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우

무신정권의 집권자
최씨 정권
5대 최충헌6대 최우7대 최항

崔瑀
(1166 ~ 1249)

1 개요

고려무신. 무신정권의 집권자. 최충헌의 아들로 이름을 최이(崔怡)로 개명하고 생전에 진양후에 봉해진다. 무신정권의 집권자들 중에서 가장 오래 집권한 사람. 어느 정도냐면 무신정변부터 최충헌 집권까지 이고,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5명을 합친 것보다 최우 혼자 집권한 기간이 더 길다. 그래서인지 아버지인 최충헌과 함께 드물게 시호를 가지고 있는데 시호는 광렬. 물론 받은 이유는 아버지와 같다.

정치와 별개로 의외인 점으로는 신라의 김생, 고려의 유신, 탄연 등과 함께 신품 4현(神品四賢)이라 불리는 명필이었다. 이 신품이 아니다 [1]

2 정권 계승

1219년에 추밀원부사인 최충헌이 사망하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정권을 장악하여 최씨 정권의 2대 집권자가 되었다. 1221년에 진양후에 봉해졌지만 이를 사양하였으며, 몽골의 사신 저가 등이 오자 이를 돌려보낸 후 남도의 주군의 정용군, 보승군 등에서 군사를 징발하여 의주, 화주, 철관 등에서 성을 쌓아 몽골에 대비하도록 지시하였다.

아버지가 축재한 금은보화를 고종에게 바치고 부당하게 탈취했던 공사의 밭을 주인들에게 돌려주었으며 가난한 선비를 등용하고 아버지에게 아첨하며 백성을 괴롭힌 관리, 아우인 최향을 유배 또는 파면시켰으며 1222년에는 참지정사, 이병부상서, 판어사대사가 되어 집권자로서의 위치를 굳게 하였다.

1223년에는 황라성을 수축하면서 성 밖으로 겹쳐서 쌓은 나성의 도랑을 수리하기 위해 자신들의 군사를 동원하고, 13층 탑과 화병을 만들어 흥왕사에 두는 등 각종 비용을 지출하였다. 상장군 최유공, 추밀 부사 오수기, 장군 김계봉, 낭장 고수겸 등 문신들을 모두 죽이기 위해 모의하자 오수기를 백령진장으로 강등시켰다가 사람을 보내어 죽인다.

또한 최유공을 거제 현령, 김계봉을 명주 부사로 삼았으며 고수겸을 해도로 유배보냈다. 1224년에 최유공이 김계봉, 대장군 이극인과 함께 자신을 죽이려고 하자 최유공, 이극인, 김계봉, 산원, 박희도, 이공윤 등을 죽였다. 또한 그 일당 50여인을 섬으로 귀양보냈으며, 추밀부사 김중구, 상장군 함연수, 상장군 이무공, 대장군 박문비가 관련되었음을 알아내면서 이들을 먼 섬으로 귀양보냈다.

1225년에 자택에 정방을 설치하여 인사권을 장악하면서 문사 등을 뽑아 소속시키면 이를 필자적이라 하였는데 고종은 허락만 할 정도로 권세가 막강하였고, 노비의 아들인 안석정을 어사증승으로 삼았다. 또한 전 유마장교를 어전을 호위하는 자로 임명하였으며, 경상도 안찰사인 권응경이 왜인의 형상을 그린 그림을 바쳤다.

1226년에는 종기를 앓아서 2품관 양부부터 7품관 연리에 이르기까지 기도하여 제사를 설치할 정도였다. 임정의 처가 독을 빨아내는 고약을 발라서 효험이 있자 고종이 임정을 공부낭중으로 제수하여 위로받았다고 하며, 이 때 광벽 익대 공신호가 된다.

1227년에는 서방을 설치하여 문객 중 유명한 선비나 유학자들을 포섭하면서 도방을 설치하여 사병을 증강시켰으며, 이 때 삼계현인 최산보가 소를 도둑질하여 현관이 이를 잡으려고 했지만 개성에서 점술로 미혹하는 것을 보고 최산보를 칭찬하면서 신임하였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최산보를 함부로 건들 수 없었으며, 앞다투어 뇌물을 주었다.

