뭄바이 연쇄 테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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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가 일어날 당시 공격당한 장소들.

1 개요

2008년 11월 26일부터 29일까지 일어난 파키스탄 테러집단 '라쉬카르 에 타이바(Lashkar-e-Toiba)'[1]에서 보낸 10명의 테러리스트가 인도 뭄바이에 해상으로 잠입한 뒤 5개조로 나뉘어 활동하며 무차별 살상을 벌인 뒤 생포된 한명을 제외하고 전원 사살되어 195명의 사망자와 350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테러 사건이다.

2 라쉬카르 에 타이바

라쉬카르 에 타이바는 파키스탄의 이슬람 테러조직으로 1980년대 초에 조직되어 파키스탄 정보국 ISI로부터 지원을 받아왔다.[2] 조직목표는 남아시아 지역에 이슬람 국가를 건설하고 인도가 통치하는 카슈미르 지역에 거주하는 무슬림들을 해방시키는 것.

원래는 파키스탄의 무리드케 지역에 본거지를 두고 있었으나 9.11테러 이후 미국 정부가 라쉬카르 에 타이바를 해외 테러 조직으로 지정하자 파키스탄 정부는 지원을 대외적으로 중단했다.

인도 정보당국은 테러 2년 전 라쉬카르 에 타이바에 대한 경고를 받았다. 첩보 보고서에 이들이 해상 침투조를 훈련 중이고, 언제 침투할지 모른다고 적혀져 있었으나 당국은 해안 경비에 어떠한 조사도 안했다. 3개월 전에는 뭄바이에서 주로 서양인을 노린 공격 대상에 대한 정보도 받았으며, 타지마할 호텔, 트라이던트 오베로이 호텔, 레오폴드 카페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후 폭탄 테러의 발생 가능성보다 무장 테러범이 건물에 남아 교전을 펼칠거란 정보도 입수했으나 당국은 전체적인 상황파악과 가능성, 대처방안을 생각하지 않았다.[3]

이러한 정보는 지역 경찰에도 전달되어 일시적으로 순찰이 강화되었고, 공격대상에 오른 곳의 자체 보안을 강화 하도록 장려했다. 여러 출입구를 폐쇄하고 금속 탐지기를 설치했으며, 경비원을 늘리고 호텔의 보완도 강화했으나 호화로운 호텔에서 경비원들이 무장한 채로 돌아다니는 것은 호텔의 일상적인 업무와 어울리지 않는 조치라는 판단하에 테러 발생 1주일 전 특별 보안 조치를 철회했다.

경찰들의 상황도 좋지 않았는데, 경찰관 상당수의 무기는 민간 소요사태만을 다루도록 교육받아 대나무 몽둥이가 전부였다. 그나마 총을 가진 경찰관들도 있긴 있었으나 교육을 적게 받아 쏘는 방법을 제대로 모르거나 쏠 줄 안다 해도 명중률이 굉장히 낮았다.[4]

3 테러 준비과정

라쉬카르 에 타이바는 파키스탄의 캠프에서 혹독한 군사 훈련과정을 조직원들이 거치게 했고, 각종 특수훈련을 받게 했다. 또한 뭄바이에서 활동할 때 최대한 신분을 위장하고 파키스탄 사람인 것을 숨기기 위해 인도억양 힌두어를 쓰라고 가르친 뒤 억양을 가르치기도 했다. 도시 전역에 걸친 장기전 계획을 배우고, 건물 내부 등 협소한 공간에서의 교전 기술, 공성전 훈련도 받았으며, 며칠간 잠을 자지 않는 훈련을 받고[5] 체력을 유지하도록 말린 과일 등을 챙겨주기도 했다. 또한 인도 보안군에게 수적으로 밀릴 것을 알고는 공격 목표인 건물의 상층을 확보하라고 가르치기도 했다. 인터넷 접속이 가능한 핸드폰을 받고, 무선 인터넷이 가능한 노트북으로 구글 어스에 접속해 테러 목표 시설에 대한 위성사진을 그 자리서 수집하고, 뉴스 보도나 블로그를 통해 보안당국의 움직임을 감시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추적하기 쉬운 일반 전화가 아닌 인터넷 보이스 폰을 사용해 당국의 추적을 피했다.

