따라 문서를 이동할 땐 문서 삭제식 이동을 하지 마시고 자체 문서 이동 기능을 이용하십시오.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의 역사 | ||||
5.18 광주민주화운동 | → | 6월 민주항쟁 | → | 대한민국의 민주화 (6.29 선언) |
파일:/image/pressian/2008/10/17/60081016175711.jpg |
아! 나의 조국[1][2][3]
목차
1 개요
호헌철폐! 독재타도! 민주쟁취!
종철아! 잘 가 그래이.. 아부지는 아무 할말이 없대이
이번 선거의 결과는 단순히 저 개인과 민주정의당의 승리가 결코 아닙니다. 이 시점에서는 더 이상 승자도 패자도 있을 수 없으며, 자랑스러운 우리 대한민국 국민이 있을 뿐입니다. 대결과 반목의 정치적 유산은 청산하고 민주 화합의 새 시대를 열어 안정 속의 선진국으로 비약할 것을 염원하는 성숙한 우리 국민 모두의 위대한 승리입니다.
노태우 당선인, 당선 소감을 밝히며.
1987년 6월, 전두환 정권의 군부독재에 저항하여 전국적으로 일어난 일련의 민주화 운동이다. 6월 항쟁, 6월 민주항쟁, 6월 민주화운동, 6월 민중항쟁 등의 이름으로도 불린다.[4] 당시 헌법 중 대통령 간접 선거 조항을 사수하겠다는 의사에 대한 반발로부터 촉발되었다. 이로 인해 5.16 군사정변으로부터 시작된 27년 간의 '제도적인' 군부독재는 종결되었고 '제도적인' 민주주의가 회복되었다. 제도적인이라는 말이 붙는 이유는, 민주화 선언 이후 직선제로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기 때문이다. 노태우 역시 하나회의 실세였으며, 노태우 정권 내내 여전히 정(政)·관(官)·군(軍)에 신군부(하나회) 출신 인사들이 실세 라인을 형성하고 있었다. 또한 1991년 대한민국 민주화 시위(1991년 연쇄 분신 파동)의 유혈 진압, 방송관계법 날치기 통과 등의 민주주의에 위배되는 행동도 했다. 그래서 실질적인 군부독재의 종식과 민주주의의 시작은 노태우가 퇴임하고, 하나회를 싹쓸어버린 김영삼의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3년부터 본다. 그리고 이후 1998년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대한민국 헌정 역사상 처음으로 평화적 정권교체가 된다.
6월 항쟁은 대통령 직선제를 비롯한 헌법과 정권의 개혁안을 발표하게 만든 사건으로, 이후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와 자유화의 물결이 본격적으로 대두되었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 9차 개정안이 지금까지도 1987년 체제라고 표현될 정도로 한국 정치, 법률 운영의 기초가 되고 있다.
2 진행
2.1 5월 이전
그 시작은 1987년 초에 일어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일명 '탁억사건' 이었다. 당시 운동권 선배 박종운의 행방을 캐묻기 위해 박종철을 연행한 경찰들이 그에게 물고문을 가한 끝에 박종철이 사망하자 경찰은 물고문 사실을 은폐할 목적으로 갖은 공작을 펼쳤다. 그래서 생겨난 희대의 망언이 "탁!" 하고 치니까 "억" 하고 죽더라[5]이다. 경찰의 발표는 심문 과정에서 실토하라면서 책상을 내려쳤는데 심장마비로 억 하고 죽었다는 것이었고(...) 이를 당시 언론에서 기사로 다루며 헤드라인으로 뽑아낸 문구가 바로 저 망언이다. 저 제목을 사용한 신문이 동아일보.[6][7]
그런데 박종철 사망 후 부검을 실시해본 결과 박종철의 시체는 수많은 피멍과 물고문, 전기고문의 흔적들이 역력했고 당시 부검의가 고문에 의한 사망임을 정식으로 확인하면서 사태는 일파만파로 커졌다. 국민들은 분노의 표시로 경적을 울리는 경적 시위를 하기도 했다. 결국 고문 경찰들을 처벌하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 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전두환 대통령은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여 개헌 논의는 곧 있을 서울 올림픽 끝나고 하자는 말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 논의를 묵살했고 국민들의 민심은 격앙되었다.
이때는 1980년에 대대적으로 체포되었던 신민당 출신의 정치인들이 5년만인 1985년에 다시 대거 사면되고 이들이 다시 신한민주당을 구성해 총선에서 제 1 야당의 자리를 차지한 이후의 시점이었다. 1985년부터 야당은 대통령 간선제 안에 대해 "헌법 개정 1000만 人 서명 운동"을 추진하는 등 개헌을 주장하고 나섰는데 여당에서도 이를 무시할 수 없어 대통령 간선제안에 대한 교섭을 진행하던 시점이었다.
민정당과 신민당 두 당이 제시한 개헌안의 내용은 구체적으로는 매우 달랐다. 여당인 민정당은 의원 내각제를 주요한 내용으로 삼은 반면 야당인 신민당은 대통령 중심제를 추구했다. 어째 여야 입장이 뒤바뀐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야권의 기세가 올라있는 상황에서 대통령 선거가 벌어질 경우 대통령 중심제에 의해 가해질 충격이 더욱 크다고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여권에서 대통령의 권한이 비교적 약한 의원 내각제안을 추진한 것이다. 이에 신민당 바지사장 총재 이민우가 호응하는 이민우 구상이 나오면서 신민당은 대분열 결국 김영삼, 김대중 세력이 일거에 탈당하여 새로 통일민주당을 창당한다.
