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경상남도 창녕군 출생,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를 졸업했고, 동대학원 국사학과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석사학위 취득 이후 계명대학교 사학과 조교수를 거쳐 1981년부터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2014년 8월에 서울대 교수직에서 정년퇴임하였다. 서울대 역사연구소 소장,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백제사 연구로 유명한 노중국과 더불어 오늘날 한국 고대사학계의 거두로 손꼽히는 학자로, 한국 고대사 연구에 있어 오늘날까지도 통용되는 이론적 기틀을 잡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학부생 시절부터 쓴 논문이 학회지에 실리는가 하면, 이미 불과 20대 중반의 나이였던 1975년에 삼국사기 초기 기사의 긍정론을 전면적으로 비판하는 한편, 삼국의 형성 과정에 있어 여러 부족의 연합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이른바 부체제론의 이론을 정립하여 석사 논문에서 발표하며 학계에 일대 파장을 불러왔다. 비록 많은 비판이 있기는 하였으나 부체제론 자체는 초기 삼국의 형성 과정을 설명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학설이 되었고, 오늘날 고대사학계에서는 정설로 통하고 있다.
한편 이전까지만 해도 유적답사나 고고학적 연구가 불가능한 탓에 남한 학계에서 미지의 분야로 취급받았던 고구려사 연구에 관련해서 많은 저술을 발표하여 오늘날 남한에서는 고구려사 연구계의 대표적인 권위자로 거듭났다. 또한 이병도-이기백의 서울대 한국고대사 라인의 2세대이다. 환빠들에게는 식민사관 계승자 서울대 부임 이후 수많은 제자들을 키워내며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다만 박사학위는 선배격인 한영우 교수처럼 늦어서 1999년에야 받았다.[1][2] 당시 박사학위로 제출했던 논집이 바로 대표적인 저작인 <고구려사연구>이다. 이미 정년퇴임을 했거나 2012년 현 시점에서 정년 퇴임이 멀지 않은 교수들의 경우 석사학위 취득 후 일찌감치 교수로 자리잡은 경우가 많았다. 그 때문에 박사학위를 나중에 취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아예 박사학위를 포기한 교수들도 종종 나왔다. 1999년에 서울대는 석사학위에 머물러 있던 본교 출신 현직 교수들에게 학위 취득이 가능하도록 일련의 조치를 취했다. 그래서 역사학 교수의 경우 노태돈 교수를 비롯해 김준형(경상대), 나현수(강원대), 문철영(단국대), 신동하(동덕여대), 안병욱(가톨릭대) 교수 등이 뒤늦게 박사가 되었다.
서강대학교 사학과의 거두 이종욱 교수와는 학문적으로 충돌하는 사이로서, 화랑세기 진위 여부를 놓고 이종욱 교수가 현존하는 화랑세기 필사본을 진본이라 여기는 반면, 노태돈 교수는 위작으로 보고 있다.[3][4] 그리고 초기 한반도 고대국가, 특히 삼국의 형태에 대해서도 노태돈 교수는 삼국사기의 초기 삼국 기록의 신뢰성을 의심하면서 이에 삼국지 동이전의 사료 또한 참조하면서 초기 국가들을 부체제의 연합국가적 성격으로 보고 있는 반면, 이종욱 교수와 서강대 학파는 삼국이 초기부터 강력한 왕권 하에 있었다고 본다.
노태돈 교수의 연구 범위는 고조선에서 시작하여 고구려와 신라의 국가운영, 문화, 대외관계 등 고대사의 전반에 걸쳐있어, 한국고대사를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절대 지나칠 수 없다.
트리비아로, 엄청난 유명세에 비해서 의외로 강의력은 별로다. 눌변이라 도무지 집중하기 쉽지 않기 때문.[5] 그러나 포스가 어디 가는 건 아니니까 자세히 집중하고 들으면 많은 걸 얻을 수 있다. 교양강의의 경우 뭐 이런 수업이 다 있냐고 성을 내다가 저 분이 그렇게 유명한 분이었어? 라고 놀라는 꼬꼬마들을 학기 당 몇 명씩은 보게 된다. (이를테면 '우리민족의 형성' 과목 이라거나)
이덕일은 이런 사람까지 식민사학자로 몰아세운다.[6] 더욱 무서운건 그런걸 다룬 책이 많이 팔렸다는 것이다! [7]
- 주요 논저(단독저서)
『고구려사 연구』(사계절, 1999)
『예빈도에 보인 고구려』(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한국고대사의 이론과 쟁점』(집문당, 2009)
- ↑ http://media.daum.net/breakingnews/newsview?newsid=19990906093100657
- ↑ 동년배에 경력도 비슷한 노중국이 86년도에 <백제정치사연구>로 박사 학위를 딴 것과는 대조적이다.
