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마리나

marina_01.jpg

1 개요

모리스 마리나(Morris Marina)와 이탈(Ital)은 영국의 자동차 업체, 브리티시 레일랜드(이하 BL)가 1970년부터 1984년까지 생산했던 중형차이다. 기본적인 메카니즘은 모리스 마이너라는 베스트셀러 소형차를 기반으로 하며, 1950년대 후반부터 판매되던 "파리나(Farina)"계 BMC 세단 라인업의 대안으로 개발되었다. 13년 동안 100만대 이상을 판매해 마이너 못지않은 판매량을 자랑하지만 형편없는 품질과 상품성의 부재로 영국 자동차산업의 커다란 수치이자 놀림거리로 전락했으며, 영국 탑기어 등에서 모욕을 당하는 일도 빈번했다. 참고 가능 링크 참고 가능 링크2

2 배경

6507215037_d110fe7f32_b.jpg
(모리스 마리나 1.8리터 슈퍼 쿠페.)

BL이 갓 성립되었을 때는 미니 후속인 9X, 그리고 마무리 작업이 한창이던 오스틴 맥시 외에는 개발중이던 차가 없었는데, 이때 BL의 경영진들은 1948년부터 오랜 시간동안 생산되었던 소형차 모리스 마이너와 1950년대 후반부터 판매되던 "파리나"계 오스틴과 모리스의 BMC 세단 라인업을 대신할 신차를 구상하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코드명 ADO28이라는 프로젝트 하에 개발되었다.

이전의 파리나계 세단들이 브랜드를 막론하고 기술적인 첨단을 강조하던 것과 달리, 레일랜드의 경영진들로 구성되어 있던 새 경영진들은 오스틴을 첨단 브랜드로 밀어주는 한편 모리스를 기술적으로 평범하고 보수적인 브랜드로 밀어주기로 결정했다. 또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이나 호주 등의 수출시장에서는 파리나계 BMC 세단들을 비롯해 "기술적 첨단"을 강조하던 차들이 엔진도 작고 약한데다가 기술적으로 복잡해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는 점을 감안하자면, 기술적으로 단순하면서도 튼튼한 차가 필요하기도 했다. 때문에 마리나는 모리스 마이너의 후륜 활축과 뒷바퀴굴림 플랫폼을 재활용하기로 결정이 났으며, MG B트라이엄프 돌로마이트 등의 차로부터 일부 부품을 공급받기도 했다. 여기서 마리나의 주요 개발 방향을 엿볼 수 있는데, 즉 기존에 있던 양질의 부품들을 최대한 활용해 조합하면서, 개발기간과 비용을 절감하면서도 양질의 차를 개발한다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디자인은 2세대 포드 코티나를 디자인한 로이 헤인즈(Roy Haynes)가 맡았으며, 때문에 포드 코티나와 미적으로 유사한 부분이 조금씩 보였다. 포드 에스코트포드 코티나의 2개 차종에 각각 대응할 비용이 없다는 점에서, 마리나는 이 두 차의 중간 등급의 차로 디자인되었다. 헤인즈의 아이디어는 코티나를 기반으로 포드 카프리라는 스포츠 쿠페를 디자인한 경험을 따라 가족용 차와 회사용 차로 판매할 무난한 세단과 젊은이들을 노린 고급스럽고 스포티한 쿠페를 동시에 개발하는 것이였다.

Morris_Marina_Super_Deluxe_Sedan_1972_(2).JPG
(1972년식 모리스 마리나 슈퍼 딜럭스 세단.)

더 나아가 헤인즈는 비용 절감과 이를 통한 수익성의 창출을 위해 마리나의 플로어 팬, 즉 차체 하부를 다른 BL차들과 돌려 쓸 수 있도록 일명 "Condor"이라는 이름으로 완전히 새로운 뒷바퀴굴림 플랫폼을 구상하기도 했다.[1] 이러한 플랫폼의 공유에 대한 개념은 폭스바겐이나 토요타, GM, 현대자동차를 비롯해 현재 여러 브랜드를 가지고 있는 자동차 업체들이 시간과 비용을 절감하고 안정적인 진행을 위해 개발 과정에서 자주 사용하는 방법일 정도로 시대를 앞선 것이였다.

