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련 항목 : 영불협상
Moroccan Crisis (영어)
Crise de Maroc (불어)
Marokkokrise (독일어)
1 개요
1차 세계대전 직전이었던 20세기 초반, 독일 제국과 대영제국-프랑스 제3공화국 사이에서 모로코를 둘러싸고 벌어진 영토 갈등. 1905년과 1911년 두 차례에 나뉘어져서 일어났다. 세계정책(Weltpolitik)을 추구하며 세력을 적극적으로 팽창하려고 시도한 독일과 이를 억제하려던 영국-프랑스의 이해관계가 충돌한 사건이라고 정의할 수 있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오랫동안 대치관계였던 프랑스와 영국은 본격적인 협력의 단계에 들어서게 된다.
2 1차 모로코 위기
사건이 발발한 지역의 이름을 따서 탕헤르 위기(Tangier Crisis)라고 부르기도 한다.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모로코는 대서양과 지중해를 이어주는 곳에 자리잡은 특성상 많은 유럽 국가들의 이목을 끌게 된다. 1880년에 체결한 마드리드 조약에 의거하여 모로코의 독립은 유럽 열강들에게 인정받았으나 제국주의의 시대에서 그런 건 없었고 프랑스가 내정개혁을 빌미로 적극적으로 모로코 내정을 간섭한다. 비슷한 시기 지구 건너편의 갑오개혁이 떠오르면 기분탓이다. 이러한 프랑스의 세력 확장이 심히 못마땅(...)했던 독일 제국의 황제 빌헬름 2세는 1905년 3월 31일 전격적으로 모로코를 방문하여 술탄과 회담을 갖고 '모로코의 자주와 문호개방'을 요구하는 선언문을 발표한다. [1]
빌헬름 2세의 지원에 고무된 모로코의 술탄은 프랑스가 요구한 내정 개혁을 거부해버리는 패기(!)를 발휘했고 이에 따라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는 극도의 긴장감이 흐르게 된다. 빌헬름 2세와 제국 총리 베른하르트 폰 뷜로우는 베를린 회의 때와 마찬가지로 유럽 열강들 사이의 회담을 조성하여 최대한 독일의 이권을 챙겨보려는 심산이었지만 프랑스는 완강히 거부했고, 독일도 물러서지 않음에 따라 양국 사이에는 전쟁의 가능성까지 감지되게 된다.[2] 하지만 보불전쟁의 참패가 기억에 생생했던 탓에 프랑스 정부는 독일과 혼자 전쟁을 붙기에는 감당해야 할 위험이 너무나 크다고 판단했고, 결국 프랑스가 한 발 물러서면서 이듬해 1월 알헤시라스(Algeciras)에서 유럽 열강들 사이에 회담이 개최된다.
하지만 알헤시라스 회담에서 독일은 자국이 왕따라는 것을 깨닫는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제외한 그 어떤 국가도 독일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던 것. 이탈리아는 삼국동맹 회원이면서도 통수쳤다. 특히나 건함 경쟁 등으로 독일과 대치 관계였던 영국이 시종일관 단호하게 프랑스의 편을 들어주었던 것이 결정타였고, 결국 독일은 모로코 내 프랑스의 지배권을 수용해야만 했다.[3] 1차 모로코 위기를 통하여 독일은 실질적으로 국제적으로 왕따라는 것을 깨닫고 경악에 빠졌으며, 제대로 망신을 당한 빌헬름 2세는 분노하여 더 적극적인 팽창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비스마르크가 저승에서 울겠다 이 놈들아 이에 따라 삼국동맹과 삼국협상[4] 사이의 긴장감은 점점 커지게 된다.
3 2차 모로코 위기
1차 위기의 시퀄
1911년에 일어났으며 1차 위기와 마찬가지로 사건이 발생한 지역의 이름을 따 아가디르 위기(Agadir Crisis)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당시 독일이 전함을 파견했기 때문에 그 전함의 이름을 따 판터 호 사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30년 뒤의 그 판터 생각하면 심히 곤란하다
1차 모로코 위기가 끝난뒤 알헤시라스 협정에 의거하여 프랑스는 모로코에 대한 지배권을 착착 강화시켜나간다. 이런 상황에서 1911년 반프랑스 폭동이 발발하고, 프랑스는 군대를 동원하여 이를 진압한다. 이러한 무력 진압은 알헤시라스 협정 내용에 위반하는 것이었으며, 겸사겸사 한 독일 민간인의 소재가 불명해지자 독일은 이를 빌미로 자국의 건함 판터 호를 모로코에 파견한다. 독일의 어그로에 프랑스가 자극받으면서 다시 한 번 위기감이 유럽 열강들 사이에 감돈다. 한 편 프랑스의 동맹국이었던 영국은 독일을 견제할 목적으로 자국의 전함을 파견하면서 1차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한번 프랑스에게 힘을 몰아준다.[5]
영불협상의 위력 앞에 독일은 다시 한 번 자신들이 왕따라는 사실을 절감하면서 백기를 들 수 밖에 없었다. 사건 발발 한달여 뒤인 7월에 독일 대사가 프랑스 정부 측에 '독일은 모로코의 영토에 대한 이해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통보해왔다. 일련의 협상을 거쳐 프랑스는 독일에게 콩고의 북부지방을 할양해주었고, 그 댓가로 독일은 프랑스의 모로코에 대한 보호권을 승인한다. 결국 이듬해인 1912년 프랑스는 모로코를 자국의 보호령으로 삼게 된다.[6] 여담이지만, 이 2차 모로코 위기가 한창이던 와중에 독일은 심각한 금융위기[7]를 겪는데 '이게 프랑스와 영국의 음모다.'라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 ↑ 속된 말로 표현해서 프랑스가 침 다 발라놓은 모로코에다가 '나도 좀 끼자'면서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 ↑ 프랑스의 경우에는 아예 군대를 알자스-로렌 국경 근처까지 전진시켜놓았고, 독일도 예비군을 소집시켜놓았다.
- ↑ 굳이 얻은게 있다면 프랑스로 하여금 모로코 내 경찰에 대한 지배권은 토해내게 했던 것인데 정치/경제적인 면에서 이미 프랑스가 모로코를 거의 다 잠식한 상황이라 큰 의미는 없었다.
그냥 체면내는 용 - ↑ 다만 이 시기에는 러불동맹과 영불협상만 체결됐을 뿐 아직 러시아와 영국을 있는 영러협상은 체결되지 않았다.
- ↑ 사실 이 시기 영국은 독일하고 전쟁이 실제로 이루어질까봐 노심초사하기는 했다. 그렇지만 워낙 프랑스가 단호한 태도를 유지했으며 영국 자신들도 영불협상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에 울며 겨자먹는 심정으로 자국 해군을 모로코에 파견했다고...
- ↑ 다만 형식적인 독립은 쭉 유지한다.
- ↑ 하루만에 주가 지수가 전체에서 30%(!)가 떨어졌으며, 공황 상태에 빠진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금을 인출해가면서 라이히스방크가 보유한 금의 20%가 증발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