대통령 취임 때부터 7년 임기를 마치면 무조건 떠나겠다고 약속해온 전두환은 퇴임 이후에도 실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내각제 개헌을 구상하고 있었다. 국회의원 공천권을 가진 집권당 상왕 총재로 후계자 노태우를 허수아비 국무총리로 세워서 좌지우지 한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큰 틀에서는 개헌을 위한 위원회가 여야의 만장일치에 의해 추진되고 있었다. 그런데 정부가 호헌 조치로 이 논의 자체를 뒤집어 버리자 직선제 개헌으로의 변화를 고대하던 국민들의 반발을 한 번에 받게 되고 만 것이다.
2.2 항쟁의 서막
그런 와중에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소속 김승훈 신부가 5.18 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미사에서 박종철 군의 고문치사 사건이 축소·은폐되었고 고문경찰은 모두 다섯 명이었다는 것을 폭로하면서 국민들의 분노는 더욱 상승했다. 이 발표된 과정이 매우 극적이었다. 당시 고문치사 사건 주범들은 사건 축소, 은폐로 자신들이 모든 죄를 뒤집어쓴 것에 대해 억울해하며 감방에서 소리를 질러댔다. 이것을 우연히 근처 방에 수감중이던 사회운동가 이부영[8]이 듣게 되어 교도관에게 문의했더니 박종철 사건이 은폐조작되고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흘러나온 것.[9] 이부영씨는 이에 크게 분노하여 관련 내용을 휴지에 써서 면회인을 통해 전달했고, 이것이 정의구현사제단에 전달되어 발표하게 된 것이다.
여론은 폭발했고, 이에 재야단체들이 뭉치기 시작했다. 5월 27일 향린교회에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약칭 국본)"가 결성되어 그간 분열되어 있던 민주 세력이 하나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국본은 6월 10일 민정당(민주정의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 전당대회 날에 맞춰서 박종철군의 고문치사 은폐를 규탄하는 집회를 서울을 비롯한 전국 22개 도시에서 열기로 했다.
이때 각 대학에서도 시위의 열기가 올라가기 시작했는데, 5월 말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뭉쳐 종로로 나왔다. 이 날 시위에는 이전과 달리 일반 학생들의 참여가 크게 늘었다. 그뿐만 아니라 종로에서 학생들이 단체로 드러누워 집회를 하다 경찰이 체포하려 하자 시민들이 항의하는 상황까지 벌어진다.
6월 초, 국본은 서울시내에 약 20만장의 전단을 뿌려 집회 사실을 홍보하기 시작했다. 각 대학에서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6월 9일. 전국 각 대학 학생들은 10일 집회 하루 전, 각 대학 교정에서 사전집회를 연다. 연세대학교도 예외가 아니어서 천여명이 노천극장에 모여 사전 집회를 진행했다. 그런데 사전집회가 끝나고 교문 앞으로 이동하면서 사건이 발생한다. 교외로 진출하려는 학생들에게 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했는데,규정을 무시하고 직사로 사격한 최루탄이[10] 연세대학교 학생 이한열의 후두부(뒤통수)에 직격한 것이다.
이한열은 쓰러졌고, 같은 학교 도서관학과 이종창이 겨우 부축해서 세브란스 병원으로 호송됐다. 그리고 피 흘리며 쓰러진 이한열을 이종창이 힘을 다해 부축하는 장면을 당시 로이터 통신 기자가 담아냈고, 이 사진이 뉴욕 타임스 1면과 중앙일보에 보도되면서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된다. 당시 중앙일보는 적당한 사진을 찾지 못해 로이터 통신에 사진의뢰를 했는데, 문제의 사진을 받았고 위험성이 큰 사진이었으나 사진부장이 코렁탕을 먹을 각오를 하고 사진을 키워 신문에 게재했다는 일화가 있다.[11] 해당 사진은 후에 AP통신 선정 20세기 100대 보도사진에 선정됐다.
