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아힘 파이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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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나온 컬러 사진 하나. 보다시피 굉장한 미남이었다.

1 개요

Joachim 'Jochen' Peiper (1915년 1월 30일 ~ 1976년 7월 13일)

독일 제3제국무장친위대 소속 장교. 직책은 기갑 부대 지휘관이었으며 아르덴 대공세에서의 활약으로도 유명하다.

2 초기 행적

▲ 청년 시절의 파이퍼.

1915년 1월 30일 베를린 출생. 한스-하소와 호르스트라는 이름의 두 형제가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1933년 무장친위대에 자원 입대했고, 그의 지원서를 살펴본 요제프 디트리히는 그를 자신의 "LSSAH[1]"에 배치했다. 초기 SS 시절에는 하인리히 힘러의 부관으로 복무했고, 이후 LSSAH 예하의 기갑 부대 지휘관으로 발령되었다. 힘러의 부관으로 근무하던 당시 아내인 지쿠르트를 만나 슬하에 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

파이퍼는 업무에 뛰어난 소양을 보였으며, 친위대 내부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 29살의 젊은 나이에 무장 친위대 대령[2]으로 진급했다. 이는 파이퍼를 총애했던 힘러가 그의 영전에 각별히 신경을 쓴 덕분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당시 독일군 최고의 명예 훈장 중 하나인 '곡엽 검 기사 철십자 훈장'을 아돌프 히틀러에게 직접 수여받기도 했다.

3 제2차 세계대전

능력과 카리스마를 겸비한 파이퍼는 엘리트 독일군의 표상과도 같은 지휘관이었으며, 부하들도 그에게 열렬한 충성심을 보였다. 그는 1943년 동부 전선에서 벌어진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에서 하노마크 2대로 그 유명한 파이퍼 전투단을 창설해 활약했으며, 쿠르스크 전투를 비롯해 2차 세계대전의 유명한 전투에 수 차례 참전했다.

파이퍼 전투단은 요제프 디트리히 휘하 독일 제6기갑군 소속으로 "라인 강을 보라" 작전에 참가한 LSSAH 사단 예하 병력들을 중심으로 편성된 부대였는데, 아르덴 대공세에서 포병대와 기갑부대를 동원한 미군의 강력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800여 명의 병력을 보존한 채 벨기에의 라 글레이까지 진격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결국 6대의 티거 2를 포함해 수많은 전차를 마을에 방기한 채 도보로 아군 진영까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 파이퍼 전투단은 말메디 학살을 벌였다.

4 전후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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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범 재판에 출두한 파이퍼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다른 무장친위대 병사들과 함께 말메디 학살 재판(Malmedy massacre trial)에 기소되었다.

여러 증언에 의해 파이퍼가 포로를 처형하라는 명령을 적어도 두 번 내렸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으며, 벨기에의 민간인들을 사살한 혐의에 대해서 파이퍼는 그들이 파르티잔이었다고 답했다.

당시 파이퍼와 부하들은 가족을 소련 측에 넘겨 버리겠다는 협박과 구타를 당했는데, 이에 파이퍼는 부하들만 방면해 준다면 자신은 모든 죄를 자백하겠다고 밝혔지만 거부당했다. 미군 30보병사단 119연대 소속 대대장 해롤드 D. 맥코운 소령은 재판에서 사건 당시 파이퍼가 오히려 부상당한 미군을 위해 위생병을 남겨 놓았다고 진술하는 등 파이퍼에게 유리한 증언을 했지만 재판의 분위기를 바꿀 수는 없었고, 파이퍼의 부하들은 유죄 선고와 더불어 교수형이 언도되었다. 파이퍼 역시 감독자로서의 책임을 물어 교수형 판결을 받았다.

파이퍼는 부하들을 고통스러운 교수형 대신 총살형에 처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기각당했고, 옥중에서 사형을 기다리던 와중 다수의 자백이 가혹행위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문제시되면서 말메디 학살 사건 관련 피고자 다수에게 선고된 사형은 긴 징역으로 감형되었다.

이후 11년 6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1956년 12월 13일에 석방된 파이퍼는 전직 SS 모임[3]의 주선으로 포르쉐 사에 취직하여 해외 판촉 직원으로 일했으나, 전범이었기 때문에 기피를 당해 이내 퇴직할 수밖에 없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서독 정부는 과거 청산 작업의 일환으로 그동안 도피 생활을 해온 나치 전범들을 낱낱이 찾아내 기소하기 시작했는데, 파이퍼 또한 보베 학살 사건을 줄곧 조사해 온 어느 이탈리아인에 의해 고발당하기도 했고, 이탈리아에서 유대인을 체포하여 수용소로 넘겼다는 혐의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증거불충분으로 기소되지 않았고, 이후 나치 전범인 베르너 베스트의 재판에 소환되어 여죄를 추궁당했으나 기억에 없다는 증언을 반복하여 처벌을 모면했다. 이후 잡지의 자유 기고가로 일하다가 자신 소유의 별장이 있는 프랑스의 오트 소느 트라브에 가족들과 함께 정착했다. 이건 북한 전범이 한국에 이주한 거나 다름없다! 여기서 그는 라이너 부쉬만(Reiner Buschmann)이라는 가명으로 영국의 군사 서적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일을 했다. 하지만 어눌한 프랑스어 발음을 의심한 사람들에 의해 정체를 들켰고, 프랑스 공산당의 기관지 뤼마니테(L'Humanité)가 이 사실을 보도하는 바람에 전 프랑스 국민들이 그의 신원을 알게 되었다.

