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무 덴노

(덴무 천황에서 넘어옴)
일본의 역대 덴노
39대40대41대
고분 덴노덴무 덴노지토 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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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호덴무 덴노(天武天皇)
아마노누나하라오키노마히토노스메라미코토(天渟中原瀛真人天皇)
오아마(大海人)
능호히노쿠마노오오치능(檜隈大内陵)
생몰음력631년(?) ~ 686년 9월 9일
양력631년(?) ~ 686년 10월 1일
재위음력673년 2월 27일 ~ 686년 9월 9일
양력673년 3월 20일 ~ 686년 10월 1일

일본이라는 국호와 으로부터 격상된 덴노라는 칭호를 최초로 사용한 임금.

일본판 영락제.

1 개요

덴무 덴노(天武天皇 てんむてんのう)는, 7세기 후반의 일본의 천황이다. 형인 덴지 덴노가 죽은 뒤, 672년에 임신의 난을 일으켜 조카 오토모 황자(고분 덴노)를 몰아내고 그 이듬해에 즉위했다.[1] 치세는 14년. 즉위 기간은 13년에 걸친다. 아스카 기요미하라 궁(飛鳥浄御原宮)를 지었고 뒤를 이은 지토 덴노의 시대와 아울러 덴무·지토조 등의 단어로 일괄되곤 한다.

이 시대는 일본의 통치 기구와 종교, 역사, 문화의 원형이 만들어진 중요한 시대로 평가받고 있으며, 덴무 덴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지토 천황의 통치도 기본적으로 덴무 덴노의 노선을 이어받아 완성시킨 것으로, 그 발의는 덴무 덴노에게서 많이 나온 것이다. 문화적으로는 하쿠호(白鳳) 문화의 시대이다. 인사면에서는 황족을 요직에 임명하고 다른 씨족을 하위에 두는 황친정치를 행했지만, 그 자신도 황족에게 제약받지 않는 전제군주로서 군림했다.

야쿠사노 카바네(八色之姓)를 제정하여 기존의 우지(氏)·카바네(姓) 제도를 재편하는 한편, 율령제 도입을 향한 제도 개혁을 진행시켰다. 아스카 기요미하라 령(飛鳥浄御原令)의 제정과 새로운 수도(후지와라쿄) 축조 및 《일본서기》와 《고사기》의 편찬은 덴무 덴노가 시작하여 그 사후에 완성한 사업이다. 도교에 관심을 두고 신토(神道)를 정비하여 국가 신도를 확립, 불교를 보호해 국가 불교를 추진했다. 그 외 일본 토착의 전통 문화의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또한 '덴노'(天皇)를 왕의 칭호로 삼고 '일본'(日本)을 국호로 정한 최초의 군주로 알려져 있다.

2 업적

2.1 통치 개시와 포부

일본에서 군주가 처음으로 「天皇」을 칭한 것은 덴무 덴노가 최초라는 설이 오늘날에는 가장 유력하다.[2] 일설에는 이 호칭이 처음에는 덴무 덴노라는 이 위대한 군주 단 한 명만을 위해 바쳐진 존칭이었으나, 후대의 천황들이 그의 강력한 카리스마를 이어받고자 「天皇」을 군주의 칭호로 삼아 지금까지 전해지게 되었다고 한다.[3]

치세 동안에 단 한 명의 대신도 두지 않고 법관, 병정관 등을 자신의 직속으로 두어 스스로 정무를 보았던 덴무 덴노는 조정의 요직에 황족을 등용했는데(황친정치) 그렇다고 해서 황족이 기존의 귀족 세력을 제치고 국가를 장악하게 된 것은 아니었으며(덴무 덴노 자신도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 권력은 어디까지나 덴노 개인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중신에게 정무를 맡기는 일도 없이, 신하의 합의나 동의에 의지하는 일도 없이,덴노 스스로가 군림하고 통치함으로써 그는 일본 역사상 보기 드문 최고도의 권력 집중을 이루어냈다. 덴노의 강한 카리스마는 고대 일본의 역사에서 덴노 전제의 정점이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덴노 중심의 전제정치가 고도화로 이루어졌다 해도, 중국이나 한국에서 한 것과 같은 초야로부터의 대대적인 인사 발탁은 일절 이루어지지 않았고, 임신의 난에서 공을 세운 공신이라 해도 지방 출신자는 여전히 기존의 귀족층 아래에 놓여진 채로 있었다. 임신의 난이 본질적으로 같은 왕실 내부의 왕위계승 다툼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던 탓이기도 하지만, 덴무 덴노가 추진한 이 고도의 전제군주화도 결국 귀족제적인 한계를 넘지는 못했다는 지적이 있다.

