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통화기금

국제통화기금
國濟通貨基金
INTERNATIONAL MONETARY F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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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줄여서 임프 IMF. 아마도 국내에서 사람들이 UN, FIFA 다음으로 가장 많이 알고 있는 국제기구일 것이다.

한마디로 특정 국가에 달러가 부족할 경우 달러를 빌려주는 기구이다. 각 선진국들이 일정량 펀드형태로 출자를 하여 기금을 조성한다. 물론 같은 비용으로 출자를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별 특별인출권(Special Drawing Rights)에 맞춰 쿼타(Quota) 형식으로 출자를 한다.[1]

주로 유동성의 위기로 갑자기 달러화 부족을 겪는 국가나 방만한 재정정책으로 외화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국가들[2]이 IMF에 요청을 하게 되는데, 요청을 하게 될 경우 해당 국가의 신용도가 깎이는 것은 물론이고, IMF의 지시에 따라 그 나라 경제 구조 자체를 재편해야 하는 것에 그 무서움이 있다. 물론 명분은 경제적 개혁이지만 그 과정에서 해당 국가의 기업 등이 외국에 싼 값으로 팔려나가기도 한다. 즉 국가 경제가 다른 나라로 뜯겨 나가게 된다. 이쯤되면 한 나라가 무너지는건 순식간이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구제금융을 받았거나 받았던적이 있는 국가들에게 IMF가 좋은 소리를 듣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고, IMF의 정책에 따르는 정부에 대한 불만으로 정권이 뒤엎어지는건 그나마 양반이고 심하면 사회적 갈등까지도 벌어져 전쟁까지 일어나게 된 일까지도 있기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이 사례중에서 그나마 긍정적으로 볼수있는 예라면 동구권 체제 붕괴에 거드는 역할을 했다는 점 정도가 있다(...) 한국의 경우는 그나마 다행인 사례인 것.

대한민국김영삼 정권(1997년 11월) 때 국고가 파탄나 결국 이 기구로부터 기금을 조달받는 대가로 국내 경제구조를 전반적으로 거의 재편하는 수준의 강도 높은 요구사항에 순응해야 했다.[3]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한국이 IMF에서 돈을 빌린 것은 1998년이 처음이 아니다. IMF 공식자료 1965년부터 1985년까지 지속적으로 IMF에서 돈을 빌렸으나 97년 외환위기와 같은 IMF관리 체제는 아니였다. IMF 대출 계정에는 크게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마이너스 통장과 같이 제한된 한도 내에서 자유롭게 빌릴 수 있는 차입예약협정(Stand-by Agreement)과 무제한 한도인 대신 98년 IMF사태와 같이 부채상환이 완료 될 때까지 IMF가 경제정책을 좌지우지 하는 긴급수혈자금 (Supplemental Reserve Facility)로 나뉘어진다. 위의 링크 내용과 같이 지금까지 대한민국이 IMF에서 돈을 빌린 횟수는 차입예약협정과 긴급수혈자금 모두 합쳐 18회이지만 긴급수혈자금은 1997년이 처음이였고 IMF의 강도높은 경제개혁으로 인해 그 충격파가 어마어마 했던 것이다. [4]

2 역사

2.1 브레튼 우즈 체제와 IMF의 출범

18세기부터 국제금융체제를 지배하던 영국 파운드 스털링 중심의 금본위제1차 세계대전과 전간기 대공황을 거쳐 마감하면서 새로운 국제금융체제와 국제무역체제 대한 논의가 대두됐다. 그래서 2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던 1944년 7월 22일 미국 뉴햄프셔 주의 브레튼우즈에서 국제연합 금융·재정 회의를 통해 브레튼 우즈 체제(Bretton Woods System)가 출범하게 됐다. 이 브레튼 우즈 체제를 통해 IMF와 세계은행(IBRD)이 창설됐다. 하지만 국제무역기구(ITO)는 창설하지 못하고 50년 동안 무역과 관세에 관한 일반협정 체제(GATT 1947)에 의해 유지되다 비로소 1995년 우루과이 라운드(GATT 1994)가 시행되면서 세계무역기구(WTO)가 출범하게 된다. IMF의 첫 참가국은 29개국이었고 1947년 3월 1일 IMF 협정이 발효되어 업무 개시, 국제연합과 협정을 맺어 전문 기관이 되었다.