그러나 최산보가 고종은 왕을 잃을 상이라고 말하자 비밀리 장군인 김희제에게 이 얘기를 하여 김희제가 이 얘기를 한 적이 있냐고 묻는 식으로 최산보에게 얘기하도록 한다. 최산보가 상장군 노지정, 대장군 금휘, 대장군 김희제와 함께 희종을 복위시키고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것을 듣는다.

최산보를 남해, 노지정, 금휘 등을 여러 주에 유배하였으며, 최산보의 집의 재산을 몰수하다가 희종이 최산보에게 준 글을 얻었다. 장군 조시저를 보내서 희종을 강화도에서 교동도로 옮기면서 최산보를 바다에 빠뜨리면서 그 일족을 몰살한다. 또한 그 제자인 도일을 붙잡아 자백시킨 후 노지정, 금휘, 김희제, 중랑장 아윤위, 별장 신작정, 김희제의 아들 3명 등을 바다에 빠뜨리고, 그들의 처자와 형제들을 먼 곳으로 나누어 유배보냈다.

자연도에서 유배된 문대순이 근읍의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일으킨다는 소식을 듣고, 낭장 이괴를 보내서 문대순 등 5인을 잡아죽였다. 그리고 남경 사람으로 도적인 인걸이 개성으로 들어가자 기병 10여명을 보내어 잡아 죽였다.

1228년에는 오대진국공신이 되었으며 서도에서 모반하는 자가 있다는 것을 듣고 병마사를 보냈지만 찾지 못하여 이를 알린 자를 압송하였는데 이 때문에 북쪽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이를 알린 자에게 각종 물품을 주면서 제위의 산원에 임명하여 교위방에 소속시켰다. 또한 급제 박인이 일본에 화친을 하자 각종 물품을 주어 포상하였다.

자혜원을 지으려고 하는 중이 강음현에서 나무를 베려다가 감무 박봉시가 이를 금지하면서 몰수하자 대장군 대집성을 통해 부탁하여 편지를 보내 청하였다. 이를 듣고 교정소를 통해 다른 곳으로 알렸지만 박봉시가 이를 따르지 않자 대집성의 부탁으로 박봉시를 먼 곳으로 귀양보낸다.

임피 현령인 전승우가 상장군 김현보의 논밭에 있는 조를 모두 거두어 밭을 백성에게 주었고, 김현보가 안찰사 최종유에게 다시 그 조를 징수하려고 했지만 전승우가 법사를 통해 이 둘을 탄핵하자 그 편지를 빼앗고 이를 그만두게 하였다. 그리고 국학박사 김정립, 국학박사 백양필 등이 학록 염수장, 직학 경유 등이 시정을 비방한다고 하자 이들을 가구옥에 가뒀다가 염수장을 신초도, 경유를 거제도에 유배보낸다.

1229년에는 이웃집 100여 곳을 빼앗아 격구장을 만들고[2] 56일 동안 잔치를 하였으며, 격구를 장려하여 이를 열었는데 격구에 능한 자들에게는 상을 주면서 격구장에 있는 다락 3간을 증축[3] 하였다. 그리고 곡식이 크게 가물었다고 하여 5도에 사자를 보내어 손실을 검사하게 하였다.

1231년 나라에서 고종의 어련(임금의 가마)을 끌고 다닐 도구를 구하기 위해 송나라 상인에게 물소 뿔을 사오게 했지만 그 때 송나라에서는 고려에서 물소 뿔로 활을 만든다는 것을 알고 이를 금지했다. 하지만 송나라 상인이 최우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산 채로 물소를 바치자 송나라 상인에게 인삼, 포를 주면서 사사로이 어련을 만들어 고종에게 바쳤다.

