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사다 요새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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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국립공원 겸 성지로 제 1차 유대전쟁의 마지막을 장식한 장소. 마사다란 단어는 히브리어로 요새(מצדה)를 말한다. 즉, 마사다 요새보다는 마사다라고 부르는 게 맞는 말.
예루살렘 다음가는 유대인의 성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열심당원을 주축으로 한 유대인들이 로마에 대항하여 끝까지 투쟁하다가 마지막에는 모두 자결한 광기와 패기가 아주 그냥 철철 흘러넘치는 장렬한 스토리의 무대이다. 이후 유대인들의 민족정신을 상징하는 성지가 되었다.

2 제1차 유대-로마 전쟁 전

이곳을 사람이 살수있는 피난처로 만든 사람은 마카비 왕조의 대제사장인 요나단이다.
그 뒤, 헤롯 대왕은 안티고누스가 파르티아를 등에 업고 공격해오자 본인은 가족과 병력을 데리고 마사다로 피신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 뒤 로마로 건너가 원로원으로부터 유대왕으로 인정받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등에 업고선 전쟁에서 승리한다.

왕이 된 뒤, 헤롯 대왕은 마사다를 마개조시키기 시작했다. 왕이 됐지만 정치적 위험도 있기에 지리적으로 방어하기에 매우 유리한 이곳을 요새화 시킨 건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이 피난갈 별장까지 만들었으며 로마의 영향을 받아 수로는 물론이고 목욕탕까지 만들었다. 바위를 파서 거대한 물 저장탱크를 만들고 수십년을 먹을 곡물과 과일을 저장하는걸로 모자라 만명을 무장시킬 수 있는 무기까지 보관했다니 이 정도면 편집증 수준.

하지만 이렇게 만든 마사다는 헤롯 대왕이 죽고 로마의 속주가 되자 로마군이 쓰게 됬다.

3 제1차 유대-로마 전쟁과 마사다 항전

66년,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이 발발함과 동시에 유대교의 파벌 중 하나인 열심당원[1]이 이곳에 주둔하던 소수의 로마 수비대를 쫓아내고 인근을 거점으로 삼았다.
긴 전쟁 끝에 70년, 예루살렘이 로마군에게 함락되자 도망쳐 온 열심당원의 지도자인 엘리에젤 벤 야일(Eleazar ben Ya'ir,)이 소수의 유대인과 열심당원을 포함한 967명을 데리고 마사다를 최후의 거점으로 삼아 로마에 대항해 게릴라를 시작. 로마군은 유대전쟁에 마침표를 찍기 위해 정예군단인 제 10군단 9천명과 유대노예와 노역인 6천명인 총 1만 5천명을 동원, 루시우스 플라비우스 실바(Lucius Flavius Silva) 장군에게 요새 함락을 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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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 중 실질적인 전투인원은 극소수였지만 마사다는 450미터의 고지대에 지어져 있는 천혜의 요새였다. 사방이 절벽인데다 올라갈 수 있는 길은 뱀처럼 꼬인 좁은 길 뿐. 5미터가 넘는 높은 성벽과 20미터가 넘는 37개의 망루까지 있어 단순한 공격만으론 점령할 수 없는 난공불락이었다.

요새를 포위한 후, 수십배에 이르는 병력으로 2년 동안 공격했지만 마사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사다는 너무나도 높은 곳에 위치해 로마군이 자랑하는 공성전으로 답이 나오지 않을 뿐더러 요새가 위치한 유대 광야는 전투를 계속하기에 좋은 기후가 아니였다.
최후의 수단으로 실바 장군은 마사다에서 가장 낮은 성벽이 위치한 서쪽에 툭 튀어나온 바위산을 중심으로 1만 5천명을 동원해 마사다와 비슷한 높이의 토산(土山)을 쌓기로 했다. 토산을 쌓아 공성병기가 공격할 수 있는 거점을 만들고, 토산에서부터 흙과 나무를 차근차근 쌓아 마사다까지 이어지는 비탈길을 만든 뒤 공격해 올라가는 무식한 방식이었다. 역시 군인의 기본은 삽질.

천 명도 안되는 유대인들로서는 1만 5천 명이나 되는 병력이 토산을 쌓는 걸 방해할 방법이 없었다[2].
그렇게 시간이 흘러 6개월 후 토산과 비탈길이 완성되어 성벽이 무너지자 유대인들은 최후의 수단을 택한다. 유대교의 가르침에 따라 자살을 할 수 없었던 유대인들은 서로를 죽여주기로 했다.
생존자 중 성인 남성들이 자기 가족들을 모두 죽이고 모인 뒤, 10명의 지도자를 뽑아 나머지를 모두 죽이게 했고, 남은 10명은 제비뽑기를 하며 한 명씩 죽인 뒤, 마지막 한 명은 로마군에서 식량과 무기가 넘어가지 않도록 마사다에 불을 지르고 자살하여 모두 시체가 되었다. 몰아주기류 甲

로마군은 마사다에서 피어오르는 불길을 보고 허겁지겁 요새로 올라갔지만 그곳에서 본 건, 사망한 유대인의 시신 뿐이었다. 그야말로 망연자실.
그럼에도 생존자가 있었는데 하수도길(혹은 우물, 동굴 등등)에 숨어 있던 5명의 어린이와 2명의 노파였다. 로마군은 목숨을 구걸하지도, 노예가 되는 치욕도 불사한 유대인들의 용기에 보답해 이들을 살려 주었다.