파일:00394430601 20110610.jpg
한편 연세대학교에 경영학과 학우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뇌사상태가 됐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학교 전체가 뒤집혔다. 예비역 출신부터 운동권에 반감을 가지던 학생들까지 모두가 뭉쳐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을 지키러 나섰다. 당시엔 이런식의 과도한 공권력 사용으로 인해 사망한 자들의 시신을 경찰이 탈취해 강제로 부검한뒤 사망원인을 조작하여 책임회피하는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다. [12]
2.3 6월 10일, 항쟁의 시작
6월 10일 정부는 집회를 봉쇄하기 위해 별의 별짓을 다 했다. 12시에 선언문 발표가 예정된 성공회 대성당을 수 일전부터 봉쇄했으며, 당일 차량 경적시위에 동참할 것을 우려해 서울 시내버스와 택시의 경적을 제거했다. 또한 수도권 전철은 시내구간을 무정차 통과했으며, 단축수업, 조기 퇴근 등 수많은 조치가 나왔다. 또 봉쇄된 곳도 미리 또는 담을 타넘어 어찌어찌 진입한 사람들에 의해 12시에 사전 집회를 개최했으나, 경찰의 원천봉쇄로 국본의 간부들이 체포되었고 집회도 확산되진 못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후일담에 보면 이러한 조치 때문에 도리어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하게 된다. 회사는 일찍 끝났는데(조기퇴근), 집은 못가고(지하철 무정차), 서머타임으로 인해 날은 밝으니 자연스레 시위대에 합세할 환경이 갖춰진 것. 당시 시대상을 그린 만화 100℃에서는 조기 퇴근한 직장인들이 "이거 시위에 참가하라는 국가의 명령이겠지?"하고 집회를 막으려고 애쓰는 정부의 멍청한 대응을 비웃는 모습이 나온다(...). 사실 정부내 시위대를 응원하는 프락치가 시행한 조치라 카더라
그리고 6월 10일 저녁 6시, 서울시내 곳곳에서 집회가 일어난다. 국본의 방침대로 저녁 6시에 차량 경적을 신호로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것. 경찰이 시위대들을 보이는 대로 체포하는 가운데 일부 시위대가 명동성당으로 피신하면서 소위 명동성당 농성투쟁이 시작되었다. 이미 5월 이전부터 진행 중이었던 시위를 특별히 '6.10 항쟁', '6월 항쟁'이라고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참고로 이 날 MBC 뉴스데스크 보도를 유튜브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제1헤드라인이 민정당 전당대회 소식이고 이를 10분 넘게 보도하고 있다. 시위 소식은 3~4꼭지 뒤에 "서울 시내 몇몇 곳에서 소요가 있었지만 큰 충돌없이 끝났습니다." 라고 언급한다.(....) 하기야 곧이곧대로 말할 수 있는 형편도 그때까진 아니었다
2.4 명동성당 항쟁
명동성당에는 당시 故 김수환 추기경이 있었는데 김수환 추기경은 자신의 입지를 활용해 시위대를 잡으려는 경찰을 막아주었다.
수녀들이 나와서 앞에 설 것이고, 그 앞에는 또 신부들이 있을 것이고, 그리고 그 맨 앞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나를 밟고 신부들을 밟고 수녀들까지 밟아야 학생들과 만날 것이다.
추기경이 거부하는 상황[13]에서 성당에, 그것도 주교좌 성당인 명동성당에 함부로 경찰을 투입해서 사람을 잡아간다는 것은 세계 가톨릭계 전체에 도전하는 일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무소불위의 국가 권력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손을 뻗을 방법이 없었다. 거기다 전두환이 벌인 최대의 쇼인 19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자칫 유럽이나 남미의 가톨릭 국가들이 올림픽을 보이콧을 할 가능성도 높았다. 실제로 교황청은 명동성당 내로 공권력이 투입되거나 시위 진압에 군이 동원될 경우 서울 올림픽에 대한 전면적 보이콧을 검토했다고 한다. 이게 현실이 되었다면? 88올림픽은 그대로... 결국 명동성당에 공권력을 투입할 수 없게 되었다.[14]
국민들은 명동성당 안의 시위대에게 호응하면서 헌금의 형식으로 필요한 물품들을 보내주는 등 지지를 표시했다. 여담으로 명동성당 농성 당시 조영래등 인권 변호사들이 시위대와 합류하기 위해 명동성당에 접근을 시도하였는데, 양복 정장을 착용한 변호사들의 복장을 경찰들이 정부 관료로 오인하여 처음에는 달리 제지하려 들지 않았다. 허나 곧 상황을 파악한 경찰들은 재빠르게 접근을 막아세웠고 변호사들의 접근 시도는 불발에 그쳤다. 당시의 변호사들이 남긴 회고록 등에 나오는 이야기.
2.5 항쟁의 진행
이한열군의 중상으로 경찰이 무차별로 쏘아대는 최루탄에 반대하는 최루탄 추방대회가 6월 18일 전국 각 도시에서 열렸다. 이 때의 시위 참가자 규모는 150만명으로 추산되었으며 이에 당황한 전두환 정권은 계엄령 선포까지 검토할 정도에 이르렀다. 실제로 군의 투입을 거의 결정한 단계였다는데 19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경찰총수였던 권복경 전 前 치안본부장은 동아일보와 단독으로 한 인터뷰에서 이런 사실을 밝혔다.
각하(전두환)는 1987년 6월 시위대가 부산 거리를 가득 메우자제 버릇 개 못주고군대를 투입해 진압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국가가 뒤집힐 수 있는 결정이었습니다.
권복경 치안본부장은 "좀 심각하지만 경찰력으로 책임지고 막겠다" 면서 전두환을 설득하여 즉각적인 군 투입은 막았다. # 그러나 6월 19일 군부대 투입을 통한 무력진압을 실시하기로 최종결정이 났으며 수도권 외곽에 주둔중이던 충정부대[15]들을 서울 외곽지역에 집결시켰다. 당시 전차병 출신의 증언에 의하면 이미 출동 준비를 마치고 서울 진입 명령만 기다리고 있던 상태였으며 수방사 소속 병사들 역시 출동준비를 이미 끝마친 상태였다고 한다. 즉 명령만 내려지면 바로 투입할 수 있게 한 것. 그리고 정부는 청와대출입기자들에게 19일 밤 10시 대국민담화를 발표할 것이며 이와 동시에 군부대를 투입하여 무력진압으로 소요사태를 종결할 것이라고 통보하였고 기자들은 이 내용을 본사에 정보보고를 하였다.