심지어 이 새로운 플랫폼은 새 부품 대신 기존의 부품들로만 만들기로 계획되어 높은 수익성을 기대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BL의 경영진들은 마리나의 플랫폼 공유에 대한 헤인즈의 발상을 너무 급진적이라고 판단해 거부했으며 트라이엄프 출신의 디자이너인 해리 웹스터도 개발을 빨리 진행하고자 이를 건너뛰기로 결정했다. 결국 헤인즈는 이 일로 BL에서 퇴사해버렸으며, 이후에는 BL의 개발진들이 이런저런 요소들을 손보면서 개발 기간도 길어졌고, 단순하고 저렴한 차라는 마리나가 오히려 앞바퀴굴림 설계나 유압 서스펜션 등의 진보적인 기술들을 잔뜩 집어넣었던 오스틴 알레그로보다 개발비가 더 비싸지는 어처구니없는 상황까지 벌어지고 말았다. 이 사건은 브리티시 레일랜드의 형편없는 비용 관리 실력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로 기록되기도 한다.

마리나를 생산할 공장으로는 옥스포드 카울리(Cowley)의 구 모리스 공장이 낙점되었으니, 1920년대 이후로 별다른 개선이 없었던 이 공장을 또 손보느라 생산비용이 더 늘어났다는 의미가 되어버렸다. 또한 E-시리즈 엔진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던 계획 역시 엔진 자체의 결함들을 이유로 손을 보기로 했는데, BL에서 비용이 덜 든다는 이유로 엔진의 스트로크(실린더 높이)를 늘리는 형태를 선호하면서 엔진의 높이가 높아졌고, 이러한 구조가 오스틴 맥시의 엔진 과열과 기름 연소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어 신뢰성이 더 나았던 기존의 A-시리즈 엔진과 B-시리즈 엔진을 장착하기로 결정이 났다. 그러나 이 계획이 바뀌었을 때는 E-시리즈 엔진의 높은 키에 맞추어진 채로 차체 디자인이 이미 끝나버린 뒤라, 마리나의 외관 디자인이 상당히 둔탁해져있었다.

덤으로 엔진 공정을 위해 육교를 설치하느라 비용이 더 늘어났는데, 버밍엄(Birmingham) 의회에서 BL에게 길을 제공하기로 한 때는 이미 육교가 다 지어진 뒤로, 결국은 쓸대없는 육교에 돈을 퍼부은 꼴이 나 버렸다. 게다가 18개월이라는 개발기간 시한이 다가옴에 따라 시간과 비용을 줄이겠다고 온갖 비용절감이 이루어져 차량의 질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때 맥퍼슨 스트럿 서스펜션과 BL의 신형 4단 변속기를 삭제하는 것은 물론, 세단과 쿠페가 앞문을 돌려쓰는 방안까지 나오면서 쿠페 버전의 디자인은 헤인즈가 의도한 "스포티하고 고급스러운" 이미지는 커녕 "평범해빠진" 세단 버전의 모습에 더 가까워졌다.

3 모리스 마리나(1971~80)

9230166701_0f81d2e055_b.jpg
(1971~1978년식 모리스 마리나 1.3리터 세단.)

1971년 4월 27일에 출시되었으며, 그해 5월부터 마리나를 생산하는 카울리 공정에서 야간 작업이 시작되었다. 세단과 쿠페의 2개 차체 라인업은 물론 1.3리터 A-시리즈 엔진과 1.8리터 B-시리즈 엔진의 2개 엔진 라인업이 준비되었으며 토션빔 서스펜션을 앞바퀴에, 리프 스프링 서스펜션을 뒷바퀴에 적용했다. 처음에는 매주 2천대를 생산하던 것이 연말에는 매주 5천대를 생산하는 수준으로 늘어났으며, 1972년 3월 29일에는 10만번째 마리나가 카울리 공정에서 완성되었다. 나아가 1973년 1월에는 25만번째 마리나가 생산되는 등 생산량은 고공행진을 이어갔다.

또한 1972년에는 왜건 버전이 선을 보였으며, 고성능 버전인 1.8 TC(Twin Carburettor)에는 MG B의 것과 유사한 2중 카뷰레터와 "BL 스페셜 튜닝(BL Special Tuning)에서 제공하는 바디키트 패키지(알로이 휠과 스포일러, 추가 조명 등)가 장착되었다. 또한 1977~1980년 사이에는 B-시리즈 엔진을 변형해 만든 1.5리터 37마력 디젤 엔진이 디젤 엔진이 유리한 몇몇 국가에 판매되기도 했다. 남아공과 호주에서는 "레일랜드 마리나"로, 뉴질랜드에서는 "모리스 1.7"로, 그리고 북아메리카에서는 "오스틴 마리나"로 수출되었다.