3 몽골 침입과 강화 천도

1225년에 몽골 사신 저고여가 국경에서 피살당한 사건을 빌미로 권황제 살리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이 제1차 침입을 하면서 개경이 포위당하였고 위협을 느낀 최우는 재추회의를 열어 강화도 천도를 논의하였다. 이에 조정 신하의 대부분이 반대하자 본보기로 자신의 사병인 삼별초의 야별초의 지유인 김세충을 죽이고 수도를 강화도로 천도하기로 결정한다. 수도를 강화도로 천도한 것 때문에 훼이크다 이 병신들아!! 1232년에 살리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이 홍복원을 대동하여 제2차 침입을 개시하였으며, 살리타이가 처인성에서 사살당한 것을 계기로 강화를 체결하게 된다.

강화가 이루어지자 성을 쌓아 몽골군에 대비하였고 그 공으로 진양후로 책봉되자 대대적으로 개인 사저를 건축하기 시작하였으며, 자신의 부하들을 시켜 서북면의 여러 성에 머물러 있는 다루가치들을 제거하려고 하였으나 이를 실패한다. 강화도로 천도하면서 또다시 다루가치 제거를 계획하였지만 몽골군이 보복할까 두려웠던 백성들의 반발을 사게 된다.

수도를 강화도로 천도하게 되자 개경과 충주, 경주 등에서 민란이 일어나게 되었고 처음에는 회유책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회유책을 사용한 충주에서 또다시 민란이 일어나자 군사들을 보내어 강경진압을 하였다.

1234년에 고종이 강화로 천도한 공으로 후에 봉하지만 조서에 맞을 예물이 준비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부하였으며, 여러 주군에 다투어 선물을 보내자 진양후에 봉해졌다. 1월에 전국의 장정들을 징발하여 관아 및 공공건물을 건축하여 왕도의 기반 시설을 마련하고 사병인 도방과 국가 상비군 4천명을 동원하여 자신의 사택을 지었다.

또한 2천명을 동원하여 고종이 거처할 궁궐을 지으면서 사사로이 얼음을 저장하기 위해 서산에서 백성들을 징발하였다. 자신의 사저가 완성된 이후에도 여러 기화요초들을 옮겨와 심었으며 운반하는 섬의 주민들까지 강제 동원하여 주민들이 집을 버리고 산으로 도망쳤다. 죽을 때까지 틈틈이 자신의 사저를 조영하여 확장 공사를 하였으며 자신의 사저는 진양부라고 불렀다.

안양산의 잣나무를 취하여 문객인 장군 박승분에게 이를 심게 하였으며, 최종준을 위해 이틀 만에 지었는데 길에 가는 사람의 말을 빼앗아서 행인이 이를 원망하였다. 1235년에 교위인 조보수가 고종형인 대장군 송백공이 반란을 일으킨다고 하자 송백공을 강에 던지면서 조보수를 낭장으로 삼았다.

고종이 진양이 최우의 식읍이 되었기 때문에 창별감 왕중선의 벼슬을 박탈하려고 하자 왕중선을 용서해달라고 청하였다. 대사성 송국첨, 간의 홍균 등을 보내서 안남의 지세를 살피고 개천을 파서 바다에 통하려고 하다가 불가능하므로 중지하였으며, 울릉도에 백성들을 옮겼다.

이 때 수도를 강화도로 천도한 것을 몽골이 추궁하고 이에 대해 답변을 회피하자 1235년부터 탕우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이 제3차 침입을 하여 세 차례에 걸쳐 공격한다. 1238년에 영녕공 준을 인질로 보내어 화친을 하게 되었으며 이후에 전횡을 자행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산다.

몽골군의 침공이 없었던 1243년에는 국자감을 수축하고 쌀 300곡을 양현고에 시주로 바쳤으며 또한 장학에 힘쓰면서 사재를 털어 재조대장경을 완성하게 하였다. 전체적으로는 몽골군의 침공에 대비하지 않고 성대한 잔치나 연회만 계속 하였다.