이는 경찰력이 시위 통제에 완전히 실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권복경 치안본부장이 어떻게든 경찰력으로 책임지겠다고 말하긴 했지만, 이는 군 투입이라는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한 발언이었을 뿐, 당시 경찰력의 한계는 누가 보아도 명백했다. 서울의 급증하는 시위대를 막기 위해 지방의 경찰력을 계속해서 소환했으나 역부족이었고, 오히려 지방의 경찰력 공백만 불러오는 실정이었다. 그리고 지방의 시위는 서울과 달리 과격성을 띄고 있었다.
몇몇 사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6월 10일 경남 마산에서는 양덕, 자산동[16] 2개 파출소가 전소되었고 민정당 국회의원 우병규의 사무실이 습격받아 전두환과 우병규의 사진에 대한 화형식이 거행되었다. 또, 순찰차나 전경버스같은 경찰차량, 안기부 직원의 차량, KBS와 MBC의 보도차량도 분노한 시위대에 의해 습격받아 전소되었으나, 경찰력은 이를 막아내지 못하고 방어에 급급해야 했다.
- 6월 16일, 경남 진주에서도 시위대에 의해 파출소 4곳이 공격받아 불탔다.
- 6월 26일 경기 안양에서는 시위대에 의해 경찰관사와 안양파출소가 공격받아 불에 탔고, 민정당 안양지구당도 마찬가지로 전소되었다. 노동부 안양출장소도 사측 편만 든다는 노동자들의 분노가 시위에 담겨지면서 같이 공격받아 불타올랐다. 그리고 안양 경찰은 패퇴했다.
대전에서는 중앙로서 대전산업대(현재 한밭대)생과 한남대생이 보도블럭을 까서 경찰들에게 던졌다
이런 상황에서 전두환은 군부를 통해 구체적인 병력 동원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 6월 17일, 작전명령 제 87-4호가 의한 병력동원 계획이 정식 수립되었다. 비상계엄령 선포 후, 후방을 담당하는 2군이 중심이 되어 각 지역의 위수군단 군단장이 지역별 계엄사령관을 맡으며 부산경남지구와 충남북지구를 특히 핵심지역으로 설정하였다. 또, 전방에서 4개 사단을 차출하고 특전여단 6개와 해병연대 2개, 그리고 각 군단 직할대인 특공연대 4개를 동원해 서울을 중심으로 부산, 마산, 대전, 대구 등 시위가 거센 곳에 집중 배치하기로 하였다. 육참총장 박희도는 철도청과 병력동원을 위한 열차수송계획의 협의까지 마친 상태였다.
무력진압에 대한 정보는 당연히 시위 지도부에게도 전달되었으며 시위 지도부는 유혈사태에 대비하여 비상연락망을 가동하고 길거리에서 시위하는 시민들 틈에 섞여서 연행당하는 것을 최대한 늦추기 위한 대비를 하였다.
2.6 미국의 지지, 군부의 반대
한편 주한미군 정보부대에서는 19일 오전에 한국군이 무력진압에 대비하여 병력을 동원하고 있다는 징후를 포착하였다. 청와대에서 19일에 주한미군에게도 무력진압을 위한 군부대 이동을 통보하라고 지시는 내려갔지만 정작 한미연합사령부에 통보되진 않았다.
CIA 한국 지부에서는 6월 20일 새벽 4시에 강제진압을 할 것이라는 구체적인 첩보를 입수하였고 5.18 민주화운동 이후 강한 반미 감정과 군부대 투입의 악영향을 경험한 미국은 한국군의 무력진압을 저지하기 위하여 CIA가 주한미군의 협조를 받아 전차 5대를 차출하여 수도방위사령부와 육군특수전사령부 등 한미연합사령부의 통제하에 있지 않고 한국이 단독으로 움직일수 있는 부대들의 정문에 전차를 보내 무력시위를 함으로써 한국군에게 압력을 넣었다. 이 행동은 효과를 발휘하여 진압부대의 출동을 저지하는데 성공하였다. 당시 진압군으로 참가했던 일부 예비역 장병들의 증언에 나오는 주한미군 전차와 한국군 진압부대가 부대 정문에서 대치하였다는 이야기는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6월 20일 오후에 제임스 릴리 주한 미국대사가 청와대를 방문하여 전두환에게 미국 국무부의 친서를 전달했는데, 그 내용인 즉슨 계엄령 선포하는 순간 한미동맹은 끝난 줄 알아라. 군부대 동원해서 민주화 운동 진압하면 전두환을 날려버리겠다는 경고나 다름없었으며, 결국 전두환은 군 투입 명령을 입밖에도 꺼내지 못함으로써 5.18 민주화운동의 비극이 다시 벌어질 뻔한 위기를 막는데 성공하였다. 앞서 말했다시피 이미 주한미군이 계엄군을 직접 막기 위한 사전준비를 다 마친 상태였다. 만약 전두환이 미국 무서운 줄 모르고 계엄령을 선포했으면 그땐(...) 민주주의 배달 완료
또한 군 내부에서도 시위 진압에 대해 반대 여론이 압도적이었기에 작정하고 진압을 명하면 오히려 그 군인들이 시민들의 편을 들어 청와대로 쳐들어갔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더군다나 전두환이 믿고 있던 군부조차 무력 진압에 회의적이었다. 말단의 사병들, 위관급 장교들, 부사관들은 진압작전에 투입된다는 소문에 회의감과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지휘부였다. 특히 당시 소장~중장급 실전부대 지휘관들이 이에 반대, 병력투입에 찬성하고 있던 대장급 지휘관들을 당혹하게 만들었다.
