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서기 37~100
로마제국 시대의 유대인 정치가 겸 역사가. 1세기 유대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중요한 기록인 유대 전쟁사 등을 남긴 인물이다.
2 생애
37년에 예루살렘에서 태어났는데 그리스어 이름인 "요세포스 마티우 파이스"로 미루어보면 맛다디아의 아들 요셉이 그의 히브리식 이름으로 추정된다. 물론 요세푸스 자신이 직접 자신의 이름을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기록한게 남아있지는 않으나 대체로 요하난 → 요한, 예호수아 → 예수, 시므온 → 시몬 같은 식으로 히브리 이름을 그리스어화한 걸로 미루어보면 요세푸스의 히브리식 이름은 요셉이 분명할 것으로 보인다.
예루살렘에서 사제의 아들로 태어났고 자신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사제가 되었다. 그의 혈통은 하스모니안 왕조와 닿아있다고 추정되는데 이런 덕분인지 그는 하스모니안 왕조의 역사적 상황을 잘 알 수 있었고 유대전쟁사에 이를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요세푸스는 또한 유대교의 여러 종파들을 두루 거치기도 했는데 사제출신에 하스모니안 왕조의 혈통과 닿아있었던 터라 사두카이파에서 시작해 엣세네파 등을 거쳤고 최종적으로는 바리사이파로서 자신의 입장을 정했다. 그러나 여러 종파들을 거친 그의 이력으로 1세기 유대교의 각 종파들에 대한 기록을 남길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는 64년 네로 황제 시절로 이때 반 로마폭동을 주동하였다는 이유로 로마로 압송되어 사형판결을 받은 유대인들의 구명탄원을 위한 사절단의 일원으로 로마에 이르렀다. 네로를 움직이기 위해 유대인 배우의 도움으로 네로의 부인 포파이아 사비나를 만났고 포파이아는 젊은 요세푸스를 맘에 들어해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로마를 다녀온 경험은 바리사이파임에도 불구하고 요세푸스에게 국제정세의 냉혹함을 알게된 계기로 보인다. 유대인들이 로마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자(제1차 유대전쟁) 요세푸스는 로마에 맞서는것이 유대인들에게 파멸을 가져올 것임을 알았지만 강경파들의 득세에 어쩔수없이 갈릴리의 요타파파 마을을 방어하는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요세푸스는 최대한 베스파시아누스군의 진로를 막는 전략을 써서 몇십일 동안 베스파시아누스군을 붙들어두었지만 결국 전력의 한계로 패배하고 말았다.
이때 요세푸스와 동료 지휘관들은 자살을 결정하고 제비를 뽑아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방식으로 마지막에 요세푸스와 한 병사가 남았는데 요세푸스는 그 병사를 설득해 로마군에 투항하게 되었다. 야사로 이 때 자살을 할 당시, 사람들을 줄을 세운 뒤 특정 수에 해당하는 사람을 골라서 죽이는 형태로 했는데 요세푸스가 이 순열을 계산해서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순서에 섰다는 이야기가 있다. 수학에서는 이 일화에서 이름을 딴 요세푸스 문제(Josephus problem) 혹은 요세푸스 순열(Josephus permutation)이란 문제가 있다.
베스파시아누스 앞에 불려간 요세푸스는 그에게 "당신은 황제가 될 것입니다"라는 예언을 했고 베스파시아누스는 그런 그를 죽이지 않고 로마로 보냈다.
이 요세푸스의 예언은 많은 논란을 일으켰는데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에 야심이 있어서 그런 예언을 즐거워했다는 주장부터 요세푸스가 살기 위해 베스파시아누스에게 환심을 사려고 도박을 했다는 주장도 있다. 사실 이런 발언은 어찌보면 위험할수도 있었는데 당시 네로가 건재한 상황이라[1] 요세푸스는 물론이고 베스파시아누스까지 반역죄로 몰릴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건만 별달리 문제가 없었던걸 보면 그냥 베스파시아누스는 실없는 소리로 웃어넘겼던 모양이다. 물론 냉철하게 보면 유대의 고위층인 요세푸스의 이용가치가 있어서 살려두었겠지만.이게 중요한 이유였을지도
유대인들의 지침서인 탈무드에는 이 예언 일화를 각색한 이야기가 있다. 벤 자카이란 랍비[2]가 비슷한 내용의 예언을 베스파시아누스에게 한 뒤, '황제가 된 뒤 예루살렘을 파괴하더라도 작은 학교만은 남겨달라'고 간청해 이후 베스파시아누스가 이 소원을 들어줬다는 이야기.
어쨌든 로마로 간 요세푸스는 한동안 연금상태에 있다가 69년에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가 되면서 석방되었고 티투스의 막료가 되어 유대의 망국을 똑똑히 지켜볼수 있게 된다. 티투스는 요세푸스를 보내서 예루살렘에 항복을 권했지만 강경파들이 들어먹을리가 만무하고... 결국 예루살렘은 항복되고 대신전은 파괴되었다.