1244년에 낭장 신착을 안찰사로 삼았으며, 정신 이선이 이를 탄핵하자 이선을 연주부사로 강등시켰으며, 대경 임경순의 아들인 임환이 글씨를 잘 쓰자 아들로 삼고 성을 최로 고쳐서 장군에 제수하였다. 사사로이 짠 노란 비단으로 강안전 후벽의 장지문을 장식하면서 임환에게 무일편을 쓰게 하였으며, 고종으로부터 매우 많은 상을 받았다.

4 말년

1245년 4월 8일에 연등회를 벌이면서 5월에는 종실과 사공 이상의 관원들에게 대접하는 잔치를 벌여 음악을 담당하는 관아인 팔방상에게 백금을 3근씩 주었으며, 음악 관원들과 중서, 추밀원의 기생, 재주꾼 등에게 금백을 주었다고 한다.

1246년에는 고종과 3품 이상의 관원들을 대접하는 잔치를 벌였으며, 또 일찍이 여러 관원과 여러 장군들을 대접하였다가 음악 관원들에게 음악을 하도록 지시했지만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과 번개가 치자 이를 중지하였다.

1247년에 아무칸이 이끄는 몽골군 선발대가 홍복원을 대동하여 제4차 침입을 하는데 황해도 연안의 염주란 곳에 주둔하여 강화도에 있는 고려군을 위협하면서 동주, 춘주, 양근, 양주 등을 공격했다. 이에 사신을 파견하여 전면전을 피하고 몽골군을 물러가게 하려고 하였는데 고려의 사신이 파견된 이후에 1248년 3월에 몽골에서 구유크 칸이 병사하였기 때문에 몽골군이 철수하게 된다.

1249년 11월에 병사하여 그의 묘는 강종의 묘에 배향되었으며, 그가 죽은 지 13년 후인 1262년에 천도공신으로 공신당 벽상에 도형되었다고 한다. 아들인 최항이 뒤를 이었다.

5 사후

강화도 고려산 일대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김준최의를 살해하여 최씨정권을 붕괴한 무오정변을 일으킨 후 그때까지 유지되고 있던 직위와 공신등의 직위는 모두 몰수되었다. 그러나 그의 무덤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며 일제강점기 중기 도굴꾼 야마모토에게 무덤이 도굴되었다. 그의 무덤에서 나온 고려청자는 수집가 스즈키 다케오에게 당시 돈 1000원[4] [5]에 팔렸다. 이 후 대구치과의사 신창재에게 4000원에 팔렸고 자금압박을 받은 신창재는 서울의 골동품상 마에다 사이이치로를 찾아가서 6000원에 팔았다. 감탄을 연발하며 바라보던 마에다는 실제 도자기에 새겨진 학은 69마리였지만 이것을 빙빙 돌리면 천 마리의 학이 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천학매병'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조선총독부에서 1만원을 주겠다고 팔라고 한 것을 거절한 마에다는 후환이 두려워 수집가들에게 연판을 돌렸다. 1935년 봄, 간송 전형필은 2만원[6]에 사들인다고 했으나, 마에다는 이를 비웃었다. 하지만 전형필은 한 푼도 깎지 않고 이것을 사들였고 오사카에 있던 대소장가 무라카미가 이 소문을 듣고 현해탄을 건너 찾아왔다. 나이가 50이 넘은 무라카미는 30살의 전형필에게 정중하게 예의를 갖추며 구입한 가격의 2배를 줄테니 팔라고 청했다. 이에 간송은 이 것보다 더 좋은 청자를 준다면 시세대로 주고 동시에 2만원에 그대로 팔겠다고 했다. 무라카미는 이 것보다 좋은 청자는 찾을 수가 없다고 호탕하게 웃으며 포기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이것이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국보 제68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이다.

