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의 역대 황제 | |||||
8대 선종 도광제 민닝 | ← | 9대 문종 함풍제 이주 | → | 10대 목종 동치제 자이슌 |
몽골 제국의 역대 대칸 | ||||
47대 터르 게렐트 칸 | ← | 48대 투기멜 엘베그트 칸 | → | 49대 부린투 자사그치 칸 |
묘호 | 문종(文宗) | |
시호 | 만주식 | 일러투 황제 |
중국식 | 협천익운집중수모무덕진무성효연공단인관민장검현황제 (協天翊運執中垂謨懋德振武聖孝淵恭端仁寬敏莊儉顯皇帝) | |
한호[1] | 굽시 얼기영거 한 (Gubci Eldengge han) | |
칸호[2] | 투기멜 엘베그트 칸 (Tugeemel Elbegt Khaan) | |
휘 | 만주어 | 아이신기오로 이주 (愛新覺羅 奕詝, 애신각라 혁저) |
연호 (청) | 만주어 | 굽시 얼기영거 |
중국어 | 함풍(咸豊) | |
몽골어 | - | |
생몰기간 | 음력 | 1831년 7월 17일 ~ 1861년 8월 22일 (31세) |
재위기간 | 음력 | 1850년 3월 9일 ~ 1861년 8월 22일 (11년 166일) |
1 개요
강제 퇴위를 당한 선통제를 제외하면 사실상 가장 재위가 짧은인용 오류: <ref></code> 태그를 닫는 <code></ref>
태그가 없습니다 전투에서 패한 뒤 부상 때문에 병들어 죽었으니 다르다. 지못미.</ref> 청 황제이며, 재위 11년간도 평안치 못하여 온갖 종류의 재난이라는 재난은 모두 일어나 이때부터 청나라는 본격국가 막장 테크를 타게 된다.
2 즉위 이전
선대 황제였던 도광제의 유일한 적자(공친왕 등은 서자)이긴 했지만, 사실 청의 제도로는 얼마든지 그것을 뒤집고 서자가 제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래서 무능했던 그가 어떻게 즉위할 수 있었는지 설명하는 이야기가 있다. 도광제가 죽기 얼마 되기 전에 함풍제와 공친왕을 같이 불렀는데, 공친왕은 여러 국정현안에 대해서 막힘없이 답했지만 반면 스승들의 코치를 받은 함풍제는 황제의 병세가 이리도 악화되었으니 이는 다 자식인 자신의 잘못이라면서 펑펑 울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눈물 감성팔이작전이 먹혀서(…) 후계자는 함풍제가 되었다. 그래서 '공친왕이 후계자가 되었다면'이란 가정은 지금도 가끔씩 회자된다고 한다.
3 즉위 이후
즉위한 이듬해인 1851년, 중국 사상 최대 규모의 민란인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났다. 무려 13년이나 계속되어 함풍제가 죽은 이후인 1864년에야 난징이 함락되어 끝났으며, 흡사 강희제 시절의 오삼계의 난처럼...아니 그보다 더더욱 중국의 남쪽 절반을 폐허로 만들었다. 이미 백련교도의 난(1796~1805)으로 재정을 소진했던 청은 또 없는 살림에 막대한 전비를 소모하여 재정이 완전히 탕진되었고, 가장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강남이 초토화되어 경제, 사회적으로 몹시 피폐해졌다.
이 상태가 현재 진행 중인 상황에서 1856년, 영국과 프랑스가 제2차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그 결과 1858년 톈진 조약을 맺어 추가로 개항장을 지정했고, 러시아는 중개를 빌미로 아무르강 이북의 광대한 영토를 떼어먹었다. 1859~60년 사이 2차 아편전쟁의 속편 격인 사건이 일어나 영프 연합군이 청군을 괴멸시키고 베이징을 점령했고 함풍제는 궁을 버리고 달아났다. 이때 유럽인들은 건륭제가 세운 원명원을 약탈하고 파괴한 뒤 불지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바로 이때 청의 막대한 문화유산이 유럽에 반출당했다.[3]
아무튼 이때 함풍제는 앞서 말했듯 수도를 버리고 러허(熱河, 열하)의 피서산장으로 몽진했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가 중재에 나섰고, 함풍제의 동생인 공친왕의 주도로 1860년 베이징 조약을 맺게 된다. 그리고 러시아는 그 중개료로 연해주를 차지했다(…). 조약은 체결되었지만 그는 외국 공사와 친견을 거부해 계속 열하에 있다가 병사하였다.
4 평가
시대적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는 암군이지만 그래도 시대적 분위기를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결국 황제로서의 역량은 부족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일부에서는 '제위에 오른 것 자체가 왕조와 나라 모두에 재앙'이라는 극악의 평가를 받고 있으며, 하는 짓과 그 결과만 놓고 보면 변명거리가 없어 보인다. 현대 중국인들 : 폐하, 무슨 아편을 하셨길래 그런 무능한 황자를 후계자로 정하셨사옵니까? 게다가 그가 사망했을 때 아들 동치제는 10살도 되지 않은 나이였고, 이는 결국 동치제의 어머니 서태후가 함풍제 사후 권력을 장악하게 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함풍제가 죽고 딱 50년 뒤인 1911년에 청을 멸망 시키는 신해혁명이 일어났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일이다.
함풍제의 치세는 조선 철종(재위 1849~1863)의 재위기간과 대략 일치한다. 자연재해는 빗발쳤고, 민란은 연이어 일어났지만 정작 왕은 무능하여 그냥 먹고 놀다 가버렸다는 점에서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4] 반면 일본은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에 의해 강제로 나라의 문을 열면서 일시적으로는 혼란해졌으나, 1867년의 메이지 유신, 이후 동아시아 유일의 제국주의 국가가 거듭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