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메디 학살

1 개요

아르덴 대공세 당시 독일군 에이스 요아힘 파이퍼가 지휘하는 파이퍼 전투단에 의하여 발생한 포로 학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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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퍼 전투단 패퇴 후 스타벨로에서 발견된 민간인 학살 현장 사진

2 사건 진행

1944년 12월 17일, 독일군은 아르덴 대공세 초반 많은 수의 적을 사로잡았다. 그런데 벨기에의 말메디에서 요아힘 파이퍼가 지휘하는 SS 파이퍼 전투단 병사들이 사로잡은 미군 포로들에게 뚜렷한 이유없이 기관총 사격을 가하여 대부분의 포로들이 끔살당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여기에 파이퍼 전투단은 말메디만이 아니라 이후 그들이 거쳐간 모든 지역에서 포로 및 민간인 학살에 연루되었다. 심지어 격전지였던 스타벨로에서는 전투가 끝난 후 포로 9명과 여자 및 아이를 포함한 민간인 93명이 전투 종결 후 사살됐다. 이 숫자는 말메디에서 학살된 미군 포로 83명보다도 많은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이를 보고받은 연합군 수뇌부는 크게 분노하며 이 사건을 독일군의 포로학살로 규정하고 포로로 붙잡은 독일군 병사들에게 보복해도 좋다는 공식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훗날 전범재판에서 파이퍼와 그 부하들에게 포로학살의 책임을 물으려 하였지만, 문제는 당시 '독일군 수뇌부에선 포로를 처형하라는 공식명령을 내린 적이 없는 상황'이였고, 오히려 상기했듯 '연합군 수뇌부가 공식명령으로 포로학살을 지시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문제가 되었다. 결국 재판은 치뤄졌고 유죄 판결도 나왔지만, 당시에도 심각한 논란이 오갔다.

여하튼, 말메디 학살 사건의 영향으로 미국 병사들의 전투 태도가 달라졌다. 이전까지는 독일군의 분전으로 "내가 생각해봤는데 우리가 이기려면 조낸 잘 싸워야 될 것 같아. 근데 현실은 시궁창이잖아. 안될거야 아마. GG치고 살자." 에서 "좋은 나치는 죽은 나치 뿐이다! 너죽고 나죽자!"로 바뀐 것. 이런 변화는 포로 대우에도 영향을 줬다. 국방군 포로와 친위대 포로[1]를 다루는 방식도 달라졌다. 이런 현상은 이후 독일군과 미군의 교전 현장에서 숱하게 발생했고, 심지어 상관의 전사를 학살로 오해한 부하들에 의한 단위부대 전체의 조직적인 포로 학살 같은 참사도 발생했을 정도였다. 말메디 사건 이후로 미군이 SS포로를 어떻게 취급했는지에 대해선 최근에 나온 전쟁영화 퓨리에서 보여준다. 영화에서 미군은 SS포로에게 즉결처형을 2번했는데 들판에서의 전투에서 미군 코트를 입은채로 잡힌 SS병사( 적국의 군복을 입고 적군과 교전한 것은 스파이로 규정되어 제네바 협약에 의한 포로 대우를 받을 수가 없다.)을 컬리어 하사가 그의 대원인 노먼을 움직여 강제로 처형했고 이후 마을 진입후 항복한 독일군중 SS장교(소위)가 있었는데 그가 강제동원에 불복한 독일인을 학살한 것(마을 곳곳에 전봇대, 건물에 붙어있는 장대에 교수형으로 죽은 시체들이 매달려있었는데 시체엔 -나는 적과 싸우질 않았습니다-라는 취지의 말투가 표시된 푯말에 걸려있었다.)이 확인되어 전차와 같이 다니던 미군 보병에게 기관단총으로 처형되었다.

3 논란과 이야기들

당시 영어에 능통했던 파이퍼는 영국 군가 "It's a Long Way to Tipperary"[2]를 포로들을 향해 흥얼거렸다고 한다. 그가 유유히 떠난 뒤에 학살이 벌어졌다. 당시 정황을 보면, 파이퍼는 급한 진군을 위해 뒤에 포로를 놓아둘수 없었고 포로를 데리고 가면 진군 속도가 늦어질 상황이었다. 포로를 풀어주면 경로가 발각되고 적군과 합류하여 역공을 당할 우려가 있었다. 또한 당시 옆 마을에 있던 아이젠하워를 잡으러 서둘렀다는 연구도 있다. 아이젠하워의 자서전에도 파이퍼의 이름을 밝히진 않았지만 자신이 포로로 잡힐까봐 염려했다는 부분이 있다.