특히 가장 격렬하게 반대한 것이 고명승 보안사령관과 민병돈 특전사령관이었다. 둘은 육사 15기로 해당 기수 하나회의 대표주자였으며, 고명승은 12.12 당시 청와대 경호실 소속에서 쿠데타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그런 둘이 전두환에게 반기를 든 것이다. 민병돈은 유사시 예하 부대의 진압 동원에 반대하겠다는 뜻을 고명승에게 밝혔고, 고명승은 이 의견을 전두환에게 전달하였다. 보안사와 특전사는 12.12 당시 전두환이 쿠데타에 성공하는데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한 곳들로, 전두환으로선 상당히 당혹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17] 12.12 군사반란 당시 절대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것은 보안사도 보안사지만 실병력들을 동원했던 소장, 준장급 지휘관들의 역할이 컸다. 당장 3개 공수여단과 20사단, 9사단 병력들이 서울로 들어올 수 있기에 쿠데타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6월 항쟁에는 이 실질 병력들을 동원할 수 있는 지휘관들이 선봉에서 반대했다는 점에서 이전과는 다를 수 밖에 없었다. 특히 미국이 매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기에 미국의 관할 밖에 있는 특전여단들이 진압작전의 핵심이었으나 특전사령관부터가 반대하고 나섰으니 대략 난감했을 것이다. 게다가 87년 당시에는 12.12 쿠데타 당시 특전사령부가 쉽게 넘어간 것을 교훈삼아 707특임대가 특전사령부 영내에 주둔중이었기 때문에 특전사령관을 쉽게 제거할 수도 없었다.
당장 전두환의 측근들조차 대놓고 직선제를 수용하라고 권할 정도였으며, 전두환 본인이 생각보다 의외로 쉽게 직선제를 수용한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 미국 상원에서도 대한민국 민주화 결의안을 통과시키며 민주화에 힘을 보탰다.
2.7 독재정권의 항복
1987년 7월 9일 서울에서 열린 故 이한열 군의 장례식 행렬.[18] |
결국 국민들의 거센 저항에 전두환 정권은 타협을 택했다. 6월 29일, 노태우 후보의 직선제 수용 선언(6.29 선언)으로 야권의 요구를 받아들이기에 이른 것이다. 6월 항쟁의 마지막은 7월 9일 서울에서 열린 이한열군의 장례식으로 끝났는데, 이 때 무려 100만여명의 시민들이 참여했다.
이런 엄청난 규모의 시위로 번지게 된데에는 대학교를 졸업한 도시 봉급자(화이트칼라)를 중심으로 한 신흥 중산층들의 참여. 이른바 넥타이 부대가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때마침 낮이 가장 긴 6월인데다 서머타임 시행으로 저녁 9시까지도 햇빛은 쨍쨍하고, 시위가 진행되는 서울 도심 한복판(특히 서울 지하철 2호선)은 지하철 운행을 중단 혹은 무정차 통과해 시위 참여의 좋은 명분을 만들어주었다. 강남의 아파트촌까지 소등 형식으로 시위가 진행되었다. 음식점 주인들과 아줌마들은 시위에 참가하는 시민들을 위해 김밥을 싸주며 시위에 박차를 가하였고, 넥타이 부대들을 비롯한 시민들이 시위를 막고 있는 전경들에게 장미꽃을 꽂아주었다.[19] 그야말로 남녀노소와 지역과 빈부 격차를 떠나 거국적인 여론이 흔들리는 것이었다.
이 6월 항쟁의 결과물로 대한민국 역사상 아홉 번째의 개헌이 이루어졌다. 직선제를 담고 있는 이 헌법은 1987년 10월 27일 국민투표를 통해 확정되면서 제6공화국으로 개헌된다.
