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 코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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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fael Correa 1963-

에콰도르의 91대 대통령이자 경제학자[1]키토의 중산층 집안에서 출생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5년간 마약사범으로 감옥에 수감되면서 어려움을 겪었고 고등학교때도 경제적으로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는데 그럼에도 콰야킬 가톨릭 산티아고 대학에 진학하면서 경제학을 전공했고 졸업후에 성 프란시스코 회의 지원을 받아 숨바와라는 소도시에서 몇년간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나서 벨기에 루벤 대학교로 유학가서 석사학위를 따냈으며 이후로 에콰도르 교육환경 개선을 위한 연구에도 참여하다가 미국 일리노이 대로 유학가서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제자가 되며 박사학위를 따냈다. 이 때 그는 장하준과도 인연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한국에 대해서 상당히 잘 알게되었다고 한다.

2005년에 알프레도 팔라시오 대통령 치하에서 경제재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라파엘 코레아는 석유산업 국유화를 통해[2] 그 비용을 다른 산업 및 교육-복지 비용으로 쓸것을 주장하고 긴축정책을 완화해야한다고 하면서 국제통화기금과 마찰을 일으켰고 결국 알프레도 팔라시오 대통령도 국제통화기금의 조치에 따라갈려고 하자 이에 적극적으로 반발하여 경제재무부 장관직을 사퇴했다. 그의 행동은 무례하기는 했지만 국제통화기금에 질릴대로 질린 여론의 지지를 얻었고[3] 경제학자라는 직함도 달고 있기 때문에 페루의 오얀타 우말라와는 다르게 압도적으로 지지를 받으며 알바로 노보아를 앞도적으로 누르면서 당선되었다. 그는 집권 초기부터 차베스, 에보 모랄레스와 상당히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였으며 OPEC에 재가입하고[4] 개헌을 통해 여러 개혁안과 대통령의 권한 강화등을 이뤄냈다. 물론 야권의 반발을 사게 되었지만 지지율이 높았기에 야권과 적절히 타협을 하는 방식으로 넘어갔다.

2008년 하반기에 유가가 폭락하면서 2009년에 채무불이행을 선언했지만[5] 상당히 정치적인 목적이 큰데다가 2010년에 괄목한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며 회복하는데 성공했고 브라질과도 채무조정을 성공적으로 해냈기 때문에 큰 탈없이 지나갔다.

2010년에 교육개혁안과 경찰개혁안과 관련해서 교사들과 경찰관들이 대거 반발하면서 감금을 당하기까지 했지만 반발은 무마되었고 2010년부터 2014년까지 에콰도르는 경제적으로 건실하게 성장세를 이어갔고 월급수준도 크게 올라갔으며 라파엘 코레아도 2013년 대선에서 여유있게 압승을 거두며 집권을 이어나갔다.[6] 그러나 2015년에 유가폭락으로 세수가 급속히 줄면서 가용예산이 크게 줄어들었고 이로 말미않아 키토 지하철 건설이 지연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를 일단 부유층들을 대상으로 한 세금신설도 하고 예산삭감도 단행했지만 경기가 크게 침체되었고 부유층들을 대상으로 한 세금신설과 상속세 납부기준 완화로 콰야킬 일대 부유층과 중산층들이 대거 반발하여 시위가 상당한 규모로 일어나서 상당한 위기에 처했기도 했다.

그래도 2016년 1분기에는 유가가 2000년대 초반 이래 최저수준을 보이는 수준에서 경상수지 흑자를 내고 유가도 바닥에서 올라가면서 그런대로 경제위기 국면이 끝나나 싶었는데 2016년 에콰도르 지진국면에서 전두지휘했지만 수습에 있어서는 상당히 무능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지진 피해자들에게 상당히 까이고 있고 지지율도 상당히 떨어졌다. 확실히 경제학자라서 그런지 피해비용 마련안을 재빠르게 만들기는 했지만 피해복구가 그리 효율적으로 이루워지지 않은것이 컸다. 여하튼 지진국면이 지나고 나서는 외교노선도 조금 변화했다. 이후로는 저조한 지지율에 시달리고 있기는 했지만 라파엘 코레아 지지측에서 라파엘 코레아 4선을 위한 대대적인 서명운동을 벌였는데 의외로 서명하는 사람이 많아[7]서명자수가 100만을 넘을 정도였지만 라파엘 코레아 본인이 4선에 직접 출마하는걸 고사하면서 부통령인 레닌 모레노[8]가 대신 출마하게 되었다. 2017년 대선에서 야권유력 후보가 하필이면 경제위기가 닥쳤던 1999년도에 재정부문 차관을 역임한 기예르모 올가미인지라[9] 지지율이 떨어지기는 해도 파이스 연립당이 결선투표를 거치지 않고 안정적으로 정권재창출 할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여하튼 이런저런 상황에서도 여러모로 권위주의적인 면모를 드러내기도 했고 임기연장을 위해 개헌을 추진하기도 했는데 이런저런 상황이 펼쳐지면서 입장이 오락가락한데다가 2016년 지진이후로는 4선을 포기했다. 그러나 상당히 권위주의적인 면모를 드러냄에도 비교적 높은 지지를 얻었는데 1979년 민주화 이래부터(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8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20여년 동안 매번 뒤통수만 맞은 영향이 컸다. 사실 우파측으로 선출되나 좌파측으로 선출되나 IMF의 등쌀에 독자적인 경제정책같은건 제대로 짤수없었던 상황이었는데 라파엘 코라아는 그간의 대통령 가운데서 오랬만에 독자적인 경제정책을 진행한 인물이라서 에콰도르인이 볼때는 굉장히 나은 대통령 정도로 보인다는 듯하다. 물론 그렇다고해서 라파엘 코레아 자신이 뒷통수를 친 일이 없는건 아니라서[10] 자신이 대통령에 당선되면 원주민 자치지역의 석유개발을 제한하겠다고 공약했는데 재정수입을 늘릴려고 원주민 거주지역의 석유개발을 강행하는 일을 벌이기도 했고, 그래서 상당수 원주민 단체와 등을 돌리기도 했다.[11] 그리고 에콰도르인이라고 해도 대도시 부유층들은 라파엘 코레아를 그다지 곱게 보지 않는데 이건 집권기간 중에 세금을 올려 먹었고 동성커플 법제화도 추진하는 정책도 펼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사들 사이에서도 교육개혁을 실행한 일때문에 몇년에 한번씩 평가를 받게 생겨버렸기 때문에 라파엘 코레아에 대한 평은 매우 안 좋다.(...)