포로학살에 대한 공식적인 문서는 발견된 적이 없지만 디트리히에게 구두로 명령을 받았을 것이란 의혹은 강하게 제기된다. 파이퍼의 이동경로를 따라가면 곧이어 민간인과 군인포로 학살의 시체가 뒤이어 발견되었다. 그리고 애초에 포로학살 명령을 공식적으로 문서로 남겨 명령을 내리는 멍청한 군대는 많지 않다.

한 연구에 따르면 말메디에서 독일군의 연합군 포로 학살사건은 탈주를 시도한 미군 포로에게 경고사격 후 조준사격을 가해졌다고 한다. 이러한 행동을 본격적인 포로 학살로 오인한 포로들이 일제히 도주를 시작했으며, 당황한 독일군이 이를 저지하고자 도주하는 포로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해 발생한 사고로 추정하기도 한다. 참고로 탈주 포로를 사살하는 것은 국제법상 위법이 아니다. 왜냐하면 탈주를 시도하는 순간 포로는 포로로서의 자격을 상실하고 전투원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메디 학살의 경우 대부분의 포로는 조직적인 탈주를 시도하다가 사살된 것이 아니라 멍하게 서있다가 총 맞아 죽었다. 죽은 척하고 살아난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독일군들은 확인사살을 하며 킬킬거리면서 개머리판으로 죽은 시체를 짓이기며 웃고 떠들었다고 한다. 또 다른 생존자들도 일관되게 갑작스럽게 발포했다고 증언한다. 시신 부검 결과 대부분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두부관통상을 입은 점을 보면, 저항하거나 도망가다가 총에 맞은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포로를 모아 놓고 갑자기 겨냥해서 죽인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포로들이 저항하거나 탈주를 시도한 것은 갑작스런 발포 후에 이루어진 것이고 그것도 소수에 그쳤다. 또한 갑자기 탈주 시도가 이루어졌다면 대부분의 시체가 머리에 관통상이나 치명상을 입기는 어렵다. 무방비 상태에서 지향 사격을 당했다는 이야기다. 더군다나 최종 단계에선 쓰러진 사람을 발로 차서 약간이라도 움직이면 다시 사격해서 끔살하는 확인사살이 몇 건 자행되었다. 결국은 포로 학살이라고 볼 여지는 충분했다. 여기에 12월 18일부터 12월 21일에 걸쳐 진격도상에서 있었던 다른 학살들은 작전 중 전사한 몇몇 중대장의 독단에 의해 강행된 학살행위라는 사실도 입증됐다. 참고로 의도적인 학살은 아니었다 해도, 특별한 권한 없이 임의로 전시 국제법을 확대 해석한 일선 장교들의 약식 군사재판은 충분히 학살로 간주된다.

지휘관인 파이퍼에 대한 사형선고가 내려진 이유는 말메디 사건 하나 때문이거나 학살 명령 사실이 입증되어서가 아니다. 일련의 학살사건 전반에 대한 지휘책임을 물었기 때문이다. 밑의 사람이 사고를 치면 윗사람이 책임지는 건 전세계 군대나 거의 모든 조직의 공통점이다. 파이퍼 역시 지휘책임에 대해서는 일체의 이의를 달지 않고 다만 학살 당사자였던 병사들의 상태를 감안해서 병사들의 책임은 최소한으로 물어야 한다는 취지의 이의를 재판부에 제기했다.

다만 당대인들은 이런 일련의 사건들, 특히 말메디에서의 첫 포로사살 사건은 전시 국제법에 문제가 될 정도의 사건은 아니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의외로 당시 재판관들, 심지어 검사진 중 상당수도 말메디 사건 한정으로는 그런 결론을 내렸다. 사형 판결이 나온 뒤에도 가해자들을 구명하기 위해 사적으로 활동하기까지 했다.

한편 전쟁포로로 수감되어 있을 때 전범들에 대한 미국측의 가혹행위가 전후 상원의원 조사에서 문제가 되었다.[3]잦은 폭행과 밧줄로 목 매달기, 얼굴에 두건 씌우기, 잠 안 재우기 등등 전범수감자들에 대한 고문과 잔혹행위가 상원청문회에서 밝혀졌다. 또한 학살 당시 유일한 제3의 목격자라고 할 수 있는 카페 여주인에 대한 위협도 밝혀지는 등 많은 문제점이 드러났다. 또한 재판 당시의 위압적이고 편향된 재판 진행도 문제였다. 하지만, 파이퍼가 결백한데 모든 것을 조작하고 뒤집어 씌웠다는 의미는 아니다. 미국의 복수심에 의해 합법적인 절차가 무시되었고, 이것이 조사를 통해 드러난 점이 문제라는 것이다. 물론, 나치 독일이 전쟁동안 저지른 만행을 따지면 이 정도 미스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4 여담