6 후계자

일찍이 적자가 없고 폐출된 기생인 서련방을 통해 두 아들인 최만종, 최만전(최항)을 낳았다. 원래는 사위인 김약선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은 한편 두 아들이 난을 일으킬 것을 염려하여 송광사에 보내 머리를 깎게 하고 최만종을 단속사에, 최만전을 쌍봉사에 거주하게 하였다.

두 아들이 무뢰승을 모아 문도로 삼으면서 재물 불리기에만 일삼아서 경상도의 쌀을 함부로 징수하였으며, 그들의 문도들이 함부로 행패를 부리자 형부상서 박훤이 이를 고하면서 경상도 순문사 송국첨이 이를 글로 올렸다. 박훤의 조언에 따라 최만종, 최만전을 소환하여 순문 안찰사를 시키고 그 문도들을 모두 가두도록 하면서 어사 오찬, 행수 주영규 등을 쌍봉사, 단속사에 보내 전곡을 내서 그 주인들에게 모두 돌려주었다.

최만종, 최만전이 개성으로 와서 누이인 송서의 처와 함께 아버지인 최우에게 자신들을 핍박하여 죽을 곳을 알지 못한다고 호소하자 이를 후회하면서 박훤이 부자를 이간한다는 죄목으로 흑산도로 귀양을 보내고, 송국첨을 동경 부유수로 강등시킨다. 최만전을 귀속시키면서 이름을 최항이라 고쳤다.

후계자로 낙점해두었던 김약선의 아내였던 최우의 딸이 종과 간통을 하다가 탄로날까봐 두려워 최우에게 무고하였고, 이를 믿은 최우는 김약선을 제거하고 최항을 후계자로 삼는다.

무신정권 시대 통틀어 가장 오랫동안 집권한 사람이며 최충헌과 함께 둘 밖에 안되는 장기집권을 누린 사람이기도 하다. 아들 최항의 집권기간은 8년으로 그럭저럭 해먹었지만 장기집권이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며 손자 최의는 1년 밖에 권력을 누리지 못했고 임연, 임유무도 1~2년만에 사망했다. 최우 이후로 가장 오랫동안 권력을 누린 김준도 10년 남짓.

7 평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 글을 잘짓고 글씨를 잘 쓰는 덕분에 문신들의 호감을 받았고 최우 역시 아버지인 최충헌과는 달리 문신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펼치는 듯 했으나, 결국 이것도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요인으로 사용했을 뿐이었다.

자택에 기관을 설치하여 사대부들을 본격적으로 등용한 것도 바로 이때인데 최우가 새로운 정치적 세력을 등용하기 시작하자 이를 못 마땅하게 여긴 무장세력들은 최우에게 반감을 나타내었고 최우는 이를 철저하게 진압하는 한편, 정규군을 믿지 못하겠다고 판단하여 단순한 경호대에 불과하였던 별초를 강화, 재편하여 야별초를 창설하는데 야별초의 크기가 비대해지자 좌, 우별초로 나누어 재편성하였고 몽골과의 전쟁에서 포로가 된 자들 중 탈출한 자들을 모아 신의군을 창설하여 이에 편입시킨 것이 삼별초다.

경호대 수준이었던 야별초가 최우에게 총애를 받으면서 삼별초로 변해 정예화 되면서 고려 정규군의 심각한 질적 저하와 몽골과의 전쟁에서 극심한 혼란을 가져왔는데 친위대의 성격을 띄고 있던 삼별초와 정규군의 명령체계는 다를 수 밖에 없었고 정규군의 명령을 삼별초가 따르지 않든가 삼별초의 명령을 정규군이 따르지 않는 등의 내부 분열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덕분에 여몽전쟁 시기의 고려군이 이전의 여요전쟁에서 처럼 보였던 야전에서 대규모로 격돌하는 등의 전투는 커녕 제대로 반격조차 못하고 각개격파 당했다. 당시 고려군이 문벌귀족들이 설친 덕분에 전투력이 막장이 되어있었다고는 하나 최충헌 생전에 김취려의 지휘로 고려로 침입한 거란의 잔당을 야전에서 격파하는 등, 고려군은 전투에 있어서 만큼은 프로들이었다.