4 난공불락의 이유

마사다는 지형자체가 450미터에 가까운 고지대인데다가 남북 길이 600미터, 너비 250미터 평균 120미터인 평평한 마름모꼴 정상이라 사람이 거주하기 편안한 장소다. 사방이 절벽인데 올라가는 장소도 좁은 길 하나뿐이라 현대에서도 케이블카를 제외하곤 걸어 올라가는 사람이 없는 편이다.

전쟁사에서 이런 고지대에 위치한 성과 요새들은 포위당한 후 물, 식량부족으로 인해 끝나기 마련이고 로마군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헤롯 대왕은 마사다를 비롯한 주변 광야가 대부분 석회로 이루어져 빗물이 땅에 흡수되지 않고 고인단 사실을 알고 빗물이 흘려내려가는 지점을 막아 물 저장고로 만들었다. 우기마다 수만리터의 물이 쌓이는 마사다였고 곳곳에 만들어 둔 물 저장고는 총750만리터의 물을 저장할 수 있기에 목욕탕과 사우나를 운용할 수 있을 정도로 마사다는 물이 풍족했다.
식량 또한 수년을 먹을 수 있도록 포도주, 기름, 곡물, 과일 등이 보관되어 있는데 마사다의 특이한 기후와 창고의 설계가 맞물려 저장 기간도 백년이 문제없었고 한다. 심지어 평평한 광야인 마사다 정상을 이용해 중앙엔 밭도 일구고 있었다고 하니 식량 문제도 없었다.
비둘기집을 만들어두어 각종 조류를 식량 겸 배설물을 이용해 연료로 썼다고 하니 로마군이 수년을 포위하고 있더라도 먹고 살기에 문제가 전혀 없는 장소였다.

기후도 로마군이 버티기엔 무척이나 힘든 장소였다.
유대 광야는 여름에는 50도도 넘는 기후에 비 한방울도 내리지 않는 황무지라 물은 물론 식량 공급도 원할하지 못한 장소였다. 우기에 내리는 집중호우는 마사다에 머무는 유대인들에겐 물을 공급해주는 고마운 비지만 로마군에겐 땅에 흡수도 되지 않은채 발목까지 잠기게 하는 성가진 존재였다. 석회로 이루어진 광야의 지형 때문에 비가 제대로 흡수되지 않아 지형마저 바꿔버릴 정도의 홍수도 자주 나는 지형인 만큼 포위하고 있던 로마군은 난데없는 홍수에 휩쓸려 많은 병력을 잃었다.
광야에서 몰아치는 강풍은 최고 시속 100km을 넘나들 정도였으니 바람만으로도 진이 붕괴될 정도였다 한다. 이런 바람이 호우와 함께 한다면...

이런 기후 속에서 게릴라와 암살에 능한 열심당원들의 공격은 로마군에게 엄청난 짜증을 유발했을 것이다.

5 기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저술한 유대 전쟁사에선 마사다 항전을 기록하고 있었지만 마사다에 대한 기록이 이것뿐이라 믿는 사람이 없었단 점이 특유의 지형과 더불어 늦게 발견하게 한 이유가 되었다. 심지어 요세푸스는 유대인을 배신하고 로마에 붙은 사람이었으니…

1838년 사해 바닷가를 여행하던 두 미국인 학자 로빈슨(Robinson)과 스미스(Smith)가 우연히 바위산 위의 폐허 흔적을 망원경으로 멀리서 발견해 아름아름 알려지기 시작하다가 1963년 이스라엘 정부는 유대인 고고학자 야딘(Yadin)에게 발굴을 의뢰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위에서 로마군이 겪었던 고생을 그대로 겪은 발굴단이기에 마사다 발굴 작업은 세계 고고학계에서도 가장 어려웠던 발굴 작업으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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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의 결사항전의 정신의 상징이 되어 이스라엘 군인들은 모두 훈련소에서 퇴소할 때 이 요새의 정상에서 "마사다는 다시 함락되지 않는다!"(שנית מצדה לא תיפול שנית)고 외치면서 전의를 다진다고 한다.
케이블카를 통한 관광도 가능하며, 근처 박물관에 있는 복원 모형이 매우 세밀하다. 심지어 요새의 수로 구조를 보여 주는 모형에는 실제로 옆에 물을 부어서 체험해 볼 수 있다. 대신 문 닫는 시간이 4시로 운영시간이 매우 짧다.

맥풀사의 차세대 돌격소총ACR의 본명은 이 요새에서 따온 것이다.
  1. 젤롯당(Zealot黨)이나 시카리당(Sicarii黨)이라고도 불린다. 한국에서 많이 알려진 발음은 질럿(Zealot).
  2. 토산과 비탈길을 만드는 노역인의 대부분이 유대노예들로 이루어져 같은 동포를 죽일 수 없었기에 방해하지 못했단 시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