이후 요세푸스는 티투스의 베프로서 로마로 돌아와 평생 로마에서 플라비우스 가문의 보호를 받으며 안락한 생활을 누렸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요세푸스에게 자신이 황제가 되기 전에 살았던 저택과 유대의 토지를 하사했으며 황제의 성씨인 플라비우스를 내려줄 정도였다. 뭔가 매국노 필이다만
이런 안정된 생활 가운데 요세푸스는 마카비 전쟁부터 로마의 예루살렘 대신전 파괴까지를 기록한 유대 전쟁사와 천지창조로부터의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한 유대 고대사, 아피온 반박문, 자서전 등을 집필했고 100년에 사망했다.
세 번의 결혼에서 아들 셋과 성별을 알 수 없는 아이 하나를 낳은 걸로 전해진다.
3 저서
- 유대 전쟁사(75년경)
- 유대 고대사(95년경)
- 아피온 반박문(97년경)
- 요세푸스 자서전(99년경)
4 평가
유대인들 입장에선 상당히 골때리는 인간이다. 유대인이고 망국의 역사를 기록한 인물이라 그의 기록을 보기는 보지만 한편으로는 로마에게 붙어서 여생을 안락하게 보냈으니 정통 유대인들 입장에서 보면 매국노도 이런 매국노가 없을 듯. 그래서 심지어 그가 기록한 유대전쟁사는 친로마 입장에서 쓴 프로파간다 선전물이라고 보는 사람들까지도 있었다.
그러나 요세푸스의 기록을 연구한 학자들은 그가 비록 인간적인 면이나 윤리적인 측면에선 비판받을 점이 많지만[3] 그의 기록은 상당히 정확하고 1세기 유대의 상황을 잘 알 수 있는 기록이라 인정을 받고 있다. 만약 요세푸스의 기록이 없었다면 마카베오서나 신약성서, 로마 역사가들의 기록 말고는 1세기 유대의 복잡한 상황을 알 만한 자료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 대한 고려가 없이 요세푸스를 단순한 매국노로 부르기에는 복잡한 문제가 있다. 무엇보다도 그는 앞장서서 나라나 동료들을 팔아먹은 것이 아니라 패배가 확실해진 상황에서 자살 대신 투항을 택한 것이다. 이 부분에서 생존을 택한것을 나라를 팔아먹은 것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그 이후에 잘 먹고 잘 산것은 별개로 평가받을 일이지, 그것을 가지고 매국노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리고 그의 저작에는 유다인의 역사에 대한 자부심과 유다교에 대한 애정, 그리고 봉기의 실패로 자신의 동족에게 떨어진 비극적인 운명에 대한 한탄이 절절하게 드러난다. 또한 로마에 항복한 뒤에도 그는 동족들의 목숨을 최대한 구하려고 노력한 바는 있어도, 동족을 팔아넘기는 행위를 한 증거는 딱히 없다.
한편 유대 고대사에 기록된 예수에 대한 기록인 "플라비우스의 증언"은 많은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자세한 사항은 예수/역사 항목을 참조할 것. 요약하자면, 이 "플라비우스의 증언"은 가필 흔적이 보인다는 이야기다. 더불어서 전체 가필이 아니라 부분 가필이라는게 학계의 정설이란 내용도 담겨 있다.- ↑ 물론 요세푸스가 이 예언을 한 1년여가 지난 68년에 네로는 자결한다. 하지만 당시 상황에서 요세푸스가 그런 정황을 예측했을 리는 만무하고. 시오노 나나미는 그냥 간단하게 "요세푸스의 도박"이라고 표현했다.
- ↑ 이 때 협상을 숨기기 위해서 자신이 병사한 것으로 위장해 관에 숨어서 로마군 진영으로 갔다. 항전을 주장하던 강경파 인사들은 존경하는 랍비의 '시신'을 차마 모독할 수 없어서 그냥 진영 밖으로 나가게 하고, 관을 의심하여 칼로 찔러보려 하던 로마군에게는 벤 자카이의제자들이 "우리는 비무장이오. 그리고 당신들의 황제가 돌아가셔도 이런 식으로 시신을 확인합니까?"라고 결사적으로 말려서 베스파시아누스를 만날 수 있었다고 한다.
- ↑ 요타파파에서 다른 지휘관들이 다 서로를 죽이는 방식으로 자살하는 걸 말리지 않다가 한 사람과 자신만 남자 그를 설득해서 로마군에 투항한 것은 분명 윤리적 문제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설득하려면 다 설득하던지. 물론 다른 사람들이 다 살아있는 상태에서 로마군에게 투항하자고 했으면 먼저 요세푸스 목이 달아났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지만. 아니 가능성이 없지 않은 게 아니라 '유대전쟁사'를 보면 실제 유대인들이 지휘관답게 자결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너를 죽이겠다고 협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