몽골과의 전쟁이 격렬해지자 통일된 체계를 갖추지 못한 채 임기응변으로 대응하다 각개격파당하던 고려 정규군이 사실상 붕괴해버렸고 이후 삼별초 이외엔 몽골군과 싸울 수 있는 군대가 거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임유무의 죽음으로 무신정권이 끝나자 삼별초가 숙청을 두려워해 봉기를 일으킨 것도, 몽골과 연합하였다고는 하나 진압군이 그렇게 삼별초를 몰아댔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재미있는 것은 정작 최씨 정권기에는 오로지 강화도에만 짱박혀 있었단 거다. 최씨 정권을 유지하는 실질적인 무력 집단이었기에 절대 강화도 수비에만 투입했으며 정작 삼별초 장교들이 '우리도 나가 싸우겠다!'라고 외치자 겨우 수십~수백 단위의 소부대만 보내 유격전을 치루는가 하면 그나마도 몽골의 공세가 계속되어 강화도의 보급로가 위협받자 조금씩 내보낸 것에 불과했다. 훗날 최씨 정권이 무너지자 그때서야 삼별초가 육지로 나가 교전을 벌였는데 이 때쯤 되면 수천 명 단위의 야전을 벌이기도 했다.

개경을 버리고 강화도로 천도한 것이 결정타였는데 도성이 위급해서 피난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강화도에서 자신의 저택을 조성하여 이름을 진양부라고 지어 자신만의 정부기관을 만들어 버리는 등 장기적으로 섬생활을 하려 하자 침공의 명분을 얻은 몽골군은 미쳐 날뛰었고 본토의 정규군들은 조정과의 연계가 제대로 되지 않아 몽골군을 상대로 통일된 행동을 하지 못해 처참하게 각개격파당하면서 붕괴되어 갔다.

특히 고려 전체가 박살이 나버린 몽골군의 3차 침공 이후엔 자포자기했는지 나라가 작살이 난 상황에서도 시원하게 잔치를 벌이거나 연회를 벌이는 등 전쟁을 끝낼 별다른 비전도 없이 세월아~ 내월아~ 하고 있었으며 그 와중에도 본인의 권력 유지를 위해 안주하는 등 왕의 천도마저도 본인의 권력 강화를 위해 사용하였던 것이다.

비전 없이 강화도에 처박혀 버린 상황이 암울하게 느껴졌는지 틈만 나면 사찰에 시주하거나 대장경을 만드는 일을 하였다.[7] 다만, 팔만대장경 같은 경우, 몽골의 침입으로 초조대장경이 불타버린 상황에서 고려 백성들의 모랄빵을 막기 위한 측면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거란의 침입을 이기는 데 기여하였다고 굳게 믿던 장경이 몽골의 침입에 법력을 발휘하기는 커녕 허무하게 불타는 것을 본 불교를 믿던 당시의 고려 민중 및 지배층의 심리적 쇼크는 상당했을 것이다.

이전의 무신정권 집정자들과 마찬가지로 나라의 안정을 생각하는 대신 여몽전쟁 이라는 희대의 국난 속에서도 자신의 권력 유지만을 생각하던 인물이었으며 말년엔 아들인 최항에게 권력을 물려주어 대를 잇게 하는, 결국엔 최충헌의 전철을 밟았던 인물이었다.

8 대중매체에서의 최우

KBS 사극 무인시대에서는 정재곤이, 2012년 MBC 사극 무신에서는 정보석이 이 사람 역을 맡았다.

사극 역사상 최우가 메인으로 나오는 진행은 무신이 처음인데 무인시대의 경우에는 포커스 자체가 최우가 아닌 최충헌인 탓에 별 비중은 없는 역할이었으나 무신의 경우엔 중반까지 극 흐름을 좌우하는 비중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무신의 또다른 주인공.

