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치제

청의 역대 황제
9대 문종 함풍제 이주10대 목종 동치제 자이슌11대 덕종 광서제 자이티얀
몽골 제국의 역대 대칸
48대 투기멜 엘베그트 칸49대 부린투 자사그치 칸50대 바다라울트 투르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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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목종(穆宗)
시호만주식필링가 황제
중국식계천개운수중거정보대정공성지성효신민공관의황제
(繼天開運受中居正保大定功聖智誠孝信敏恭寬毅皇帝)
한호[1]요오닌가 다산 한
(Yooninga dasan han)
칸호[2]부린투 자사그치 칸
(Burintu Zasagchi Khaan)
만주어아이신기오로 자이슌
(愛新覺羅 載淳, 애신각라 재순)
연호
(청)
만주어요오닌가 다산
중국어동치(同治)
몽골어-
생몰기간음력1856년 4월 27일 ~ 1874년 1월 12일 (19세)
재위기간음력1861년 11월 11일 ~ 1874년 1월 12일 (13년 62일)

1 개요

함풍제의 외아들로 사실상 아무런 실권이 없는 바지사장허수아비황제 였다. 이때부터 청나라는 급격히 무너져 열강의 전투력 측정기로 추락하게 된다.

2 혼란스러웠던 치세기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에 함풍제의 정식 부인인 동태후와 생모인 서태후가 공동 섭정했다. 사실상 실권은 대부분이 서태후에게 있었다고 하지만 동태후가 서태후보다 황실에서의 서열이 더 높아 이로 인한 갈등이 있었기에[3] 동치제 즉위 초기의 청나라는 혼란스러운 편이었다고 한다.

또한 두 태후의 갈등은 정치적인 것만이 아니라 동치제 양육 방식 문제도 끼여 있었다. 동치제 본인은 엄격했던 친어머니보다 어리광만 받아주고 절대 혼을 내지 않는 동태후를 더 좋아했다고 한다. 이것은 모자간의 사이가 나빠지는 이유 중 하나가 된다.

동치제는 성년에 가까워지자 황제로서 친정을 하기 위해 어머니에게서 실권을 가져오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게다가 서태후가 그의 아내 효철의황후 알루터씨(孝哲毅皇后 阿魯特氏)를 싫어했기에 이로 인한 갈등이 발생했고, 이 탓에 정무에 흥미가 사라진 동치제는 유흥에만 열중하다가 천연두로 죽었다.

일설에는 열병으로 죽었다고도 하고, 실권을 가져오려다 실패한 후 어머니 서태후가 자신의 권력을 위해 아들을 정치에서 철저히 배제하자 실의에 빠져 홍등가, 즉 창녀촌을 돌아다니다가 매독에 걸려 죽었다고도 한다.

안타깝게도 효철의황후 역시 불운했다. 그녀의 아버지 알루터 초치(阿魯特 崇綺)는 동치 4년(1865) 역사상 유일하게 장원급제한 몽골인이였다. 이후 벼슬이 이부상서에 이르렀으며, 동치 11년에는 국구까지 되었다. 하지만 그의 출세엔 동태후의 입김이 영향을 미친 거였고, 애초에 서태후는 효철의황후를 싫어했기 때문에 능력과 별개로 초치 역시 서태후의 미움을 샀다.

결국 초치는 추탈되었으며, 효철의황후는 동치제의 요절 이후 동치제의 아이를 임신 중이었는데도 서태후의 핍박을 받아 거의 유폐된 상태에서 지내게 된다. 그녀는 얼마 후에 금조각을 삼켜서 자살하는데, 100년도 되지 않아 군벌 쑨뎬잉(孫殿英)의 도굴로 금조각을 찾기 위해 시체 복부를 갈라 내장을 해집히는(…) 만행을 당했다. 안습.

이 시기 청은 양무운동이란 개혁을 추진한다. 우선 1861년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4]'이 설치됐는데, 이로서 청나라는 오랜 사대외교 노선을 공식 포기하고 적어도 서양에 대해서는 '대등한 외교 관계'를 인정하게 된다.

이런 우호적인 분위기를 배경으로 1864년에는 태평천국이 장악하고 있던 난징을 함락했다. 그리고 태평천국의 천왕 홍수전(洪秀全)이 자결하면서[5] 겨우 강남을 평정하고, 청 정부는 한숨을 돌린다. 동시에 태평청국 봉기를 진압하면서 성장한 향신(鄕紳) 출신 의병장들인 증국번(曾國藩), 이홍장(李鴻章), 좌종당(左宗棠) 등 또한 공친왕(恭親王)[6]의 개혁에 동참하게 된다.

이렇게 중체서용(中體西用)의 기치 아래[7] 이른바 '양무운동'으로 알려진 중국식 근대 개혁이 진행되었다. 물론 결과는 다 알다시피 1894-95년 청일전쟁의 패배로 증명되는 실패한 개혁이었지만.

청나라가 그나마 개혁의 모양새라도 낼 수 있었던 것은 동치제 연간 동안 유럽이 그나마 좀 덜 찝적거렸기 때문이다. 그 당시 열강들은 유럽 대륙에서 벌어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1866),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71) 등의 "집안 싸움"으로 정신이 없었다. 게다가 이미 함풍제 시대에 이권을 나름 두둑히 챙겨놨었다(러시아도 1860년에 연해주를 얻는 선에서 만족한 상황.). 하지만 동치제가 죽을 무렵엔 그런 불안한 평화도 흔들리게 되었다.

3 평가

한편, 그 당시 조선은 1863년 26대 고종이 등극, 흥선대원군에 의해 10년 간 섭정 통치가 진행되었다. 동치제가 죽을 무렵(1874)은 고종이 친정을 선포(1873)하면서 명성황후 민씨의 세도 정치가 막을 올린 시기였다. 또한 운요호 사건(1875), 강화도 조약 체결(1876)도 멀지 않았다. 결국 동양 삼국 가운데 가장 늦게, 조선도 나라의 문을 열게 된 것이다.

또한 일본메이지 천황의 등극과 함께 에도 막부는 무너지고,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면서 근대국가의 길을 밟기 시작했다. 일본의 제국주의 경향도 점차 심해져 동치제 연간동안 명목상 청과 일본의 동시 번국이던 류큐 왕국을 완벽한 지배하에 두었으며[8], 동치제가 죽던 1874년에는 대만에도 군사를 파병하여 찝적거리기도 했다. 20년 뒤에 일어날 충돌의 전주곡은 이미 시작되었던 것이다.

  1. 만주식 군주 칭호
  2. 몽골식 군주 칭호
  3. 사실 동태후는 온화한 성격이라 권력욕이 강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동태후가 아예 안 나선 것은 아니었다. 대체로 서태후의 말에 동의한 편이었다지만 간혹 두 태후는 충돌했다.
  4. 조선의 통리기무아문의 모델이기도 했다.
  5. 단, 잔당은 1866년까지 활동했다.
  6. 함풍제의 동생. 즉, 동치제의 삼촌이다. 이름은 아이신기오로 혁흔(愛新覺羅 奕訢). 베이징 조약 체결에 앞장섰다. 동치제의 즉위 직후 서태후와 손을 잡고 이친왕(怡親王)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았으나 이후 경계를 받아 1865년에는 의정당대신에서 물러나면서, 일선에서 물러나게 된다.
  7. 이 슬로건 역시 조선의 동도서기(東道西器)에 영향을 미쳤다.
  8. 사실 청의 번국이란 것도 매우 명목적인 것이었고, 이미 일본의 지배하에 있던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여하간 류큐는 1872년 일본의 번이 되었고, 1879년엔 강제로 합병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