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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레프 이바노비치 야신 (Лев Иванович Яшин/Lev Ivanovich Yashin) |
출생 | 1929년 10월 22일 |
사망 | 1990년 3월 20일 |
국적 | 소련 |
출생지 | 모스크바 |
신체 조건 | 189cm |
포지션 | 골키퍼 |
소속 클럽 | 디나모 모스크바(1950-1970) |
국가 대표 | 78경기 |
별명 | 흑거미, 검은 문어 |
1963 Ballond'or | ||
수상 레프 야신 | 2위 지아니 리베라 | 3위 지미 그리브스 |
축구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
1 개요
골키퍼는 골을 허용하는 게 괴로워야 한다. 골을 허용하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골키퍼가 있다면 그에게는 어떤 미래도 없다.
사각지대는 그 어떤 골키퍼도 막을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막을 수 있다.
러시아(구 소비에트 연방) 출신의 축구 선수이자 골키퍼이자, 골키퍼 포지션으로 발롱도르를 수상한 유일한 축구선수이다.
2 생애
100년이 넘는 근대 축구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라는 데에 이견이 없는 불세출의 골키퍼로, 모스크바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2살 무렵, 군수 공장에 다니면서 축구공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1949년 20세의 나이로 디나모 모스크바에 입단한 후, 1971년 은퇴할 때까지 줄곧 한 팀에서 선수생활을 하였다. 선수생활을 하는 동안 소속 팀은 소련 축구 선수권 대회 우승 5회, 소련 컵 대회 우승 3회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그의 위상을 생각하면 믿기 힘들겠지만 입단 당시 그의 팀에는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뛰어난 골키퍼 알렉세이 호미치(Алексей Хомич)가 있었기 때문에 처음 3년 동안은 후보 선수에 머물렀다. 그는 부업으로 같은 디나모 모스크바의 아이스하키 팀의 골키퍼를 맡기도 했는데, 이 때 그의 팀은 소련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1953년 호미치가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주전을 차지할 기회를 얻은 야신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서 주전 골키퍼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디나모 모스크바에서 326경기 출장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레프 야신이 소련 국가대표로 처음 선발이 된 것은 1954년으로, 소련이 멜버른 올림픽 축구 부문 금메달을 수상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1960년 현재의 유로인 유럽 네이션스 컵에서도 소련의 우승 주역이 되었다. 그러나 1962년 열린 칠레 월드컵에서는 예선전 콜롬비아와의 경기에서 18분 만에 3골[1]을 먹히고 평범한 슛을 막지 못해 골을 먹히는 등 최악의 모습을 보이며 손꼽히는 강호였던 소련이 8강에서 탈락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이 때의 비판과 질책으로 인해 축구선수 은퇴를 심각하게 고려하기도 했다고.
이후, 다시 심기일전하여 뛰어난 활약을 펼쳐서 1963년에는 발롱도르를 수상하고, 그 이후로 은퇴할 때까지 세계 최고의 골키퍼로서 군림했다.
41세가 되던 1971년, 디나모 모스크바 vs 유럽 올스타 팀의 친선경기를 끝으로 은퇴했다. 당시 이 경기에는 러시아가 공산권 국가였는데도 불구하고 전세계에서 10만명이 운집했으며 바비 찰튼, 에우제비우 등 축구계의 거성들도 참여했다. 이후 코치로 활동하다가 선수 시절 입었던 무릎부상이 악화되어 1986년도에 한쪽 다리를 절단하게 되었고, 말년에는 위암으로 투병하다가 1990년에 세상을 떠났다.
작고한 해에 남긴 사진. 손이 매우 크다.
이후 1994년 월드컵부터 그를 기려 대회에서 가장 크게 활약한 골키퍼에게 야신상을 수여하게 되었다.
3 야신의 위대함
그야말로 골키퍼의 대명사라 할 만한 위대한 선수. 괜히 월드컵에 그의 이름을 따온 야신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흔히 잘 막는 골키퍼에게 '거미손', '문어발' 등의 별명을 붙이곤 하는데, 사실 이러한 별명들의 시초는 레프 야신의 별명이었다.
현역 시절, 검은 옷에 검은 장갑을 끼고 나와서 당시로서는 거인과도 같던 189cm의 장신을 바탕으로 공격수들에게 위압감을 주고, 모조리 골을 막아내는 신들린 모습을 보여주며 유명세를 떨쳤다. 웬만한 공은 그 자리에 서서 팔만 뻗어 잡아내기도 했다는 말도 있다. 이렇게 얻은 별명이 흑거미 혹은 검은 문어. 이 때문에 이후 이름 좀 날린 골키퍼들은 검은 옷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또한 축구골대의 좌우 상단 구석, 즉 골키퍼가 막기 매우 어려운 사각지대를 일명 '야신 존'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야신은 이 쪽으로 날아오는 슈팅조차도 매우 잘 막았다고 한다.