6월 항쟁은 사실상 수십년에 걸친 군부독재를 국민의 힘으로 청산시킨 사건으로 평가된다. 국민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독재를 연장하려고 했던 전두환 정권을 사실상 굴복시켰으며 민주화를 달성한 분기점으로 평가된다.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1987년 체제라는 말을 쓸 정도로 정치적, 헌법적으로는 분명 현재까지도 한국은 제6공화국에 의해 굴러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1987년의 민주화는 경제적인 여건에 관계없이 국민들의 정치적 열망으로 민주화를 요구했다는 의의가 있다. 앞선 대대적인 민주화 운동의 경우 4.19 혁명의 배경으로 50년대 말 원조 감소로 인한 경제의 혼란이, 박정희 - 전두환 정권 교체기 부마민주항쟁과 서울의 봄, 5.18 민주화운동 등의 배경으로 제2차 오일 쇼크로 인한 경제의 위기가 영향을 미쳤다는 지적은 이미 다각적으로 분석되고 있다. 즉, 경제적인 변화가 정치에 간접적으로나마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한국 정치사에서도 실증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1987년 민주화의 경우, 3저 호황을 등에 업고 한국 경제가 순항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위신과 외교적 요소, 1988 서울 올림픽의 영향이나 미국의 동의 여부 등 앞서 다룬 요소들에 의해 민주화가 이루어졌다.
3 양김의 분열과 군부 정권의 잔재
- 관련항목 : 제13대 대통령 선거
개헌 이후 대통령 직선제가 16년만에 부활하여 직선제 선거가 치러진다.
이랬던 그들이[20] | 이렇게 돌아섰습니다.[21] |
역대 선거정보 시스템에 의하면 1987년 대선 결과
노태우(8,282,738표, 민주정의당) - 36.6%
김영삼(6,337,581표, 통일민주당) - 28.0%
김대중(6,113,375표, 평화민주당) - 27.0%
김종필(1,823,067표, 신민주공화당) - 8.1%
신정일(46,650표, 한주의통일한국당) - 0.2%
홍숙자(사회민주당), 김선적(일체민주당), 백기완(무소속) - 중도 사퇴
야당후보였던 통일민주당 김영삼과 평화민주당 김대중의 단일화가 좌절되고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으로 인한 북풍으로 인해 야권이 축소되어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하나회 인사에 의한 정치는 5년 동안 더 지속되었다. 다만 이러한 배경으로 당선된 노태우의 득표율은 대통령으로서 사상 최저였으며 당선 이후에도 13대 총선에서 과반확보 실패로 여소야대 국면을 맞게 되었다. 이후 노태우는 김영삼, 김종필을 끌어들여 3당 합당을 감행함으로써 여소야대 국면을 극복하게 되고 이로 인해 기존 정권의 색채는 계속 유지된다. 이때문에 6월 항쟁을 가리켜 '절반의 성공' 으로 지칭하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이미 크게 치솟은 개혁의 물결을 묵살할 수는 없었으므로 민주화와 자유화, 그리고 냉전 붕괴에 의한 공산권과의 수교 등(이른바 북방외교)은 활발히 진행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1988 서울 올림픽에 전두환이 공식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백담사에 칩거한다든가, 5공 청문회가 열린다든가 하는 기존 정권에 대한 매우 공격적인 상황도 계속해서 벌어졌던 것은 사실이다.
한편 1987년 선거는 지역대결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첫번째 선거이기도 했다. 노태우 후보는 대구, 경북, 강원, 인천, 경기에서, 김영삼 후보는 경남과 부산에서, 김대중 후보는 전남과 전북, 광주, 서울에서 김종필 후보는 충남[22]에서 각각 득표율 1위를 기록했다. 물론 지역감정을 이용한 선거의 기원은 어디까지 잡겠다고 말하는 데도 다양한 논의가 있을 정도로 60년대 후반 혹은 70년대 초반부터 조짐이 나타나지만 각 후보자들의 연고지와 그 인근에 다득표지가 집중된 것이 1987년 선거에서부터 유독 눈에 띄었으며 이것이 현재 대한민국 정치에도 큰 틀에서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87년에 있었던 6월 항쟁과 개헌, 대선 등을 통해 확립된 각 정당과 정파의 합종연횡, 정치 체제, 선거에서 드러난 지역구도, 대중에게 각인된 정치 의식과 사회 의식, 세대 의식 등의 다양한 개념등을 통틀어 흔히들 '87년 체제' 라 칭한다. 이 '87년 체제' 는 비단 정치 구도를 칭하는 범주를 벗어나 한국 사회 전반의 구조와 형태를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4 과거사 청산과 민주화의 재조명
6월 항쟁을 계기로 과거사 청산운동, 과거사 진상규명을 비롯해 오랜 세월 동안 금기시 당한 사건과 인물들을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진보진영 일각에서는 6월 항쟁으로 국민들의 직접선거에 의한 대통령 선출과 헌법 정신으로 권력을 견제하는 헌법재판소의 탄생 등이 이뤄졌지만 이는 정치적 민주화에 한정된 것이었고 경제적[23], 사회적 민주화에까진 이르지 못했다라는 분석도 존재한다. 그런 시각하에서 1987년 체제의 한계를 논하는 여러 논의들이 있긴 하지만 애초에 하나의 항쟁으로 모든 것을 쟁취해야 한다는 의식 자체가 착각인 것이고 당시 한국에서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정치적 민주화였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여하간 6월 항쟁이 민주화를 이룩한 결정적 사건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
5 기타
6월 항쟁 당시 친정부 어용, 왜곡언론이라는 이유로 경향신문 뭉치가 서울역 앞에서 화형당하기도 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당시의 기준이다. 이후 신문사의 주주가 바뀌면서 성향이 바뀐 사례.