다만 사실 사실상의 채무탕감이나 재조정을 받은것도 그렇고 꽤나 위험한 위기를 넘어간걸 보면 고유가라는 호조를 탄걸 감안하더라도 역대 에콰도르 대통령 가운데서는 정치감각이 뛰어난 인물인건 맞기는 하다 전에 대통령에 재직했던 루시오 구티에레스[12]도 이라크 전과 베네수엘라 석유파업이라는 기회를 잡았는데도 놓친걸 보면 말이다. 다만 측근관리를 제대로 못하는지 부패 스캔들이 종종일어난다는게 문제다 장하준하고 친하게 지내는데다가 경제정책에 있어서 한국의 사례를 상당히 참고하는 편이기때문에 한국에 우호적인 인물이지만[13] 안습하게도 한국에서는 한국언론에서 잘 보도되지 않아서 그리 유명한 인물이 아닌데(...) 에콰도르 자체가 그리 큰 나라가 아닌데다가[14] 한국언론 특성상 영미권 언론 기사를 받아쓰기 하는 경향때문인듯. 그리고 미국에서 유학했지만 미국에 상당한 반감을 지닌데다가 우고 차베스피델 카스트로, 다니엘 오르테가등과도 매우 친하게 지내다보니 보수언론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대대적으로 띄어주기가 껄끄럽고 뭐 예전에는 대놓고 반미를 표방하던 카다피를 많이 띄어주기도 했다만 진보언론 입장에서도 라파엘 코레아가 참고하는 한국의 발전방식이라는것이 70-80년대 한국의 사례를 뜻하는 경우가 많아서 대놓고 식으로 띄어주기가 묘한면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 스페인어를 못해서 그런거 아닌가?

그런 영미권 언론들의 무관심에 비해서[15]본인은 자기주장에 아주 적극적이다. 어느정도냐면 프랑스의 세계적인 월간신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대통령신분으로 기고한적이 있는가 하면 미국 공영방송 PBS의 여행프로에 직접 출연(!)해# 에콰도르 관광지를 소개하는 등 외부에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하긴 오바마도 베어그릴스의 야생생존 프로에 출연한적이 있긴 하다

이외에도 특기할 점으로는 위키리스크를 설립한 줄리언 어산지의 망명을 받아들였다는것인데[16] 대체적으로 국제적으로 평판을 높이면서도 보수정권과 언론의 반발을 잠재울려고 망명을 받아들였다는 평이 대다수이며 망명을 받아들인 초기에는 나름대로 유용했지만 2016년 이후로 어산지가 클린턴 저격에 집중하면서 상당한 골칫덩어리가 되었다고...