IMF 설립 최초에는 미국 달러화와 연동된 금태환제를 기초로 한 고정환율제로 운영됐다. 예를 들어 자세히 얘기하자면, 만일 나무위키국이 유동성의 문제로 달러가 급히 필요한데 달러화를 융통하기 위해 나무위키국이 보유한 금 1온스를 IMF에 내고 이에 상응하는 35달러를 받는 메커니즘이었다. 즉 통화스왑(Monetary Swap)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원칙적으로는 ±1% 범위 내에서 변동환율 조정이 가능하며, 국제수지의 근본적인 불균형이 있는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그 이상의 변동이 허용된다.

미국은 달러화를 융통해 주는 대신 어느 정도 통화수지의 적자는 감수해야 했지만 2차 세계대전 직후 세계경제를 쥐락펴락한 미국의 정책 때문에 가능한 얘기였다. 그러나 1960년대 들어 독일, 프랑스, 일본 등의 국가들이 전후 경제부흥을 통해 세계경제의 강대국으로 발돋움 했고, 미국은 베트남 전쟁을 일으키면서 미국의 국제수지 적자가 늘어나게 되자 이 브레튼 우즈 체제는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또한 많은 나라들이 달러를 필요로 하지만 미국도 국가이기에 통화수지 정책을 시행하는데 있어 무작정 달러를 찍어낼 수는 없기에 자연스럽게 달러화의 유동성이 떨어지는 문제가 생겼고, 이와는 반대로 달러화의 국제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달러를 무작정 찍어내면 그만큼 달러화의 가치가 떨어지는 문제도 생기게 되면서 이른바 '트리핀 딜레마(Triffin Dilemma)'에 빠져들고 말았다.

2.2 스미소니언 협정-킹스턴 체제를 거쳐

이렇게 브레튼 우즈 체제가 서서히 붕괴되는 과정에서 미국과 IMF는 이를 막아보고자 1971년 12월 미국 워싱턴 D.C.스미소니언 박물관에 모여 스미소니언 협정을 출범했다. BW 체제에서 금 1온스=35달러의 금태환을 금 1온스=38.02달러로 조정, 미국 달러의 평가절하와 여기에 상응하는 독일 마르크일본 엔화의 대 달러화에 대한 평가절상에 합의했다. 또한 BW 체제에서 합의한 ±1% 변동환율폭도 2.25%로 넓히게 됐다.

하지만 이 스미소니언 체제도 2년도 안 되어 파기되고 다시 금 1온스=42.22달러로 다시 한번 평가절하 되지만 이마저도 1973년 오일 쇼크로 인한 세계경제의 둔화라는 크리를 먹으며 이것 역시 붕괴되고 만다.

결국 1976년에 자메이카 킹스턴에서 기존의 미국 달러화와 연동된 금태환제를 포기하고 대신 과도한 환율 조작을 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국가의 외환시장 개입을 존중하여 국가가 고정환율제와 변동환율제를 자유롭게 선택하게 하는 킹스턴 체제가 출범하게 된다. 또한 미 달러화 연동 금태환제의 포기에 대한 보완으로 각국의 경제능력에 맞춰 특별인출권(Special Drawing Rights)을 지급하여 IMF의 펀드출자와 비상시 각국이 달러화를 융통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

이후 국제금융질서는 1944년 브레튼 우즈 체제의 기본 방향과 킹스턴 체제의 협정 내용에 의해 운용돼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5]

3 역대 총재

대수이름국적임기
1카미유 구트벨기에1946년 5월 6일 ~ 1951년 5월 5일
2이바르 루트스웨덴1951년 8월 3일 ~ 1956년 10월 3일
3일페르 야콥스웨덴1956년 11월 21일 ~ 1963년5월 5일
4피에르폴 슈바이처프랑스1963년 9월 1일 ~ 1973년 8월 31일
5요하너스 비터베인네덜란드1973년 9월 1일 ~ 1978년 6월 16일
6자크 드 라로지에르프랑스1978년 6월 17일 ~ 1987년 1월 15일
7미셸 캉드쉬프랑스1987년 1월 16일 ~ 2000년 2월 14일
8호르스트 쾰러독일2000년 5월 1일 ~ 2004년 3월 4일
9일로드리고 라토스페인2004년 6월 7일 ~ 2007년 10월 31일
10도미니크 스트로스칸프랑스2007년 11월 1일 ~ 2011년 5월 19일
11크리스틴 라가르드프랑스2011년 7월 5일 ~ 2016년 2월 20일
12크리스틴 라가르드프랑스2016년 2월 20일 ~ 2021년 7월 5일 (예정)

미국인을 총재로 선출하는 세계은행과는 반대로 관례상 유럽인을 선출한다. 현재까지 프랑스인이 제일 많이 선출되었다.