이걸 다룬 만화로는 최규석의 100℃가 있다. 물이 99℃까지는 온도가 올라도 아무런 변화가 없지만 100℃가 되면 기체가 되는 것처럼 6월 항쟁을 그때까지의 민주화운동이 계속 벌어지다가 임계점에 이른 것을 100℃에 비유한 제목(만화 내용에 나온다. 링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만화를 볼 수 있다).사실 100℃가 되는 순간 갑자기 끓는게 아니고 거기서 열이 가해져야 끓는건데 열이 가해졌잖아 조기퇴근에 지하철 무정차 통과에 많이도 가했네
6월 10일에 있었던 민정당 전당대회는 호헌조치가 내려진 상황에서는 사실상 다음 대통령을 지명하는 자리였고, 이때 노태우가 지명된다. 그리고 이 과정을 생방송으로 중계하고 막간 공연을 하였던 곳이 MBC였다. 당시 MBC 소속 코메디언 가운데 가장 인기를 끌던 이가 원고에 쓰여있던 '민정당은 국민에게 정을 주는 정당이고, 통민당은 국민에게 고통을 주는 정당'이란 글을 그대로 읽었다. 이 표현에 대한 분노와 배신감은 하늘을 찔러서 이 코메디언은 이후 사실상 연예인 생명이 끊어지게 되는데, 그가 바로 배추 김병조이다.
이 당시 노래를 찾는 사람들을 필두로 한 각종 노래패들과 그들이 만든 민중가요가 시민들 사이에 급속도로 퍼져나갔고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나 사계 같은 곡은 지금도 유명하다. 안치환 등의 가수는 6월 항쟁을 기반으로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워게임: 레드 드래곤에서 6월 항쟁을 바탕으로 한 대체역사 캠페인이 등장한다. 초기는 역사와 동일하지만 6월항쟁 중반부터 이때를 적화통일의 기회로 본 김일성이 간첩을 투입, 대규모 혼란을 유발시킨다. 전두환은 이를 진압하기위해 군대를 동원하지만 결국 1980년 광주때 처럼 군대가 시민들을 향해 발포하는 사태까지 일어나고 엄청난 사회적 혼란이 생기게 된다. 이를 틈타 북한은 남침을 개시한다. 사회적 혼란 때문에 북한의 공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국군과 주한미군은 부산 근방까지 밀리게 되고 부산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형성, 미군의 증원을 기다린다.
대체역사소설 <10월의 폭풍>은 6월 항쟁의 끝무렵 김영삼을 모델로 한 야당 지도자가 암살당하면서 다시 시위가 불이 붙어 정국이 혼란해지고 정부의 진압도 과격해지는 가운데, 군 일각에서 이에 반발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제5공화국을 종식시키면서 전두환은 스위스로 망명하고, 쿠데타 세력이 새로운 군사정권을 수립한다는 가정으로 전개된다. 이 군사정권이 외교적 수완을 발휘해 쿠데타에 반대해 서울올림픽을 보이콧 하려던 움직임도 달래고, 오히려 올림픽을 성공리에 개최한 후 1990년대 초 민정이양을 위한 선거와 김대중이 모델인 야당 지도자를 둘러싼 암살 음모가 소설의 본격적인 배경이다.
마산에서는 이집트와 한국 대표팀간의 축구 경기가 있었는데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쏜 최루탄 연기가 경기장으로 날아들었다. 당시 최루탄에 익숙했던 한국 선수들과 관중들은 큰 동요가 없었지만 그렇지 않은 이집트 선수들중 다수가 소리를 지르며 쓰러졌다. 주심은 해당 경기를 재개할 수 없다는 판단하여 몰수무를 선언하고 경기를 종료 시켰다.- ↑ 보도사진연감 1988년판에는 쏘지 마시오라고 써져 있다
- ↑ 1987년 6월 26일, 부산 문현로터리, 한국일보 고명진 사진기자가 촬영. 고명진 기자는 훗날 '흔들리는 나의 조국' 을 보았다고 술회했으며 셔터를 눌렀을 때 전율을 느꼈다고 한다. 평생의 특종이 될 것을 셔터 누르는 순간에 직감했다고. 이 사진은 1999년 AP통신이 선정한 20세기 100대 보도사진에 선정되었다. 당시 그곳에서 개최되었던 "평화대행진" 행사 도중 한 시민이 웃통을 벗어던지고 "최루탄을 쏘지 마라!" 고 외치며 뛰어가는 장면이다. 참고로 사진에서 뛰어가는 시민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많은 언론사들과 기자들이 백방으로 수소문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고. 간혹 위 사진을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의 사진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도 있는데, 광주 민주화 운동의 대표 사진으로는 아버지 영정 사진을 들고 있는 어린 아이의 모습이 유명하다.
- ↑ 참고로 이 동네(문현로터리)는 반 5공 시위의 단골 장소여서, 부산 시민들끼리는 이 동네 이름 전포동을 두고 '전두환도 포기한 동네라서 전포동이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 ↑ 교과서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표현은 "6월 민주 항쟁"이다.