또한 파키스탄계 미국인 데이비드 헤들리[6]라는 다국어가 가능하고, 여러 여권을 가지고 있던 이슬람 신자를 스파이로 활용해 인도에 헤들리의 친구가 운영하는 이민회사 지점을 개설하게 한뒤 2년간 뭄바이에 5번 가면서 아파트와 사무실을 임대하고, 타지마할 호텔을 비롯한 테러를 일으킬곳을 조사하고, 뭄바이 항구 주변을 도는 유람선에서 적당한 상륙지점을 물색한뒤 여행이 끝나면 조직에 정보를 전달하도록 했다.

이후 10명의 무장한 테러범들은 2008년 11월 26일 20시경 파키스탄의 카라치에서 출발한 뒤 도중에 아라비아 해에서 모선을 벗어난 이후 어선 한척을 나포하고 안에 탑승했던 4명의 선원을 사살했다. 그리고는 배를 뭄바이 해안으로 돌리고, GPS와 휴대전화를 가지고는 고무보트에 분승해 뭄바이 시내로 택시를 타거나 걸어서 나아갔다. 택시를 탄 테러범들은 몰래 택시에 폭탄을 설치해 테러범이 많은 것처럼 보이게 하기도 했다.[7]

4 테러 과정

2008년 11월 26일 인도 뭄바이. 밤 9시 20분, 트라이던트 오버레이 호텔의 더빈 레스토랑에서 투숙객이 총성을 듣고 무슨일인가 싶어서 밖으로 나가지만 직원들은 불량배들이 한 짓이라며 안심시켰다. 하지만 얼마 안가 테러범들이 들이닥쳐 투숙객을 상대로 총을 쏘기 시작했다. 투숙객들은 탁자 밑으로 대피했지만 테러범들은 탁자 밑을 향해 총기를 난사하기 시작했다. 총기난사가 잠잠해지자 테러범들이 잠시 사라진 틈을 타서 요리사들은 부상자들을 주방으로 옮겼다. 하지만 테러범들은 돌아왔고 출입문서 다시 총을 쏘기 시작했고, 주방으로 수류탄도 던졌지만 다행히 불발탄이어서 수류탄으로 인한 인명피해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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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로 피해를 입은 트라이던트 오버레이 호텔

밤 9시 30분, 두 남자가 택시 안에서 몰래 폭탄을 설치한 뒤 내려 서양 관광객들의 단골 명소로 유명했던 레오폴드 카페에 들어갔다. 얼마 안가 큰 폭발음이 카페 내에 울렸고 이후 테러범들은 카페안의 관광객과 점원들을 향해 총을 난사했다. 결국 15명의 사망자와 2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테러범들은 총을 쏜 뒤 타지마할 호텔로 향했다.

3km 떨어진 곳에서는 두 남자가 차트라파티 시바지(Chatrapati Shivaji)역에 들어섰다. 두 남자는 기관총으로 무장한 뒤 대합실에 들어와 수류탄을 던졌다. 수류탄이 폭발하고 사람들은 놀라 대피하자 도망가는 사람을 향해 서로 등을 맞대고 빙글빙글 돌아가며 총을 쏘기 시작했다. 경찰관이 역을 포위했으나 무기는 리볼버 총 한 자루와 대나무 몽둥이가 전부였고, 역에 있던 무장 경비원이 303구경 볼트액션 소총으로 도왔으나 테러범의 AK-47에 현저히 밀렸다. 결국 경찰관들은 총격전 도중 총을 맞고 사망하고, 무장 경비원은 가슴에 총을 맞고 의식을 잃었다.[8] 테러를 마친 2인조 테러범들은 방향을 돌려 카마 병원과 알블리스 병원으로 향했다.