4 IMF의 양면성

대한민국 사람들에겐 그다지 달갑지 않은 기구지만 그래도 파산 위기의 한국경제를 도와준 기구라고 볼 수 있다. 일종의 필요악이었던 셈. 당시의 혼란의 원인제공이 IMF가 아니었던만큼 학술적인 자리에서는 IMF 사태라는 말은 잘 안 쓴다. 외환위기라고 하지…[6] 한국만의 문제가 아닌 동아시아를 포함한 국가에서 연쇄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아시아 금융위기'라고 묶어서 표현한다. 그런데 당시에는 사회적 혼란이 극에 달했던 터라 IMF를 너무 과도하게 한국을 침탈하는 외세로 봤던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사실 비단 한국만의 일은 아니고 중남미 국가들이나 동유럽 국가들[7][8]. 심지어 현재의 남유럽 국가들도 이런 이유로 IMF를 싫어하는 경향이 많다.

하지만 IMF를 "위기의 한국 경제를 구해준 기구'라고 믿는 것도 순진한 인식이다. IMF를 불을 끄는 소방서라고 비유한다면, 화재진압을 하면서 대신 화재 방지 차원으로 건물 개조 계약서 먼저 싸인 받는 곳인 셈이다.[9] 고대 로마에서 삼두정치로 유명한 크라수스가 이렇게 재산을 모았지일단 여기 부를 정도로 경제가 파탄 났으면 IMF가 (당사국 주장처럼) '무리하게' 경제 구조를 재편하지 않아도 어차피 고통을 피하기는 힘들다. 불이 나서 불을 진압해야 하긴 하는데 불이 너무 번지는 바람에 중앙구조대를 부르는 거하고 비슷한 셈. 하지만 실제로는 IMF 사태가 터지기 전에도 우리나라만 해도 대출한 적이 수 없이 많고,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많은 나라가 대출을 받았다.

1980년대 이후 제 3세계의 외채위기[10]를 빌미삼아 미국은 IMF를 가지고 새로운 판짜기를 시도한다. 1980년대에는 베이커 플랜, 1990년대에는 브래디 플랜이 IMF의 요구를 대표하여 등장한다. 1980년대에는 위기가 발생한 이유를 유동성의 부족에서 찾았다. 즉 자금의 통로만 터주면 제3세계가 국내산업을 육성하느라 투자한 고정자본을 곧 회수할 수 있으리라 본 것이다. 하지만 곧 구조문제로 바라보게 된다는 점에서 전환이 일어난다. 때문에 IMF 패키지 정책이라는 것이 만들어지는데, 이는 구조조정에 대한 요구로 정리될 수 있다. 구조조정의 핵심적 요구들은 다음과 같다. 공기업민영화하고, 이자율을 높여 해외자금을 유치하고, 대대적인 인원 삭감으로 기업 효율성을 높이고(구조조정), 고용의 유연성을 늘리고, 정부의 재정지출을 대폭 삭감하라는 것이다.[11] 이것은 서유럽과 미국 등의 자본이 거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IMF의 속성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사실 이런일이 세계적으로 벌어졌던건 당시 미국과 영국에서 고금리 정책을 취하면서 제3세계 국가들이나 동구권 국가에서 이자율이 급속히 늘어난 이유가 컸는데 한창 이자율이 쌀때 빌려서 갚을시기가 되자 이자율이 급속히 올라가며 갚을 빚이 급속히 늘어나게 된것이다. 그러나 늘어나는 빚에 대한 본격적인 대책은 80년대 후반에서나 나왔고 그 사이에 많은 제3세계 국가들이 파산의 길을 걷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를 '워싱턴 컨센서스'라고 부르는데, 이에 반대하여 조지프 스티글리츠와 같은 IBRD 측의 인사들이 포스트-워싱턴 컨센서스를, 중국에서는 베이징 컨센서스 같은 것을 내세우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은 3년만에 자금을 모두 갚아서 빨리 탈출할 수 있었기에 이러한 위험성을 많이 회피한 사례다. 하지만 우리를 위기에서 구한 은인이라 생각하는 IMF가 불러온 고금리 정책과 구조조정 정책으로 인한 엄청난 정리해고와 뒤이은 비정규직법의 등장으로 외환위기 이전과 이후의 한국 사회는 많이 다른 사회가 되었다.