1976년 7월 14일, 파이퍼를 죽여 버리겠다는 문구가 그의 집 담벼락에 쓰여졌다. 위험을 느낀 파이퍼는 으로 투병 중이었던 아내를 먼저 피난시켰지만, 본인은 미처 빠져나가지 못했고 그날 밤 자택에 투척된 화염병으로 인해 사망했다. 그의 시신을 부검한 결과, 방화가 이루어지기 전에 다수의 공격으로 인해 신체가 크게 훼손되었다는 점이 밝혀졌다. 이 사건은 저항 운동가나 공산주의자들의 범행으로 추정되었지만 당시 프랑스 여론은 '마땅히 죽을 만한 놈이 죽었다'는 식의 냉담한 반응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수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범행을 저지른 그 누구도 체포되거나 기소되지 않았다.

5 평가

비록 일부 전쟁범죄와 관련이 있긴 했지만 적어도 부하들에게는 훌륭한 지휘관으로 신뢰받았다. 매사에 침착하고 냉철한 성격이었으며, 부하들 사이에서는 '파이퍼를 화나게 하기'로 내기를 걸었을 정도라고 한다.

전투에서는 직접 선두차량에 탑승해 진두 지휘를 하기도 했고, 전차장으로 탑승해 우수한 전과를 올린 적도 있다. 쿠르스크 전투에서는 직접 대전차지뢰를 들고 전차에 달려들어 T-34를 격파하기도 했다. 흠좀무. 비슷한 일화로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서도 판저파우스트를 사용해 적 기갑 차량을 격파한 전적이 있다. 대령씩이나 되는 양반이 직접.

오늘날에도 말메디 학살이 자발적인 것이었는지의 여부를 두고 논쟁이 오고 가지만, 이 사건에 파이퍼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만큼은 절대 부정할 수 없다. 설령 우발적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가 민간인 학살에 관여한 것은 사실이며, 무엇보다 그는 나치즘에 긍정적이었다.

종전 후 영국 역사학자와 진행한 어느 인터뷰에서 파이퍼는 자신이 이탈리아에서 나치 간부들에게 체포된 랍비 일행을 풀어줬으며, 그들이 전후에 찾아와 감사를 표했다고 본인 입으로 주장했으나 사실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다. 파이퍼는 그 전에도 한 베를린 출신 랍비가 전범 재판 때 자신에게 유리한 증언을 해 주었다고 말한 적이 있었지만, 실제 재판 기록에는 그런 내용이 없었다. 1943년에 파이퍼가 아우슈비츠로 보낸 이탈리아 출신 유대인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단 24명에 불과했으며, 이들 중 누구도 파이퍼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정보는 없다.

다만 또 다른 자료에 의하면 정작 본인 스스로 위의 내용을 주장하거나 말한 적이 없다는 증언도 있어서 위의 정보조차 사실인지 의문이 든다. 어찌되었든간에 확실한 것은 파이퍼 본인 스스로 유대인 학살에 관여한 적은 없지만 당장 그 자신이 힘러의 부관이었고 그가 이끄는 SS 병력들과 함께 들어온 특별청소부대들이 파이퍼 관할 하의 이탈리아의 점령지에서 체포한 유대인들을 죽음의 수용소로 보낸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파이퍼가 유대인에 대해서 무관심했더라도 말이다.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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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굉장한 미남이다. 자손들도 그의 준수한 외모를 물려받았으며, 특히 딸의 경우 선이 굵은 인상이 마치 파이퍼가 여장을 한 수준(...)으로 닮았다. 그의 외모에 놀란 것은 외국인들도 마찬가지였는데, 전범재판 때 재판장에 들어선 파이퍼를 보고 미군들이 경탄했을 정도라고 한다.

아르덴 대공세를 다룬 영화 벌지 대전투에서 파이퍼를 모티브로 한 마틴 헤슬러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배우는 로버트 쇼.

고바야시 모토후미의 작품 불꽃의 기사에서 주연으로 나오며[4], 강철의 사신 등에도 까메오로 등장한다.
  1. Leibstandarte SS Adolf Hitler(총통경호대 아돌프 히틀러). 전차 에이스 미하엘 비트만을 비롯해 유능한 인물들이 다수 포진한 정예 부대였다.
  2. 친위대 전체를 통틀어 최연소 대령이었다!
  3. HIAG. 파울 하우서, 빌헬름 비트리히, 요제프 디트리히 등 4명의 SS 출신 장군들이 모여서 만든 단체. 이후 서독 정부의 압박으로 해체되었다.
  4. 여기서는 살해된 것을 가장하고 숨어 살다가 독일 통일까지 보는 것으로 묘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