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태후

1 후한의 동태후

董太后
(? ~ 189년)

후한의 12대 황제 영제의 어머니이다. 진짜 황후였던 적은 없었지만 효인황후(孝仁皇后) 또는 영락태후(永樂太后)로도 불린다. 오빠는 동총, 조카는 동중, 배송지에 따르면, 동승은 동태후의 조카라고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1.1 황태후가 되기 전까지

그녀는 유장(劉萇)의 아내였다. 비록 남편이 왕족이기는 했지만, 호화로운 생활을 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156년에 유굉(劉宏)을 낳았다. 유굉 말고 다른 아이가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168년에는 이미 유장은 죽었으며, 아들 유굉이 해동정후를 이어받고 있었다.

1.2 황태후 시절

167년에 환제가 죽었는데, 후사가 없었다. 환제의 황후인 두묘가 아버지인 두무와 함께 유굉을 환제의 후계자로 지목했다. 168년에 12살의 유굉이 황제(영제)가 되었고, 영제는 할아버지 유숙을 효원황(孝元皇)으로 추존했다.

168년 9월에는 중상시 조절이 태부 진번, 대장군 두무, 상서렁 윤훈(尹勳), 시중 유유(劉瑜), 둔기교위(屯騎校尉) 풍술(馮述)을 죽였다. 이렇게 두무가 환관들을 몰아내려다가 오히려 환관들에게 죽음을 당하고 가족들이 유배당하자 그 다음해인 169년 영제는 어머니를 궁궐로 불러들이고, 외삼촌인 동총도 서울로 불러들였다.

영제는 두묘 또한 태후로써 모셨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환사황후가 죽자 동태후는 태후로서의 위치가 견고해졌고 점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동태후는 아들 영제에게 매관매직을 크게 장려했는데 이것은 한나라에 큰 해를 입히게 되었다.

181년에 영제의 유협(훗날의 헌제)이 왕미인에 의해 태어나자, 영제의 황후인 하태후가 왕미인을 독살해 죽였다. 동태후는 유협을 직접 길렀다. 188년에는 조카 동중을 표기장군(驃騎將軍)으로 만들고, 천여명을 거느리게 하였다.

동태후는 유변(훗날의 소제)보다는 유협을 더 좋아해서 영제에게 황태자 자리를 유변에서 유협으로 바꾸라고 말하였고, 이것 때문에 유변의 어머니인 하태후 사이에 큰 갈등이 발생했다.

1.3 태황태후 시절

189년 4월에 아들 영제가 후계자를 지목하지 않고 죽었다. 영제가 신임하던 환관인 건석은 유협을 황제로 만들려고 하였으나 하태후와 그의 오빠인 대장군 하진은 유변을 황제로 옹립했다.

하태후와 하진은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태황태후가 된 동태후는 조카인 동중과 함께 궁궐 내에서 작은 세력을 만들고, 하태후와 갈등하기 시작하였다. 어느 날은 하태후와 말싸움을 하게 되었고, 동태후는 동중으로 하여금 하진을 죽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하진은 이 말을 듣고 한발 먼저 나서서, 하태후로 하여금 하태후의 시어머니기도 한 동태후를 원래 살던 영지로 유배시키고 그리고 군대를 이끌고 동중의 진영을 포위하였다. 동중은 자살하였으며, 곧 이어서 동태후도 죽었다. 동태후는 자살했다고도 하며, 어떤 사람들은 두려움 때문에 죽었다고도 말한다.

2 청나라의 동태후


東太后
(1837 ~ 1881)

함풍제의 두번째 황후인 효정현황후 니오후루씨(孝貞顯皇后 鈕祜祿氏). 자안황태후라고도 불린다.

그녀의 처소가 자금성의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동태후라는 별칭이 생겼다.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고 하며, 동치제광서제가 제위할 때 서태후와 함께 섭정을 했다. 함풍제의 정궁으로 후궁 출신인 서태후보다 지위도 높고 법적 정당성이나 명령의 권위도 더 우월했지만 서태후만큼 정치적으로 영민하지 못해 항상 서태후의 의도대로 끌려다녔고 뒤에는 아예 서태후에게 모든 걸 맡겨 버렸다.

44세의 이른 나이에 급사해서 서태후에 의한 독살설이 끊이지 않았지만 병상 기록등이 발견되고 서태후가 동태후를 암살해야 할 정치적 타당성이 없다는 점 등이 지적되면서 독살설은 수그러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