2.2 관제 개혁

즉위하고 얼마 되지 않은 덴무 2년(673년) 5월 1일, 덴노는 처음으로 궁정에서 일할 사람을 대사인(大舍人)으로 하여, 재능에 따라 직무를 맡기는 제도를 준비했다. 아울러 부녀로서 바라는 사람에게는 모두 궁에 들어와 근무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덴무 5년(674년) 1월 25일에는 기나이(畿內) · 미치노쿠(陸奧) · 나가토(長門) 이외의 고쿠시는 다이산(大山) 이하로만 임명하도록 정했다(이는 관위상당의 단초가 되었다). 또한 기나이 이외의 다른 구니의 오미(臣) · 무라치(連) · 도모노 미야쓰코(伴造) · 구니노 미야쓰코(國造)의 자손과 재능이 뛰어난 서민이 궁에 출근하는 것을 허락했다. 7년(678년) 10월 26일에는 매년 관리의 고선(考選, 근무평가제)을 행하여 그에 따라 위계를 올려주는 제도를 정하고, 그 사무를 법관, 법관의 관리는 대변관(大弁官)이 맡도록 했다. 14년(685년)에는 새로운 관위를 정했다

덴무 10년(681년) 2월 25일, 덴노는 율령을 정하고 법식을 고치는 대사업에 착수했다. 이는 관리들에게 분담시켜 진행되었지만 덴노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완성을 보지 못하고, 지토 3년(689년) 6월 29일에야 영(令)만 발포되었다(아스카 기요미하라 령). 관위 제도는 덴지 덴노가 정한 다이치(大織)에서 쇼켄(小建)까지의 관위 26계제를 답습했다. 덴무 덴노 당시를 살았던 신하들이 받은 관위는 미노노 오키미(美濃王)와 다이마노 도요하마(當麻豊浜)가 받은 쇼쟈(小紫)가 기록상 보이는 가장 높은 것이다. 이와 병행해 덴무 4년(675년) 3월 16일에 처음 보이는, 여러 황족을 대상으로 하여 4,5위 등 숫자에 '위'를 붙이는 위계도 만들어졌다. 기록상 덴무 당시의 황족들이 받은 위로서는 3위에서 5위까지가 보이고 있다. 덴무 14년(685년) 1월 21일에 새로운 관위 48층제를 정했다. 황족과 신하에서는 다른 위계가 마련되어 있었고 황태자에게도 하사되었다. 실제로 하사할 수 있었던 가장 높은 위는 구사카베 황자에게 내려진 세이코이치(淨廣壹)이다.

덴무 덴노가 확립한 여러 제도는 후대의 다이호 율령이나 요로(養老) 율령과는 미묘하게 다른 부분이 있지만 실질적인 의의나 내용은 같으며, 이는 율령관인제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또한 덴무 덴노 당시의 관제는 명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정무를 논의하는 여러 명의 납언(納言)으로 구성된 태정관(太政官), 그 아래에 민관(民官) ・ 법관(法官) ・ 병정관(兵政官) ・ 대장(大蔵) ・ 이관(理官) ・ 형관(刑官)의 6관과 나머지 다른 관사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학자에 따라 덴무조가 가지는 의의를 다르게 평가하는 것도 있지만, 덴무 덴노의 영도아래서 일본 율령체제의 기초가 정해졌다는, 덴무조의 의의를 높게 평가하는 이들이 많다.

2.3 민정문제

중앙집권국가의 건설을 향한 새로운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덴노는 호족들이 토지와 인민을 사적으로 지배하는 것을 일체 부정하고, 여러 호족을 덴노 중심의 관리 질서에 짜넣어 국가의 지배를 관철하려는 정책을 펼쳤다. 우선 덴무 4년(675년) 2월 15일, 선대 덴지 3년(664년)부터 모두에게 인정되었던 부곡과, 황족·신하·사원에게 인정되었던 산택·섬과 포구·임야·연못을 다시 거둬들인다는 조를 내렸다.

2.4 숙청

고위 황족 신하에게 유배 이하의 처분을 많이 내렸다. 이는 덴무 4년(675년) 4월 8일에 조참(朝參)이 금지된 다이마노 히로마로(當摩廣麻呂)와 구누노 마로(久努麻呂)를 시작으로, 4월 23일에 이나바에 유배당한 3위 황족 오미 왕(麻続王) 같은 고관에까지 이르렀다. 11월 3일에는 궁의 동쪽의 산에 올라가 '요망한 말'을 지껄이고 자살한 사람이 나왔다. 5년(676년) 9월 12일에는 지쿠시다자이(筑紫大宰)였던 황족 야가키 왕(屋垣王)이 도사(土左)에 유배되고, 6년(677년) 4월 11일에는 구이타노 나쿠라(杙田名倉)가 이즈 섬(伊豆島)에 유배당했다.

위협적인 조도 여러 차례 내렸다. 4년(675년) 2월 19일, 천황은 군신·백료와 천하의 인민을 향해 "모든 악을 하지 말라!"는 조를 내리고 있다. 6년(677년) 6월에는 야마도노아야(東漢) 집안이 정치 모의에 참가했던 과거를 수십 년전의 일까지 끄집어내 꾸짖으면서, "큰 은혜를 내려 용서하겠지만 앞으로는 용서하지 않는다"는, 야마도노아야 집안으로서는 위협적인 언사를 던지고 있다. 8년(679년) 10월 2일에는 "왕경(王卿) 등이 태만하여 악인을 간과하고 있다!"며 경고하기도 했다.