가족들과 실업가들의 수요는 마리나의 폭발적인 인기를 뒷받침해주었으며, 영원한 베스트셀러나 다름없던 포드 코티나 정도를 제외하면 적수가 없을 정도로 1970년대 중순까지 영국 내수의 중형차 판매량 중 상위권을 유지했다. 동시대의 오스틴 알레그로가 형편없는 디자인과 품질로 전임자였던 BMC ADO16과 다른 라이벌들의 인기에 못 미쳤던 것과는 대비되는 상황으로, 품질 문제가 마리나조차 같이 겪던 것임을 감안하자면 훨씬 차이가 뚜렷했다. 그러나 이러한 인기는 "마리나=지루한 차"라는 이미지를 벌기에도 충분한 조건에 있었으며, 새 고객들을 유치하는 한편으로는 BMC ADO17[2]을 비롯한 기존 차들의 고객들을 마리나로 유치하는 데는 어려움을 겪었다.

Morris%20Marina%20Mk3%201700%20Estate%20front.jpg

사실 마리나의 시작은 판매 실적과는 달리 그다지 좋진 않았다. 막판에 급조한 설계 때문에 부적절하게 설계된 앞바퀴 서스펜션이 1.8리터 버전에서 급격한 오버스티어를 일으키자 이를 손봐주어야 했으며, A필러 사이로 바람이 너무 심하게 들어온다는 지적도 받았다. 또한 BL의 고질적 문제였던 잦은 파업과 바닥으로 직행하는 수준의 품질 문제에도 시달려, 비평가들 사이에서 "최악의 차"들 중 하나로 종종 뽑혀오게 되었다.[3] 또한 후속차를 제대로 출시하지 못하는 와중에도 독일의 폭스바겐이나 일본의 닷선 등, 해외 경쟁사들은 기술적으로 훨씬 진보된 차들을 내놓고 있었다. 1970년대 중후반에 개발중이던 후속차는 끝내 개발비 부족으로 중단되었고, 1984년에야 후속차가 등장했다.

그래도 물 밀듯이 올라오는 경쟁차들에 대응은 해야 되기 때문에, 소소한 변화가 중간 중간에 있었다. 1975년에 BL이 국영화된 후에는 새 그릴과 인테리어, 승차감 개선을 위한 안티롤바 및 새 서스펜션 세팅, 개선된 방음 설비가 적용되었고, 1977년 5월에는 오스틴 알레그로에서 가져온 푹신한 시트를 장착했으며, 1978년 오스틴 프린세스에서 가져온 1.7리터 OHC O-시리즈 엔진을 B-시리즈 1.8리터 엔진 대신 적용하는 것은 물론 주행등과 새 범퍼, 앞 범퍼에 설치되는 스포일러를 마리나의 전 모델에 장착했다. 1980년까지 약 80만 7천대가 생산되었다. 나머지 내용은 추가바람.

4 모리스 이탈(1980~1984), 그리고 모리스의 소멸

009.jpg
1975년에 국영화된 지 4년이 지나, 마이클 에드워즈(Michael Edwardes) 경이 BL의 새 회장으로 들어왔다. 에드워즈 경이 BL의 온갖 난장판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1970년대 후반부터 경쟁에서 뒤쳐지던 마리나 역시 변화를 겪게 되었고, BL에서는 페이스리프트를 위해 조르제토 주지아로가 있는 이탈디자인에 페이스리프트 의뢰를 했다.[4] 이탈디자인과 내부 디자인 팀에서 진행한 페이스리프트 덕분에, 사각형 헤드램프와 후미등, 플라스틱 범퍼가 적용되어 마리나의 디자인이 좀 더 현재적으로 바뀌었지만 몸통과 인테리어를 비롯한 기존 부품 다수를 그대로 가져온지라 여전히 마리나의 향기가 짙었다.

