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두리

豆豆里

신라-고려 시대의 목신(木神). 두두을(豆豆乙)이라고도 불린다.

이 두가지 이름은 '을'이 보통 'ㄹ'받침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면 쉽게 연결을 알 수 있다. '두둘'이라고 부르는데, 뒤에 인칭을 나타내는 '-이'가 붙으면 '두둘이'→'두두리'가 되는 것이다. 乙은 '리'의 음차로도 자주 쓰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경주 남쪽 10리에 왕가수(王家藪)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에서 목랑(木郞:木神)인 두두리를 제사지냈다고 한다. 두두리 숭배의 시초는 비형랑이라고 하는데, 비형랑 설화가 주로 기록된 삼국유사에는 이에 대한 특별한 언급이 없으나 신승동국여지승람에서는 "비형랑 이래로 믿었다."는 표현이 있어 두두리와 비형랑의 연관성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고려사에도 두두리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고려시대의 이의민도 두두리를 숭배했다고 한다. 이의민은 글을 알지 못하고 무당을 믿어서, 집에 신당을 짓고 두두리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서 집에서 모셨다.

하지만 어느날 두두리가 갑자기 통곡을 하고, 이의민이 놀라서 묻자 대답하기를, 자신이 지금까지 이의민의 집을 잘 수호해왔으나 이제 하늘이 재앙을 내리기로 결정하여 더 이상 이의민을 보호해줄수 없고 자신도 의지할 곳이 없어져서 슬퍼져서 운다고 대답했다.

얼마 후 이의민은 멸망했고, 관리들은 사당에 그려진 두두리 그림을 제거해버렸다고 한다.

신승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려 고종 18년 몽골 제국 원수 철례탑이 고려를 공격해 왔을때, 경주에서 목랑(두두리)의 말이라면서 아뢰어 왔는데, 두두리가 적진에 적과 싸우러 와 있으니 병기와 말을 보내라고 말하고 충성심이 담긴 시 한수도 지어 보냈다.

최우가 그것을 믿고 사적으로 병기와 인마를 그림으로 그려 내시 김지석을 시켜서 보내주었다. 그 후 두두리의 효험이 없어졌다고 한다.

KBS 대하드라마 무인시대에서는 신선 전문배우인 전무송이 연기했다. 초반부인 30회에 등장하여 최후반부인 145회에 퇴장했으니 무인시대 등장인물 중 가장 오랫동안 등장한 인물이기도하다.

이름을 알 수 없는 한 승려가 자신을 두두을이라 칭하며[1] 신라 부흥을 꿈꾸는 면모를 보인다. 이를 위해 이의민 앞에 근근히 나타나 조언을 하면서 최종적으로 이의민이 고려를 무너뜨리고 멸망한 신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허나 이의민이 고려의 최고 권력자 자리에 오르면서 신라부흥의 뜻을 망각해 그의 의도는 점점 무산되어 가고,[2] 결국 미타산에서 최충헌 형제에게 이의민이 죽음으로서 모든 것이 끝난다. 이후 이의민의 시신을 수습한 후 잠수탔다가 경주에서 농민봉기를 일으킨 후 (1202년 이비, 패좌의 난으로 보인다. ) 진압 당하고 박진재에게 145회에서 죽는다. 그러나 죽기 전 박진재에게 최충헌이 난신적자가 될 것이라고 예언을 하여 박진재가 최충헌의 대의를 의심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고 끝내 박진재는 최충헌에게 반기를 들고 만다.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경주 지방의 토속신이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몽골의 침입으로 경주 지방이 황폐화 되면서 신앙도 소멸한 것 같다. 도깨비의 기원으로 보는 설도 있다.
  1. 이와 별개로 목신 두두을의 우상 또한 이의민의 소지품으로 등장한다.
  2. 여담으로 김사미 · 효심의 난을 주도한 효심과 김사미, 그리고 휘하 세력은 이의민을 위해 두두을이 육성한 비밀결사로 나온다. 그리고 효심이 이의민이 신라를 부흥시킬 생각이 없다고 판단하여 독자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