2.5 기타

참고로 지토 덴노를 포함하여, 자신의 조카들인 덴지 덴노의 네 황녀(!)를 부인으로 삼은 자매덮밥의 실현자이다.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 불새/태양편에서도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불교 세력을 내세워 토착종교를 배척하는 형 덴지 덴노에 맞서 토착신앙을 옹호하는 세력의 대표로 등장하며, 과거 토속신에게 바쳐진 신성한 땅에서 사냥을 행하는 형 덴지 덴노에게 "이건 권력을 내세운 폭거"라고 한다거나, 절이 벼락을 맞아 전소되자 하늘의 노하심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작중 불교에 대한 태도가 즉위 이전과 이후가 다른데, 즉위 이전에는 "이 나라의 주인은 왕인 나이며 나에게 거역하는 자는 누구도 용납할 수 없다"는 형 덴지 덴노의 강압적인 태도에 분개해 헝에게 장창을 집어던지거나, 자신을 출가시키라고 하는 말이 나왔다는 말에 "내가 얼마나 중들을 싫어하는지 잘 알면서"라며 분개하지만, 사후 오토모가 즉위하는데 오아마가 방해가 될 것을 염려한 덴지 덴노가 병상에서 "오토모의 나이는 너무 어리니 내가 죽은 뒤에는 네가 즉위하라"고 하는 자리에서 스스로 승려로써 출가할 뜻을 밝히고 요시노로 내려간다. 반란을 일으켜 조카 오토모를 내쫓고 즉위한 뒤에는 "아무래도 왕위를 지키려면 형님이 하셨던 대로 불교가 유용하겠다"며 불교를 옹호하는 태도를 보이며, 자신의 자리를 넘보는 사람들이 있을지 몰라 "형님의 그 성격이 이해가 된다"는 발언을 하고, 태양을 일본의 새로운 상징으로 삼는다.

사토나카 마치코의 만화 《천상의 무지개 - 지토 덴노 이야기》에도 등장하는데, 2015년 6월 10일자 역사비화 히스토리아에서 지토 덴노를 다루면서 작중 함께 등장했다. 성우는 요시노 히로유키로 본편이 지토 덴노가 주된 주인공이다 보니 그냥 조연에 가깝다.[4] 상대역인 지토 덴노 역을 맡은 성우는 미즈키 나나[5]
  1. 형인 덴지 덴노와의 사이가 굉장히 좋지 않았던 모양인지, 후지와라 집안에 전해지는 문헌인 도지 가전(藤氏家傳)에는, 황자 시절의 오아마가 연회에서 술에 몹시 취한 나머지 형인 덴지 덴노의 상에다 장창을 집어던졌다고 되어 있다. 빡친 덴지 덴노를 가마타리가 나서서 가까스로 말렸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덴지 덴노가 동생 오아마가 사랑하던 누카타 왕녀를 빼앗아 자신의 아내로 삼은 것에 대한 울분(나아가 난을 일으켜 조카를 죽이고 자신이 즉위한 원인) 때문이었다고 하는 야사가 있다. 물론 말 그대로 야사(野史).
  2. 여기서 일본 극우들과 일빠들이 기원전 600년대에 진무 덴노가 최초로 천황이라는 그러니까 전세계에서 최초로 황제라는 칭호를 썼다."는 개드립을 치는데 이는 당연히 틀린 말이다. 실제로 전세계에서 최초로 황제라는 칭호를 쓴 사람은 바로 기원전 200년대에 진시황이다. 덴무 덴노 시기의 이전의 일본에는 천황이라는 호칭이 없었으며 왕이라는 호칭을 썼고, 일본에서 천황이라는 호칭이 처음 쓰인 때는 당나라로부터 천황 칭호를 수입해서 쓴 이 시기부터다.
  3. 다만 천황으로써 덴무의 직계는 쇼토쿠 덴노(稱德天皇)의 죽음 이후 덴지계인 시라카베 왕이 관료들의 추대로 즉위하게 되면서(고닌 덴노) 끊어졌다(혈통 자체가 끊어진 것은 아니다). 고닌 덴노의 아들이 유명한 간무 덴노. 따라서 현재의 덴노는 덴무 덴노가 아니라 덴지 덴노의 피를 잇고 있다.
  4. 해당 다큐멘터리 방영분이 사토나카 마치코의 만화 《천상의 무지개 - 지토 덴노 이야기》의 줄거리를 바탕으로 전개되며 원작의 주요 장면을 캡처하고 성우가 더빙하는 형식의 보이스 드라마 방식을 도입한 신선한 전개.
  5. 다큐멘터리 성격상 다소 미화되어 있는 부분이 적지 않다. 특히 중간에 오오아마 최대의 업적이라고 할 진신의 난이 나오는데 이세 진구에서 아마테라스에게 기도하는 오오아마와 그 옆에서 아마테라스가 자신의 몸에 빙의했다며 "내 가호로써 오오아마 군에게 승리를 드리도록 하죠"라고 하는 부분은 아무리 봐주려도 해도 오글거리는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