5 비판

'세계'나 '국제'가 이름 붙은 다국가 기구 상당수가 그러하듯 이것도 미국일본 등 소위 강대국들의 영향을 상당히 받고 있다. WTO, 세계 은행 그룹과 더불어 세계화를 상징하는 3대 구성요소. 때문에 신자유주의자들에게는 글로벌 금융의 최후의 보루로 칭송받고[12] 세계화 반대론자들에게는 만악의 근원으로 비난받고 있다. 두 주장의 책을 구해다가 IMF 이야기를 비교해 보면 과연 같은 조직을 두고 한 말이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 사실 198-90년대의 일만 놓고보면 거진 테러리스트에 가깝기는 했다

앞서 중앙구조대에 비교했는데, 불을 끄는 것 자체의 필요성은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지만 그걸 빌미로 건물 개조를 하는 게 삽질에다가 중앙구조대에 예산 주는 곳이 불난집 최대한 털어먹을 수 있게 개조한다고 까는 편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설명은 사실 구제금융 정책안 자체에 포함된 내용이기도 하다. 보통 경제위기의 극복을 단기적인 안정화정책(stabilization)로 주로 IMF가 맡으며, 구조적 비효율성을 제거하여 경제성장의 잠재력을 키우는 것이 장기적인 구조조정(structural adjustment)으로 주로 IBRD(세계은행)이 담당한다. 이 때 구조적 비효율성이란 정부의 지나친 개입에 대한 지양, 노동의 유연화, 금융과 무역의 자유화(개방화)로의 전환을 통해 해소된다고 가정된다. 그러나 대부분 안정화 자체가 구조조정과 연결되어 있으며 두 정책이 동시에 진행되기 때문에 정책목적상으로는 구분되지만 실제 시행의 효과를 엄밀히 구분한다고 보기 어렵다.(특히 1980년대 남미아프리카 국가들)

또한 보고서를 날조해서 부채를 만들어낸 후 그걸 공표해서 해당국가를 파산 시킨 경우도 있다. 일 없으면 불을 질러서라도 일을 만드는 센스. 천잰데? 현재까지 확실히 밝혀진건 과거 IMF의 직원이었던 사람이 나오면서 양심선언을 해서 확인된 트리니다드 토바고뿐이긴 하지만, 알게 모르게 이런 식으로 당한 나라가 많았다고 카더라. 물론 한국의 경우는 IMF의 공작은 아니었고, 외환 유동성위기의 원인을 아무리 나쁘게 잡아도 투기 자본들 때문이다. 그러나 대출을 요청하게 된 원인이 그럴 뿐이지, 별 일 아니었는데 IMF의 설레발 때문에 한국이 멸망의 위기를 맞이하고, 이제까지 수십년간 지속되는 경기침체를 맞이하게 한 원인인 것은 사실이므로 딱히 옹호받을 처지는 아니다.[13]

아무튼 IMF가 밀어붙인 구조조정으로 인해 직장에서 실직한 사람이 많았다. 그런 실직한 사람들의 퇴직금을 노리고 벌어진 사기로 인해 그 피해자가 자살하거나, 직장에서 짤린 충격으로 자살, 또는 이때까지 모은 돈으로 증권같은 곳에 투자를 했는데 휴지조각이 되어 그 충격으로 자살하는 등 금전적인 문제로 인해 자살하는 일들이 많이 발생하여 사회적인 이슈가 되었다.