- ↑ 중앙일보,경찰조사 받던 서울大生 숨져, 1987년 1월 16일
- ↑ 이와 관련된 고바우 영감 만화 일화가 있다. 당시 정부에서 "박종철 군에게 아무런 고문도 가하지 않았는데 쇼크사했다."라고 발표하자 고바우 영감이 "그럼 왜 온 몸이 멍투성이였소?"라는 질문에 "아무튼 쇼크사했다."라고 반복하자. 갑자기 고바우 영감이 "억!"하고 안색이 파래지더니 " 내 심장도 이상해진다."라고 하면서 가슴을 부여잡고 병원으로 달려가는 장면을 원고로 냈는데 이게 정부검열에 걸리고 말았다. 고바우 영감이 한 질문 중 왜 온 몸이 멍투성이었느냐란 대목이 걸렸던 것. 결국 신문에는 "그럼 왜...?"라는 것으로 대신 실린다.
- ↑ 조중동 중 하나인 그 동아일보 맞다. 물론 (따지고 들어가면 이래저래 복잡하겠지만) 가장 의구심이 강했던 사망 원인에 대한 경찰의 발표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니 이것만으로 정치적인 어떠한 판단을 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당시의 동아일보는 親 김대중 신문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야당색이 강했다. 그러나 그래봐야 조선일보, 동아일보, 한국일보, 중앙일보, 서울신문, 경향신문의 6대 중앙일간지 중에서 비교적 야당 쪽에도 지면을 할애해서 유연하게 써주는 정도였지 지금의 한겨레와 경향신문 같이 확실한 진보언론은 아니었다. 그랬다가는 군사독재 정권 치하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으니까.
- ↑ 나중에 서울 강동구갑에서 3선 국회의원을 지낸 그 분 맞다.
- ↑ 교도관의 이런 모습이 다소 의아할 수도 있지만 의외로 당시 교도관 중에는 심정적으로 민주화 운동에 동조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저 교도관의 경우는 이부영에게 선생님이라는 호칭까지 써가며 예의를 갖췄다고.
- ↑ 본래는 45도 위로 세우고 발사해야한다
- ↑ 하지만 이 당시 상황이 워낙 긴박하게 돌아가다보니 정작 안기부에서 코렁탕을 배달할 여유가 없었다(...). 언론사 간부를 모셔다가 쪼인트 날릴 생각을 하는 와중에 시위대가 계속 불어났기 때문.
- ↑ 이런 관행은 현재도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2016년의 백남기 농민 시신 부검 논란도, 적어도 유족들과 민중총궐기 당사자들에게는 이러한 의도로 비춰지고 있다.
- ↑ 비장한 어조로 느껴지지만, 의외로 실제 말할 당시에는 담담한 말투였다고.
- ↑ 반면 김영삼 전 대통령은 95년 한국통신(現 KT) 노조 파업 당시 민주국가에 성역이 어딨나라는 일갈과 함께 명동성당과 조계사에 경찰을 투입하여 시위대를 체포하였고, 이에 국민들은 95년 6월의 지방선거에서 당시 여당이던 민자당에 대패를 안겨주는 것으로 대답하였다.
- ↑ 제17보병사단, 제20기계화보병사단, 제30기계화보병사단 등 서울 주변에 있는 부대로 유사시 시위진압에 투입될 수 있는 부대. 유사시라는 말에서 알 수 있지만 계엄과 쿠데타 등과 관련된 일에 동원되기 때문에 충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 ↑ 참고로 양덕동은 4.19 당시 허허벌판 논밭이었지만 자산파출소는 3.15 때도 불탔던 곳이다. 불탄 정도로 끝난 게 아니라 아니라 3.15 때 경찰 발포로 사상자가 난 지점이 바로 이 곳이었다.
- ↑ 후일 민병돈은 진압명령이 강행되었을 경우, 예하 부대를 동원해 쿠데타를 일으켜 청와대를 점령할 각오까지 했다고 회고하는데, 시일이 꽤 지난 다음의 회고라 자기 포장용 뻥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가 무력진압에 반대한 것 자체는 사실이다.
- ↑ 무려 100만여 명의 서울 시민이 참여하였고 발인 행렬이 출발한 연세대학교의 신촌거리부터 종로 일대까지 행렬로 가득 채워졌다. 사진의 배경은 연세대학교이다.
- ↑ 맨 위의 동영상 10분 20초 부근에서 경찰관도 대한민국의 국민입니다.라는 부분이 나온다.
- ↑ 주변 보좌관들은
둘의 성적 지향을 의심할 정도로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해당 사진처럼 손을 맞잡는 경우는 늘상 있는 일이었고 기쁜 일에는 서로 얼싸안기를 수 번, 길을 가다가 서로 멀리서 상대를 발견하면 너나 할 것 없이 상대의 앞으로 달려가서 반갑게 인사했다고 한다. 이런 절친 오브 절친이었으나...결국 갈라져버렸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사망할 때가 되어서야 김영삼 전 대통령이 입원실로 찾아와 화해의 제스처를 남겼다. 기사. - ↑ 두 사진을 보면 그들의 측근들의 밝은 표정(좌)과 어두운 표정(우)이 서로 대비되는 모습이 두드러지게 보인다.
- ↑ 충북에서는 노태우, 김영삼에 이어 득표율 3위를 기록했다.
- ↑ 다만 1987년 7~9월 경에 이른바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나 다수의 노조가 결성되기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