꽤나 정치력이 뛰어난 인물로 묘사되는데 정보석 특유의 샤프한 인상과 합쳐서 매우 매력적인 인물로 그려졌다.
물론 권력을 위해서는 인명살상은 기본에다가 가족도 서슴없이 해치는 비정한 모습도 내보이는데 후계자가 될 재목이 못된다고 판단하자 김약선을 가차없이 죽이고 심지어 자신의 딸 조차도 결국 사약을 내려서 죽인다.[8]
또한 죽기 직전에 최항의 집권에 방해가 될 것임을 예상하고 신진무장세력들이나 이에 동조하는 조정중신들을 모조리 살해하고 심지어 자기 자식이기도 한 최항의 형인 만종을 살해하라는 명을 내릴 정도로 잔혹한 모습을 보인다.
패기 넘치게 덤볐으나 일방적으로 관광 당하면서 자신에게 처음으로 쓴 맛을 보게 한 1차 여몽전쟁 이후 몽고와의 전쟁을 총지휘 하면서 강화천도라는 극약처방까지 쓰면서까지 저항했으나 결국 몽고의 벽을 넘지 못하여 임종 직전 최항에게 몽고를 이겨내라고 자신의 의지를 이을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여기까지는 좋았으나...

무신에서 계속 지적되는 사항인 최씨정권의 미화문제와 최우 자신이 여몽전쟁에 대처하는 자세나[9] 몽고와의 전쟁준비가 엉망이라고 한탄하는 장면 [10], 백성을 위한다는 모습을 보면 문제가 많은 부분이 있다. [11]

중후반부로 넘어가면서 이런 부분이 수정 된 듯한 모습을 보이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아쉬운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 42화에서 사망하면서 퇴장한다.

최우가 사망하고 최항이 등장하면서 최씨정권에 암흑기가 도래한다는 설명이 나오는데, 애초에 최충헌 집권 자체가 에러, 아니 무신정권 전체가 흑역사이다.
  1. 신품4현은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서 정해진 것인데, 이규보는 최우에 의해서 등용되었다. 아부의 달인 이규보
  2. 참고로 최우의 집 주변에 살았다면 어지간한 집이지, 일반 백성이 사는 초가집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집 100여채를 헐어버리고 격구장을 지은 것이다. 당시 그 격구장의 크기가 얼마다 거대했냐면 승려 3만명이 동시에 입장해 앉아서 밥을 먹으며 격구를 구경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다. 고려판 콜로세움
  3. 이때 최우가 반농담식으로 다락을 3칸 더 증축하라고 지시했는데 이때가 오밤중 술자리였다. 그런데 정작 증축공사는 다음날 아침에 끝났다. 그날 밤을 새워 미친듯이 공사를 벌인 것이다.
  4. 1930년대 중반 금 한 돈의 값이 8원 내지 10원이었고 가죽구두가 5원이었다. 금은 현재 1돈에 15-20만원, 가죽구두는 10만-20만원 정도이니 당시 천원은 이천만원 정도라 보면 될 것이다.
  5. 당시 기와집 한 채 값이었다.
  6. 당시 기와집 20채 값이었다.
  7. 이때 팔만대장경이 만들어졌다
  8. 자신의 딸이 김준을 기다리며 사약을 돌려보내자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다시 사약을 보내는데 이때 최우의 잔혹함에 질린 대씨부인의 표정이 일품이다
  9. 강화도에서 장수들을 선발해 몽고군과의 유격전을 벌이라고 하는데 사실 말이 안되는 전술이다. 강화도에서 뽑아 봤자 얼마나 뽑을 것이며 또 앞에서 설명 했듯이 그들 자체가 삼별초소속이라서 정규군과의 연대는 당연히 X 고로 죽어 나가는 건 고려백성들 밖에 없는 무식한 전술이다.
  10. 고려가 그 꼬라지로 작살나는데는 그 아비인 최충헌을 비롯하여 자신의 책임이 매우크다
  11. 도방이 곧 백성이라고 하는 부분을 보면 대략 정신이 멍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