파이퍼는 11년 6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1956년 12월 13일 감형으로 풀려났다. 석방 후, 전직 SS모임의 주선으로 포르셰에 취직하여 해외 판촉 직원으로 일하려고 했으나, 전범으로서 외국의 기피인물이었기 때문에 곧 퇴직하였다. 이후 이탈리아 전선에서 민간인을 무차별로 폭격한 보베 학살[4]에 대한 혐의로 기소되지만, 무죄로 결론난다. 이후 프랑스에 정착하여 가명을 쓰고 신분을 감추면서 자동차 잡지에 가명으로 기사를 투고하거나차덕후 밀리터리 서적 번역일을 하다가 결국 신분이 노출되고 말았다. 1976년, 파이퍼는 암으로 투병 중인 아내를 먼저 독일로 보낸 뒤 프랑스에 남았다. 프랑스 극좌파 테러리스트들로 추정되는 괴한들의 습격을 받아 가슴에 총을 맞고 죽었으며 집은 불탔다. 괴한들은 아무도 기소되지 않았다.

4.1 창작물에서의 묘사

아르덴 공세를 소재로 한 창작물에서 자주 등장한다.
1965년 제작한 벌지 대전투(Battle of the bulge)에서는 공터에 포로들을 모아놓고는, 갑자기 트럭에서 기관총을 난사해서 학살하는 장면으로 묘사한다. 즉 처음부터 계획적인 학살로 묘사했다. 이 장면은 진군하라 전차도에서 패러디하였다.
불꽃의 기사에서는 포로가 탈출하려는 것을 막으려고 한 경고사격으로 인해 우발적으로 벌어진 사건이 학살로 발전했으며, 파이퍼가 그 책임을 지게 됐다고 서술했다. 군법재판 과정에서 변호인 에버렛 대령의 항소과정도 서술했다.

2003년에 제작한 세인트 앤 솔저란 영화에서도 탈주 시도로 인해 발생한 우발적인 학살로 묘사하였다.
  1. SS는 나치당의 사병인데다가 제네바 협약에서 언급한 중대한 위반 행위 (grave breaches)을 무수하게 위반했으므로 범죄조직으로 단죄된 집단이다. 사설 조직도 제네바 협약상 교전권은 가지고 있지만 전범짓을 하는 등 협약상 중대한 위반 행위를 하면 공식적으로 교전권이 박탈되고 전범으로 단죄된다. 전후 독일에서 SS의 군복무 여부를 인정하지 않은 것도 정당한 일이다. 그리고 전범 조직에 속하지 않았으며 전범 행위를 하지 않았다면 민병대등도 교전권이 있으므로 전쟁 말기에 민병대에게 군복 지급할 수단이 없어지니 완장 하나 채워주고 '니넨 합법적 군인이니 잘 싸우도록' 같은 개드립을 친 이유도 어쨌건 제네바 협약 때문이다.
  2. 최초 1차대전 때 군가로 불렸다. 사건 당시에는 영미군 전체에서 유행하던 노래였다.
  3. 독일군 고위장성이었던 프란츠 할더는 히틀러의 미움을 사서 잠시 강제수용소에 있다가 미군 수용소로 전범제판 증인 자격으로 옮겨졌는데 '왜 여기 시설이 독일 강제수용소보다 가혹한 거요?'라고 따지다가 2주간 감금당했다. 감금당한 후 무슨 일을 더 당했는진 불명./(다른 수정자의 견해) 할더는 국방군 장성이었고 전쟁기간동 후방의 고급참모로 지냈으니 SS 부류의 전범과는 거리가 멀었을수도 있다. 다만 명령서를 통해 전범행위를 지시했을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일련의 반나치 행동으로 히틀러 암살미수에 연루되어 투옥되는등 반 나치인사로서의 세간이 보는 인식들이 있으니 미군이 그에게 당근(?)을 쥐어 이용,회유했으면 했지 가혹행위를 했을지는 미지수다. 실제로 할더는 미군에 적극 협조하여 전범기소를 면제받았고 그뒤엔 주독미군의 주관하에 독일군 역사 연구작업에 초빙되어 다른 전직 국방군 장성 수백명과 함께 책을 편찬하는등의 공로로 미군에게서 훈장을 받았다.
  4. 이탈리아 파르티잔이 독일군 몇 명을 억류한다는 이유로 350채 가옥을 평지로 만들고 45명을 사살한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