선거이력

연도선거종류소속정당1차 투표 득표수(득표율)2차 투표 득표수(득표율)당락여부
20062006년 에콰도르 대통령 선거조국동맹1.246.333 (22.8%)3.517.635(56.7%)당선
20072007년 에콰도르 제헌선거[17]조국동맹2806004(69.5%)1차에서 당선당선
20092009년 에콰도르 대통령 선거조국동맹3586439(52.0%)1차에서 당선당선
20132013년 에콰도르 대통령 선거조국동맹4918482(57.2%)1차에서 당선당선
  1. 정치이념으로 21세기 사회주의를 내세우기는 했지만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며 케인지언에 가깝다.(사실 21세기 사회주의라는것이 신자유주의에 반대한다는 점을 빼면 특별한 경제적인 이념이라고 치기는 뭐하다. 니카라과만 해도 미국과 FTA를 체결했을 정도니까.) 애초에 조지프 스티글리츠에게 수학을 받았기 때문이다. 제도주의의 영향을 받았다지만 나름대로 주류는 주류인것
  2. 당시 에콰도르 석유산업을 다국적 기업이 차지하다시피했는데 로열티로 벌어들이는 비용때문에 유가상승에도 에콰도르 정부가 생각보다 재미를 못봤고, 그나마도 석유수입을 통해 얻는 돈의 대다수를 외채상환에 썼던 상황이다.
  3. 에콰도르 역사에서 1980년대 초부터 2000년대 초까지는 IMF 강점기라고 해도 결코 틀린말은 아니며 좌우 가릴거없이 뒤통수 치기로 일관했던것도 바로 이 문제와 연관이 있다. 1980년대 외채위기로 인해서 빚에 짖눌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4. 에콰도르도 197-80년대에 걸쳐 OPEC의 회원국이었던 시절이 있었지만 1980년대 중반의 저유가로 인해 탈퇴했다.
  5. 이때가 한창 유가가 하락했기때문에 유가하락으로 디폴트를 선언한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유가하락과는 별로 관련이 없는 문제이며 2015년 이후로 베네수엘라에서 심심치않게 얘기되는 디폴트와는 차원이 다른 얘기다.
  6. 이때 라파엘 코레아의 측근 중 일부가 부정부패 사건에 연루되었을때고 우고 차베스가 사망할때라서 지지율이 다소 떨어질것이라는 얘기도 나왔지만 그런것과 상관없이 1차에서 여유있게 승리했다,
  7. 애초에 니콜라스 마두로나 지우마 호세프가 지지기반을 관리하지 못할정도로 경제가 악화되는바람에 탄핵위기에 처하거나 탄핵을 당할지경이 되기는 했지만 에콰도르는 그에 비하면 타격이 상대적으로 덜한편인지라 지지기반 자체는 꽤나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8. 에콰도르의 대표적인 장애인 출신 정치인인데 2007년부터 부통령직을 지냈다. 부통령으로써는 크게 눈에 띄지는 않지만 장애인 관련 정책에서는 이름이 높은 편.
  9. 정식으로 재직한건 몇달 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도 페널티가 되는건 사실이고 2013년 대선 당시 토론에서도 세금을 내려야한다라고 발언했다가 라파엘 코레아에게 세금없으면 정부사업을 어떻게 진행하라고?라는 발언에 직격탄은 맞아서 20% 초의 득표율을 얻는데 그치기도 했다. 그래도 콰야킬등 서부 대도시를 중심으로 지지세는 있는 편.
  10. 뒤통수를 덜쳤다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에콰도르 민주화 이후의 대통령 가운데서 비교적 뒤통수를 덜 쳤다는 얘기다.
  11. 그래서 이들 원주민 단체들이 라파엘 코레아에 반대하는 시위를 꽤나 자주 주동한다는 후문도 있다.
  12. 원래는 2000년에 쿠데타를 벌였다가 실패한 경력도 있고 대통령 당선 이전에는 상당히 급진좌파적인 발언을 했기에 집권후에 우고 차베스와 비슷한 성향의 대통령이 될것으로 예측되기는 했지만 정작 대통령에 취임된 이후에는 IMF의 구제금융 조건을 받아들여 기존의 경제정책을 유지하여 지지자들의 뒤통수를 상큼하게 날려먹었고 이후로도 실정을 해서 대통령직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2000년대 후반에 귀국하여 2007년 대선에 출마하기도 했고, 2009년 대선에서도 출마했는데 라파엘 코레아에게 철저하게 발려먹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22%의 상당한 지지율을 확보하는 기몀을 토해내기는 했다. 다만 이후로는 2010년 경찰관 파업때 파업을 주도한것을 제외하면 점차 듣보화되는 중...
  13. 실제로 에콰도르 내의 인프라 건설 정책이나 교육정책에서 한국의 영향이 짙으며 국무회의에서도 한국을 언급하는 경우가 꽤 빈번하다.
  14. 다만 남미 기준에서나 작은 나라지 당연히 남한보다 영토가 훨씬 넓고 남북한 합쳐도 에콰도르가 더 넓다.
  15. 사실 에콰도르 자체가 남미에서 작은나라다보니 영향력이 약한데다가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렸던 룰라와 우고 차베스에 비해 후발주자고, 니콜라스 마두로지우마 호세프처럼 경제위기로 탄핵을 당하거나 탄핵을 당할 위기에 처한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우파인 인물도 아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자극적으로 기사를 쓸만한꺼리가 적어서 관심을 덜받는다.
  16. 그렇지만 어신지는 에콰도르 대사관에서 숙식을 할뿐이지, 에콰도르에 방문한적은 없다. 왜 그러냐면 영국 경찰이 스노든이 밖으로 나갈 경우에는 바로 잡아서 송환시킬것이라고 엄포를 놓았기 때문이다.
  17. 이 선거는 개헌에 대한 국민투표 겸 재신임 투표의 성격으로 치러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