1980년 7월 1일에 "모리스 이탈"이라는 이름으로 출시되었으며, 쿠페 버전이 단종되어 세단과 왜건, 픽업, 밴의 4개 바디로 라인업을 꾸렸다. 그해 10월에는 최고급형 HLS 트림 한정으로 2리터 O-시리즈 엔진을 얹은 자동변속기 버전이 제공[5]되었으며, 1981년 11월에는 HL과 HLS 트림의 인테리어 내장제를 개선했다. 1982년 9월에는 공장을 카울리에서 롱브릿지로 옮겼고, 라인업을 대대적으로 손을 보아 기본형 L 트림과 2리터 엔진을 삭제한 뒤 기존의 2개 트림은 SL과 SLX로 개명했다. 또한 앞바귀 서스펜션이 개선되어 텔레스코픽 구조의 댐퍼가 장착되었고, 포물선 형태의 스프링이 뒷바퀴 서스펜션에 적용되는 것은 물론 방음재와 인테리어 내장제의 개선도 따라왔다. 복스홀 카발리에를 비롯한 경쟁차들이 앞바퀴굴림으로 전환하는 시기인 1980년대에도 저렴한 가격 및 유지비 덕분에 40만대 이상을 팔아 나름대로 잘 팔린 편이였지만, 마리나 시절처럼 “최악의 영국차“ 중 하나로 분류되는 등 평가는 여전히 별로였다.

1984년 1월에 세단이 단종되었으며, 왜건과 밴 버전이 6개월 더 생산되다가 단종되었다. 모리스 브랜드로 판매되었던 오스틴 메트로의 밴 버전을 제외하면 사실상 모리스 브랜드로 나온 마지막 차가 되었다. 후속은 오스틴 브랜드로 출시된 몬테고로, 1984년 초반에 출시되었으나 판매량은 10년간 마리나/이탈의 반토막 수준인 약 57만대에 그쳤다. 다만 1988년 이후의 개량형 때문인지 평가는 그나마 좀 나은 듯하다.

6871629624_a8cd7395f8_b.jpg

이때까지 생산된 마리나는 마리나와 이탈을 합쳐 약 120만대로 BL이 출시한 차들 중 생산대수가 많은 축에 속했으며, 2015년 12월 기준으로 각각 724대와 173대의 모리스 마리나와 이탈이 영국에 남아 있다. 최근에는 영국 탑기어에서 "최악의 차" 리스트에 매번 올리는 것도 모자라 매 출연 때마다 땔감 내지 피아노가 떨어지는 과녁 등으로 등장하는 등, 오스틴 알레그로를 비롯한 다수의 BL차들과 같이 “1970년대 영국의 막장화된 자동차 산업의 상징“이라는 의미 때문에 커다란 조롱거리로 전락해 온갖 모욕을 다 뒤집어쓰기도 했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활성화된 대규모의 플랫폼 공용화를 앞서 진지하게 고려했던 최초의 자동차들 중 하나이자 비용절감과 양질의 차를 동시에 잡으려고 했다는 시도였다는 점, 그리고 BL의 경영진이였던 조지 턴불이 현대자동차의 부회장으로 건너가 마리나 2대를 샘플로 제공하고 마리나의 개발 경험을 현대 포니의 개발 과정에 반영함으로서 미쓰비시 랜서와 함께 대한민국의 자동차 산업에 기여한 차라는 나름 긍정적인 의의도 있다.[6]

여담으로, 중국의 FAW가 1998년부터 이탈을 현지화해 생산하려는 움직임을 보여 왜건과 픽업, 밴 모델을 중국에서 판매하기도 했다.
  1. 이게 어느 정도였나면, 모리스 브랜드로 나올 차들은 물론 MG, 심지어는 고급 브랜드인 울즐리(Wolseley), 재규어 차량까지 이르는 BL의 모든 뒷바퀴굴림 차량에서 사용하려고 했고, 마리나가 그 첫 번째 타자였었다.
  2. 알렉 이시고니스가 설계한 중형차 라인업. 앞바퀴굴림에다가 엄청나게 넒은 실내를 제공하나 엔진 배기량의 선택권과 난해한 디자인으로 판매가 부진했다.
  3. 카울리 공장의 확장부터가 무리수라 공장 라인이 외부 날씨에 다 노출될 정도였고, 조립 방식도 다른 곳에선 이미 폐기된 구식이라 출고된 차량 상태부터가 상당히 안 좋았다.
  4. 때문에 이름에 "이탈"이라는 서브네임이 들어갔고, 광고에서도 이탈디자인이 참여했다는 점을 활용했다. 하지만 디자인 과정은 내부 디자이너였던 해리스 만(Harris Mann)이 주 역할을 맡았다.
  5. 생산대수가 약 1천대 가량에 불과해, 그 동안 생산된 모리스 이탈 중에서 가장 희귀하다.
  6. 심지어 현대 포니는 마리나에서 채용되지 못한 맥퍼슨 스트럿 서스펜션도 포함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