페루알베르토 후지모리 정권 당시 페루 측에게 출산율을 줄이라는 권고를 했고 후지모리는 이를 이행하기 위해 불법적 강제 불임수술을 자행했는데 IMF측에서는 페루 정부가 이런 일을 하는 데에 우리가 간섭할 권리가 없다는 이유로 묵인했다. 참고로 후지모리 이전에 재임했던 알란 가르시아 정부가 은행 국유화 정책을 펼치자 페루에 대한 경제적인 지원을 완전히 끊어버려 페루를 파산직전에까지 몬 것에 비하면 참으로 대조적이지 않을수 없다(...) 이 외에 볼리비아나 아르헨티나, 브라질, 베네수엘라 등 여타 남미국가에도 구조조정을 강요하다가 오히려 사회구조가 막장화 되어버리는 바람에 반미감정을 키워서 좌파정당들이 대거 집권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고 심지어 유고슬라비아 내전[14] 소말리아의 막장화, 르완다 내전에도 IMF가 시행했던 경제정책이 한 몫했다는 분석도 있을 정도다.[15]이쯤되면 테러리스트 단체 급

사실 동아시아 국가들이 21세기 초에 비정상적이라 할만큼 외환보유고에 집착하는 것도 20세기 말 IMF의 쓰라린 구제금융의 기억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당장 외환이 모자라서 피를 봤던 대한민국,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는 물론이고 중국(중화인민공화국중화민국 모두)과 일본도 역시 외환 모으기에 혈안이 되어있다. 고로 동아시아 국가들이 세계에 산재한 달러를 거의 폭풍흡입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 국채 매입 역시 대부분은 동아시아 국가들이 차지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미 동아시아 국가들의 외환보유고에 대한 집착은 세계경제에도 영향을 줄 정도로 커졌고 일각에서는 이를 '동아시아의 복수'라고 칭하기도 한다

2000년대 들어 신흥국가들이 등장함에 따라 미국과 서유럽국가들 역시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2010년 G20 경주 재무장관회의에서는 기존에 과대평가를 받았던 서유럽 국가들의 특별인출권과 쿼터를 줄이는 대신, 과소평가를 받던 신흥국가들의 특별인출권과 쿼터를 늘렸다. 그리고 그동안 IMF 사무총장이 미국이나 서유럽국가 출신이었던 관례를 깨고 2012년에 중국 경제학자 린젠하이(林建海)를 IMF의 새 사무총장으로 임명했고, 뒤이어 세계은행 총재에 한국계 미국인인 김용(Jim Yong Kim) 전 다트머스 대학교 총장을 임명했다.

