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黨派
주장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뭉쳐 이룬 단체나 모임을 뜻한다. 특히 조선 역사에 대해 보다 보면 붕당정치와 함께 꼭 나오는 단어. 더 자세한 것은 붕당정치 참고.
2 鏜鈀
사극한정 조선군 주력병기
무기의 일종. 삼지창처럼 생겼으나 좌, 우 가지 부분이 옆으로 갈라지는 형태로 생겼다. 조선시대 사극을 보면 포졸이건 군졸이건 할 것 없이 꼭 이 무기를 들고 나온다. 실제로는 포졸이 의장용으로 쓰는 경우를 제외하면 평시에 들고 다닐 일은 없는 무기다.
또한 조선시대 군졸들이 전부 이 당파창을 들고 다니던 것도 아니며, 실제로는 각 군졸들이 병과에 맞게 무기를 들고 다녔다. 사극에서 이상할 정도로 조선의 군졸들이 당파를 많이 들고 다니는 건 이미 소품으로 만들어 놓은 게 많아서.
당파와 유사한 무기는 조선시대 이전부터 있었지만, 당파가 정형화되어 널리 쓰인 것은 조선 후기쯤이다. 그 이전까지 군졸들이 주로 쓰던 근접무기는 창이었으며, 조선 후기에도 군졸들은 병과에 따라 다양한 무기를 썼지 당파만을 쓰지는 않았다.
조선군이 당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였다. 당파는 창 치고는 길이가 짧아서(160cm 정도) 공격용으로는 좀 부족한 감이 있지만 날이 여러 개여서 적의 무기를 막기 좋았다. 즉, 적을 상하게 하는 무기라기보다는 적의 무기를 상하게 하는 무기. 이 때문에 중국 명나라의 장수 척계광은 왜군을 막기 위해 개발한 진형에 당파를 든 군졸을 꼭 집어 넣었다. 이 당파를 든 병졸은 적이 멀리 있을 경우에는 당파에다 화전을 얹어서 쏘았으며(즉 당파를 화전의 발사대로 썼던 것) 가까이 있을 때는 왜구의 칼을 막는데 사용했다(물론 방어용으로만 쓴 것은 아니고 기회가 있을 때 이것으로 적을 찌르기도 했겠지만).
조선군도 이러한 척계광의 전술을 받아들이면서 당파를 정형화하여 쓰기 시작했으며 조선군의 당파는 명나라의 것과 유사하였으나 제작방식은 조금 달랐다. 중국 것은 당파의 날 부분을 일체형으로 만들었던 것에 비하여 조선의 것은 가운데의 날 부분과 좌, 우의 가지처럼 생긴 날을 따로 만든 다음 하나로 합쳤다.
이 당파는 적의 무기를 막거나 적의 무기에 걸어서 못 움직이게 하거나, 혹은 옆의 가지 부분으로 적을 끌어 당기거나 아니면 그대로 앞의 날 부분으로 적을 찌르는 형태로 공격하였다. 또한 북방의 기병을 상대할 때는 적의 무기를 곁가지에 끼어 못 움직이게 하거나 아니면 적의 말을 직접 공격하거나, 말을 놀라게 한 다음 가지 등에 걸어서 기수를 떨어트리거나 하는 데 쓸 수도 있었다.
당파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길이가 짧고 또 적의 무기와 직접 부딪혀가며 막거나 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담력이 큰 병졸이 주로 당파를 맡았다.
그런데 실전에 있어서 당파의 실질적인 존재의 이유는 화전 발사용이었다. 당파가 창모양을 하고 있음에도 길이가 짧은 이유도 이 때문.
척계광이 만든 진법에 따르면 제일 앞에 등패와 칼을 든 이들이 서고, 그 뒤에 대나무를 길게 잘라 만든 창인 낭선으로 적의 접근을 저지하며, 실질적으로 적극적인 공격을 펼치는 것은 장창이고 당파는 이들을 보조하는 정도의 무기였다고 한다.
그래서 화전보다 더 정확한 조총의 보급이 많아지면서 점차 당파는 실전무기가 아니라 의전용 무기로 바뀌어갔다.
3 撞破
물건 따위를 쳐서(撞) 깨뜨림(破).
한국사에서 단어해석의 대표적인 오류를 보여주는 단어로, 흔히 다음과 같은 단어로 오해된다.
'해전 전술 중 하나로, 배로 부딪쳐 상대의 배를 부수는 전술. 주로 충각을 달아서 근접 충격에 잇점을 가진 배로 사용한다.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의 승전 장계를 보면 매우 자주 사용된 전술로, 왜선을 당파했다는 구절이 흔히 등장한다. 조선의 판옥선은 소나무 재질이라 무거워 속도는 느리다 해도 단단했던 반면, 일본은 대개 가벼운 삼나무로 기동성은 우월했을지 몰라도 내구성은 판옥선에 비해 떨어졌다. 더군다나 거북선이 등장하면서 당파는 무시못할 수단으로 올라섰다.' 라는 식. 이를 근거로 원균 명장론자들은 이 당파전술로 원균이 왜적들을 섬멸했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