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러시아어: Никола́й Васи́льевич Гоголь(Nikolai Vasilievich Gogol')
우크라이나어: Мико́ла Васи́льович Го́голь(Mikola Vasil'ovich Hohol')
한국어: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
9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고골리라는 이름이 더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다. 이는 이름의 맨 마지막 ль이 연자음(구개음화된 자음)이라서 그런 것이지만 실제로는 차라리 고골 쪽이 더 가깝다.
2 상세
러시아를 대표하는 문학가이긴 한데 출신지는 동부 우크라이나 출신이다. 정확히는 폴란드계와 우크라이나(거기에 카자크계 조상을 두었다)계 혼혈. 그렇다고 그를 우크라이나 작가로 알아줄 수만은 없다. 창작활동을 러시아에서 했기 때문.[1] 일단 고골 본인은 러시아어는 외국어로, 우크라이나어는 모어로 생각하며 자신을 우크라이나 인으로 여긴 모양이다. 게다가 그의 원래 성은 고골야노프스키로 폴란드계 느낌이 강했다. 그렇기에 커가면서 스스로 '야노프스키'를 버리고 고골을 썼다.
이러한 출신 탓에, 최근 우크라이나에선 그가 러시아어 집필했던 소설들을 우크라이나어로 재편찬하는 움직임이 보인다. 당연 러시아인들과 관련 학계에선 별로 좋게보지 않는다.
이 고골이라는 성은 부유한 코자크인 딸과 결혼하여 얼마간의 토지와 130여명의 농노를 소유하게 된 아파나시이 야노프스키(고골의 친 할아버지)에 의해서 붙여졌기에 그의 핏줄을 보면 꽤 복잡하다. 이때문인지 카자크계로도 대접받아서 카자크 이웃들과 친하게 지내며 그들의 민담과 여러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작품에 영향을 받았다. 괜히 타라스 불바에서 카자크 사람들이 멋지게 나오는 것이 아니다. 하긴 자기 조상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엄청난 부자는 아니지만 제법 잘 살던 시골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전원 생활을 겪으며 자라났다.엄격한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광신적인 기독교도라서 젊은 시절 종교에 대한 허무함(아무리 기도해도 결국 신은 외면한다)을 담게되는 토대가 된다. 또한 자신에게는 엄격하지만 부인에게는 한없이 약한 모습만을 보이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에게 항상 고함과 잔소리를 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그에게 여성공포증을 심어준다.
그는 커가면서 정치인으로 나서고자 했으나. 인맥과 돈이 없으면 불가능한 현실에 좌절하고 1829년 처녀작인 시집 <간스 꾸헬가르쩬>을 스스로 돈들여 내지만, 겨우 250부가 팔렸으며 악평을 호되게 당하자, 시집을 죄다 회수하여 직접 불태워버리고 만다. 그나마, 우크라이나 및 카자흐스탄 민담을 섞어서 만든 마녀와 정령들의 이야기를 다룬 단편 호러 소설 모음집인 <디칸키 지역의 밤 이야기 Vechera na khutore bliz Dikanki>를 1831~32년에 2권으로 걸쳐 냈는데 꽤 호평을 받으며 어느 정도 잘 팔리면서 이름을 알리게 된다. 곧이어 발표한 단편 모음집인 고르드문드도 성공하면서(여기에 유명한 비이나 대장 불리바로 알려진 타라스 불바가 실려있다) 이름을 더 알리게 되는데 당시 대작가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이 칭찬하면서 그는 유명해졌고 생활도 나아진다.
이 시절 하급공무원으로 1년동안 일하면서 겪은 부조리는 나중에 작품에 큰 영향을 끼친다. 공무원을 그만두고 중세역사 전문 선생으로 일하면서 대학교 조교수까지 일했으나 작품에 전념하고자 3년만에 교육자로서의 활동을 그만둔다.[2] 뒤를 이어 부조리와 부정을 풍자한 감찰관이 연극으로 상영되어 큰 인기를 얻는다. 그러나 이 연극에 대하여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불쾌하게 여기면서 연극은 상영중단되고 그도 위협을 느끼고 1836년 이탈리아 로마로 몸을 피해야 했다. 그리고 여기서 존경하던 선배 푸시킨이 아내 때문에 총싸움을 벌이다가 허무하게 37살 나이로 죽은 걸 뒤늦게 듣고 슬퍼하며 그를 기리는 시도 썼다.