2015년 12월에 중국 위안화가 10.92%의 비율로 미국 달러 , 유로화 다음으로 3위의 특별인출권이 되었고

중국 같은 경우에는 주민(朱民)이 IMF 부총재직을 했었는데 이번에 물러나게되면서 후임으로 또 중국 국적의 장타오(張濤)가 내정되었다. [1]
  1. 이 때문에 IMF 내에서 각 국가의 의결권도 특별인출권에 의한 쿼타에 따라 부여받게 된다.
  2. 1980년대에는 주로 비싼 이자율을 감당못해서 모라토리엄을 선언한 국가들이 IMF로부터 재정지원을 요청했다.
  3. 이 때 롯데리아에서 IMF버거라는 걸 만든 적도 있다. 이 시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외환위기 참조.
  4. 이전 자료에서는 전두환 정권 시절 IMF관리체제를 겪었다고 했지만 긴급수혈자금이 아닌 차입예약협정으로 빌린 기금에 대해선 IMF의 의사를 따를 강제적 구속력이 없다. 따라서 대한민국에서의 IMF관리체제는 긴급수혈자금을 빌린 기간인 97년~98년이 유일하다.
  5. 물론 킹스턴 체제 이후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간의 협정이었던 플라자 합의이나 루브르 협정 등 굵직굵직한 국제통화 관련 협정들이 있었다.
  6. 보통은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Asian Financial Crisis in 1997)로 표현을 한다.
  7. 대표적인 예로 러시아를 들수있겠는데 옐친정부 시절에 IMF의 조언을 열심히 따랐다가 오히려 경제가 대망하고 결국 1998년 모라토리엄을 선언한뒤에 프리마코프가 총리가 되면서(다만 인기가 올라가자 옐친에 의해 1999년에 해임되었다.) 부분적으로 통제경졔정책을 재 시행했는데 오히려 경제가 다시 살아난 경험이 있던지라 IMF에게 크게 부정적이다.
  8. 다만 알바니아는 예외라고 볼수있는데 알바니아는 아예 국가에서 피라미드 사업을 권장했는데 IMF에서 오히려 피라미드 사업의 범람을 경고하는 보고서를 내놓았기 때문. 물론 당시 알바니아 집권여당인 민주당에서 이를 쌩깠고 그 덕분에 폭동까지 일어나며 사회당으로 정권이 교체되었다.
  9. '돈을 빌려주는 대신 상대방이 자기가 빌려준 돈을 확실히 갚을 수 있게 만들어 놓는다'고 해석하는 곳도 있다. 소방서 비유를 쓰자면, 세계구급으로 물 부족 사태가 일어나 생활용수까진 부족하지 않지만 산업용수는 맘대로 쓰지 못하는 세계에서의 소방서라고 보면 IMF가 건물 개조 계약서를 먼저 받는 것도 이해가 갈 것이다. 문제는 그러면서 생활용수까지 털어간다는 거지
  10. 이 위기조차도 미국의 폴 볼커(지미 카터 항목 참조)가 세계의 자금을 미국으로 몽땅 끌어온 것이 발단이었다. <트리핀의 딜레마>를 참고할 것
  11. 이것을 '소방서'정도로 파악하는 것은 사실 무리가 있을 정도다. 소방서가 스스로 불지르고 불끈답시고 집부수는 격이다. IMF패키지를 통해서 제3세계 국가들은 쑥대밭이 되었는데(물론 유고슬라비아와 루마니아, 불가리아, 헝가리도 마찬가지로 외채문제때문에 IMF 패키지의 영향을 간접적으로 받았고, 결국 이들 나라의 경제붕괴를 촉발시켜 체제를 전환시키는데 간적접으로나마 도움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경제위기가 일어나 부마항쟁을 촉발시켰다. 이후 전두환은 물가를 잡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하며 긴축정책을 펼쳐나가게 되며, 그러다가 80년대 중반에 '3저호황'이 일어나서 경제위기에서 벗어나게 된다.
  12. IMF가 시카고 학파와 관계가 깊기도 하다.
  13. 자세한 내용은 1997년 외환 위기참조
  14. 사실 유고슬라비아 분열의 싹은 이미 1980년대부터 피어져있었다고 봐야되는데 1970년대의 오일쇼크로 성장률이 크게 둔화되었고 1980년의 금리 인상으로 이런 현상이 가속화되고 때 마침 티토 대통령도 사망하고 티토주의의 영향력도 크게 약화되면서 불안감이 가중되기 시작했다. 물론 유고슬라비아는 그 동안 쌓아논 외교력을 바탕으로 외채를 크게 탕감받았지만 그 대신 IMF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게 되었는데 IMF가 했던 조치는 불난격에 기름을 뿌리는 꼴이 되었고(물론 당시 유고슬라비아 정부 입장에서는 그것말고는 다른 대안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소련으로부터 돈을 빌린다거나 하는 대안을 쓸 수없기 때문)더군다나 유고슬라비아가 성장하는 동안에 감쳐졌던 경제적 모순(지역간 불균형 발전)이 드러나게 되면서 IMF에게 지원을 받았고 그 희생을 누가 감당해야하는 지에 대해 각 공화국별로 의견이 엇갈렸던 차에 유고슬라비아의 민족갈등을 부추기는 정치인이 주목을 받게 되었고 때마침 소련도 영향력을 잃고 동구권 국가들이 하나하나 체제를 전환시켜나가자 마지막 있던 긴장감까지 풀어지며 분열을 촉발시켰고 그 결과가 유고슬라비아 내전이었던 것
  15. 알게 모르게 잊혀지지만 소말리아도 1970년대 후반에 대소말리아 주의를 내세우며 에티오피아와 전쟁을 벌였다가 본전도 못건지고 참패당하는 바람에 재정이 파탄나서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은적이 있었고, 그 덕택에 정권이 뒤엎어졌기즌 했는데 뒷수습이 되기는 커녕 오히려 부족별로 찢어지다보니 오랜 혼란기에 접어들었고 2010년대 중반 들어서야 겨우 안정화 초기에 들어섰다, 르완다도 1970년대부터 80년대 중반까지 커피산업을 중심으로 경제성장을 이룩하다가 역시 1980년대 후반에 커피값이 폭락하는 바람에 경제적으로 파탄이 난적이 있었고 역시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은적이 있었다. 그리고 구제금융를 받은다음에 역시 사회가 막장화 되었고, 내전도 터졌으며 후투족 기득권층에서는 불만을 대거 투치족들에게 돌리고 휴전 직후 1년 뒤에 대통령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진 후에 수십만이 학살되었다. 물론 근본적인 원인이라 할수없어도 르완다 내전에 어느정도 불을 끼얹은 역할을 한거자체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