- ↑ '화랑세기'의 발견과 진위논란에 대한 비사가 있다. 최초 발견(1988년) 1년 전, 경남 김해에 살던 김종진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집에 한적(漢籍)을 산더미같이 쌓아 놓고 하루 종일 한문과 씨름을 하던 사람이었다. 유치원 원장을 하던 그의 부인이 아들의 돌 잔치 선물로 아버지의 책 중 1권을 주었는데, 당시 경상일보 기자와 연이 닿아 그 기자가 번역을 해보니 김대문의 '화랑세기'였던 것이다. 이 소식을 듣고 서울대 국사학과의 노태돈, 김태식, 송기호가 김종진을 찾아갔다. 김종진의 집에서 이를 대충 훑어본 세 사람 중 송기호는 진서, 나머지 두 명은 진위 여부를 말하지 않았다. 이후 김종진이 죽자, 노태돈이 그 집을 다시 찾아가 미망인의 허락 하에 김종진의 집에 있는 한적을 모조리 조사했다. 그로부터 얼마 뒤, 한 학회 발표현장에서 서강대 이종욱 교수가 '화랑세기는 진짜'라는 주장을 펼쳤는데, 총 발표일정 3시간 중 2시간을 사용했다. 발표가 끝난 뒤, 노태돈이 김종직의 '만년필 필사본'을 공개했다. 이 '만년필 필사본'은 '화랑세기' 분량의 3배로서 이를 3분의 1로 줄인 것이 '화랑세기'였던 것으로, 화랑세기가 김종진에 의해 지어진 위작이라는 증거로 노태돈이 이 필사본을 제시한 것이다. 이에 빡친 이종욱 교수가 성질을 내며 그 필사본을 받아 돌아갔는데, 이후 이종욱은 이 필사본을 연구한 뒤, 이종욱은 화랑세기가 더욱 진짜라고 믿게 되었다 한다(;;;)
- ↑ '화랑세기'가 위작이란 근거는 상당한데, 해당 항목에 이미 기재된 위작 근거에 좀 더 추가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최초 발견(김종진 집, 일본식 한적이 매우 많았다고 한다)시 책을 묶은 실의 갯수와 종이의 크기가가 우리나라 것이 아닌 일본식 한적이었다. 2. 필적을 대조해보니 최초 발견본은 김종진의 스승인 박창화의 글씨였는데, 박창화는 일본왕실도서관인 '서릉원'에서 근무하며 이를 일본에서 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3. '화랑세기'에는 향가도 2수 실려있는데, 향가연구의 1인자인 서울대 김완진 교수는 이 향가가 위작이라 결론내렸다. 4. 향가 해독법은 1922년 일본학자 오구라 신페이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이 당시 박창화는 일본에 있었기 때문에(1919~1945) 이 시기에 박창화가 화랑세기를 지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노태돈은 1923년으로 그 시기를 특정하기까지 했다. 5. 향가 중 1개인 '청조가'는 그 마지막 4줄이 '찬기파랑가'와 똑같은데, 향가에는 이러한 형태가 전무하며 따라서 이를 표절한 것으로 추정한다. 6. '화랑세기' 내용 중 "미실은 색도(色道)로, 문무왕은 검도(劍道)로 천하를 제패했다"라는 기사가 나오는데, "검도"라는 한자어는 근대 일본에서 만든 신조어로서, 검도와 대비되는 "색도"라는 표헌도 이에서 차용한 일본식 한자어이기 때문에 화랑세기는 일제 시대 때 위조된 것이다. 7. '화랑세기'에는 책 속에 등장하는 화랑 개개인마다 이를 찬양하는 한시(漢詩)가 있는데, 당시 지어진 한시라면 모두 당운(唐韻)을 따라야 한다. 하지만 '화랑세기'의 한시는 모두 운이 없는 시로서, 이는 옛날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일본에서만 만들어진 일본식 한시이다. 즉, 박창화가 일본에 있을 시기에 지은 한시인 것이다. 8. 김종진의 집에 역사인물 이름의 목록이 있었는데 그 수가 삼국유사+삼국사기 등장인물의 3배에 이르렀다. 그 중 특정 인물들의 이름 위에만 빨간 점이 찍혀 있었는데, 이 빨간 점이 찍힌 인물만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등장한다. 이는 최초 집필할 때 이름을 대조하여, 실제 사서(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속에서 등장한 인물만 사용했다는 증거로서, 위조의 강력한 증거이다.
- ↑ 실제로 개인이 공부를 잘 하냐는 문제와 다른 사람들에게 이를 알기 쉽게 잘 가르치냐는 문제는 별개라는 사실을 생각하자(…).
- ↑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8100969
- ↑ '우리 안의 식민사관'은 9월 4일에 나왔는데 9월 27일 기준으로 역사부분 베스트셀러 5위다. 예스 24 5위, 교보문고와 반디앤루니스에선 4위, 알라딘에서 무려 3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