6년동안 이탈리아에서 있다가 러시아로 돌아온 그는 그의 최고걸작으로 추앙받는 <죽은 혼>을 발표하며 호평을 받는다. 그러나,그는 죽은 혼 이후론 스스로도 작가로서 죽었다고 절규할 정도로 슬럼프에 빠진다.[3] 이어 찾아온 우울증과 여러가지 병세까지 겹쳐서 작품활동은 더더욱 부진에 빠졌고 1847년에 쓴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를 간추린 글>이라는 책을 내놓았다가 그를 찬양하던 이들에게 분노어린 비난과 실망을 받게 된다. 그동안 그리도 비꼬던 사회 부조리, 지배 권력, 그동안 혐오하던 보수적인 종교에 순응하며 긍정적인 태도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더더욱 절망감이 깊어져가서 기분을 풀고자 1848년 팔레스타인까지 여행을 갔으나 일절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이때, 얼마나 절망했으면 예수 동상 밑에서 미치도록 흐느껴 울었다고 한다.
러시아로 돌아와 외톨이처럼 지내면서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절망과 우울증으로 모든 게 싫어지면서 종교에 미치도록 매달리면서 친구들도 이젠 예전에 알던 고골이 아니라고 등을 돌렸고 광신적인 정교회 사제로부터 사탄의 유혹인 글을 포기하라는 권고에 가차없이 그동안 심기일전하여 쓰던 죽은 혼 2부조차도 스스로 불태워 버린다. 다만 다 불태우진 않고 죽은 혼 2부 일부분이 남아있지만 미완성문고로 박물관에나 남아있을 뿐이다. 그리고 다시 광기에 빠져 홀로 살아가다가 갑자기 죽었는데 아무도 돌보지 않은 상태라서 당연히 그가 남긴 유언은 누구도 듣지 못했다.
3 작품
3.1 시
- 이탈리아(1829)
- 한츠 큐헬가르텐(1829)
3.2 소설
3.3 희곡
- 검찰관
- 결혼
- 도박꾼
4 논문
5 기타
고골이라는 이름이 고구려와 비슷하니 그가 한국계라고 주장하던 환빠도 있다.지금은 비공개로 닫아버림
러시아에서는 유령기차인 '나는 이탈리아인(Mying Italian)'에 그의 유골이 있다는 도시전설이 널리 알려져있다. 해당 도시전설은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271회에 방영되었다# 도시전설의 내용은 바크후투신이란 해골수집가에 고용된 사람들이 그의 무덤을 도굴하였고, 그걸 당시 지중해에서 활동중이던 야브노스키란 장교가 입수하나 임무때문에 모스크바행 여객기차인 나는 이탈리아인에 타던 보르게세라는 이탈리안 장교에게 유골을 주며 부탁했다고 한다. 그러나 열차가 갑자기 멈춘 걸 이용해 보르게세 형제가 유골을 가지고 장난을 쳤고, 이들이 도망치자마자 열차가 사라져 100여명의 승객과 함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떠돌고 있다는 것.
문명 5에 그의 희곡 '검사관[4]-Revizor(Ревизор)'이 걸작 문학으로 인용되는데, 하필 그 문장이 '만일 얼굴이 엉망이라면, 거울을 탓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상급 어그로꾼 라서 플레이어들을 분노케 한다.
난해한 소설을 많이 썼지만 의외로 러시아 문학 전공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작가이기도 하다. 솔직히 말해서 어디서 노름이나 하던 빚쟁이도스토옙스키나 바람둥이 할배레프 톨스토이보다 쉽게 읽히기도 하고.
- ↑ 게다가 현재도 동부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인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선거만 열리면 서부는 반러표, 동부는 친러표로 확 갈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 ↑ 일설에 의하면 자신의 강의방식에 대해 학생들이 너무 비판을 많이하자 자신감을 잃어 퇴직했다고 한다. 당시 고골의 제자였던 사람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고골은 자신의 키 높이만한 자료를 가지고 와서 혼자 작은 목소리로 읽다가 가끔 혼자 키득거렸다고 한다. 이런 탓에 당시 학생들은 그의 강의가 매우매우 재미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강의를 듣는 학생도 몇없었다고...
- ↑ 본래 죽은 혼 2부에선 긍정적인 인물상을 그리고자 노력했으나 계속 실패하게 된다.
- ↑ 위에는 감찰관이라는 이름으로 언급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