그의 위대함은 기록을 살펴봐도 잘 알 수 있는데, A매치 78경기 출장에 70골(경기당 평균 실점 0.89)을 허용했다. 현재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이라고 칭송받는 골키퍼인 지안루이지 부폰은 2014년 11월 현재 평균 실점 0.81골을, 이케르 카시야스는 무려 0.55골을 기록 중이지만 국대 수비수들의 차이를 감안해야 한다. 부폰에게는 칸나바로, 네스타, 말디니, 키엘리니, 보누치, 바르잘리, 참브로타 등이 있었고 카시야스에게는 이에로, 푸욜, 폼 하락하기전의 피케, 라모스, 알바 등의 수준급 수비수들이 있었다. 그러나 야신이 있었던 대표팀의 수비벽은 부폰과 카시야스와 함께 있던 수비수들에 비해선 클래스가 떨어졌다.
부진에서 재기하여 발롱도르를 수상하던 1963년에는 소련 리그에서 27경기 동안 불과 6실점밖에 하지 않는 우주방어를 펼쳤다.[2]
발롱도르 투표에서 유효표를 받은 횟수도 역대 골키퍼로서는 최다인 9번이다.[3]
FIFA 월드컵에 총 4번 출전(1958, 1962, 1966, 1970[4])하여 13경기 중 4경기를 무실점으로 막아냈으며, 전체 출장 경기 812경기 중 무실점으로 막아낸 경기가 절반이 넘는 480경기(407경기라고도 함)나 된다.
손이 큰 것과 동시에 힘도 매우 좋았는데, 특히 어깨힘과 팔힘이 매우 강하여 손으로 공을 던지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공을 센터 서클까지 던질 수 있었다.
이런 모든 기록들을 제치고 그가 과연 인간인지에 대해 의심하게 만드는 부분은 바로 페널티 킥 방어율로, 그는 선수 시절 총 150번의 페널티 킥을 막아냈다고 전해진다. 또한 일반적으로 페널티 킥의 성공률은 70~80%라고 하지만, 야신의 페널티 킥 방어율은 50% 정도였다.
이런 선수인 만큼 각종 우승, 수상 경력도 화려하다.
- 각종 순위권 경력
- 소련 선수권 우승 5회, 준우승 5회, 3위 1회
- 소련 컵 축구 대회 3회 우승
- 올림픽 우승 1회
- 유럽 컵 우승 1회, 준우승 1회
- 월드컵 4강(4위)
- 수상 경력
흥미로운 점은 축구 황제라 불리는 펠레와 1:1 페널티킥 승부를 벌인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1967년 브라질 축구 연맹이 주최한 산투스와 디나모 모스크바의 친선경기 후 '승부차기 이벤트'가 열렸는데, 양 팀을 합쳐 키커 5명과 골키퍼 5명을 뽑아서 키커 한 명이 한 골키퍼를 상대로 10개씩, 모두 50개의 슛을 해 가장 많은 골을 넣은 키커와 가장 많은 슛을 막아낸 골키퍼를 뽑는 방식이었다. 첫 골은 야신이 펠레의 슛을 막아냈지만, 나머지 9골은 펠레가 성공시켰다. 펠레는 50개 중 48개의 슛을 성공시켜 1위를 차지했다. 야신도 50개 중 25개의 슛을 막아내어 골키퍼 부문 1위에 올랐다.[6]
여담인데, 이 사람 이름 덕분에 김성근의 별명이 오해를 많이 받는다. 실제로 김성근 스스로도 지인들에게 " 야신 하면 축구 골키퍼로 유명한 사람인데 왜 야구감독인 나에게 축구선수의 이름을 별명으로 지어주느냐? 그나마 무실점 투수에게 붙여준다면 모를까? 나는 감독인데?" 이런 소리를 많이 듣는다고 기자들에게 야신이란 별명을 안 썼으면 좋겠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그런데 2016시즌에 재평가되고 있다. 한화를 제치고 10위에 도전하는 팀들을 족족 막아내는 야신의 원맨쇼
4 관련 항목
- ↑ 심지어 이 3골 중 1골은 월드컵 역사상 유일한 코너킥 골이다.
- ↑ 야신이 출전하지 않은 나머지 11경기에서의 실점 수가 8실점으로 오히려 더 많다!
- ↑ 2위가 4회. 그에 해당하는 선수로는 2015년 현재 스웨덴의 로니 헬스트룀, 소련의 리나트 다사예프, 덴마크의 피터 슈마이켈, 이탈리아의 지안루이지 부폰, 스페인의 이케르 카시야스로 총 5명이다.
- ↑ 1970년 대회에서는 후보 골키퍼로 대회에 참가했다.
- ↑ 골키퍼로서 이 상을 수상한 선수는 지금 이 글을 읽는 이 순간까지도 오직 야신 뿐이다. 그후 부폰과 마누엘 노이어가 각각 2위와 3위를 했을뿐 발롱도르를 수상한 골키퍼는 야신이 유일하다.
- ↑ 북한에서 발간된 '세계 축구계의 별들'(2001)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