11월 27일 밤 1시 26분, 인도 정부 요원들은 심카드를 통해 뭄바이서 활동중인 테러범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도청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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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 30분, 알블리스 병원에서 군경 합동부대와 조우한 2인조 테러범은 총격전을 벌이다가 도로 차단물 앞에서 테러범 2명이 총에 맞았다. 1명은 사망했고, 파키스탄 펀자브 지방 출신의 21세 청년 ‘모하마드 아즈말 아미르 카삽‘(사진)은 경찰 1명을 살해하며 저항했으나 그 자리서 제압되고 생포되었다. 이후 경찰 앞에서 파키스탄의 이슬람 테러조직 라쉬카르 에 타이바에서 왔다고 진술하며 그동안 어떻게 작전을 짜왔는지 진술했다.[9]

9시 43분, 타지마할 호텔[10]에 두 남자가 가방을 메고 로비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호텔 안을 돌아다니며 내부 구조를 조금씩 살피기 시작했다. 이후 두 남자는 총을 꺼내 쏘기 시작했다. 안의 투숙객들은 근처 결혼식장에서 폭죽을 터뜨리는 소리로 착각했다. 테러범들이 잠시 나가자 직원들은 부상자를 로비 의자에 앉히고 치료하려 했으나 테러범들이 다시 돌아와 총을 쏘기 시작했다. 호텔 유리창이 깨졌고, 직원들은 투숙객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대피시켰다. 이때 카페에서 테러를 벌였던 2명의 테러범들도 호텔에 도착했다. 처음 도착했을 때는 투숙객으로 오해받고 이미 있던 테러범들의 총에 맞을 뻔했다. 식당으로 부상자들이 대피했고, 식당에서 식사를 하던 사람들은 갑자기 피를 흘리는 사람이 달려들어와 무슨 일인지 의아해 했으나 얼마 안가 총성이 다시 들리고 모두 주방으로 대피했다. 일부 이슬람 신자들은 대피 후 기도를 하기도 했다. 테러범들은 객실 층으로 올라가 객실 안에 숨은 투숙객들을 총으로 위협하며 끌어낸 뒤 쏴 죽이기 시작했다. 투숙객들은 객실문을 의자로 막으며 저항했고, 일부 투숙객은 살아남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종이에 유서를 적기도 했다. 핸드폰이나 노트북 등으로 인터넷 기사를 살피며 상황을 파악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테러범들은 파키스탄의 본부가 기사를 읽어주며 전달하는 내용을 받았고, 장관이 호텔에 있단 사실을 알고 잡으러 나서기도 했다. 경찰은 무전기가 교신량이 급증하면서 회선이 불통이 되어 각자의 휴대전화로 교신중인 상황이었기에 휴대전화 차단을 하지 못했다. 이후 새벽 3시 30분, 테러범은 호텔에 불을 질렀고 이는 전세계에 생중계됐다.

밤 11시, 빌리 파렐과 와디 번데에서 테러범이 탑승했던 택시에 설치한 폭탄이 폭발했고, 트라이던트 오버레이 호텔과 유대교 회당 나리만 하우스, 타지마할 호텔이 테러범에게 장악당했다.

6시 50분, 경찰이 타지마할 호텔에 들어서고 시신을 끌어냈다. 소방대도 출동해 굴절차로 총격이 멈춘 사이에 투숙객을 구조하기도 했다. 구조가 끝나자마자 총격은 다시 시작됐다.

5 진압 과정

당국은 산발적 공격인 것을 뒤늦게 깨닫고 첫 총격 후 90분이 지난 11시가 되서야 인도 정예 대테러부대 국가 보안대 블랙캣 200명을 출동시켰다. 문제는 국가보안군 기지가 단 한 곳, 뭄바이서 1,400km 떨어진 마네사르에 있었고, 새벽 4시가 돼서야 수송기에 탑승하고 출동을 할 수가 있었다. 공격 개시 후 10시간 동안 테러범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았다.

경찰과 해병대가 테러범들을 진압하려 했으나 그들은 간헐적인 반격을 하며 훌륭히 엄페를 구축한 상황이었고, 더군다나 현지 테러진압 수뇌부가 와해된 상황이었다. 모조리 사살당한 것. 이런 상황에서도 경찰과 해병대는 테러범들을 한 곳으로 몰아넣는 데 주력했다. 테러범의 위치를 파악한 이들은 호텔구관 비상구를 통해 인질들을 탈출시킬 퇴출로를 확보한 뒤 총상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린 후 투숙객들을 대피시켰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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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9시 45분, 국가 보안군 소속 특공대원들이 출동했다. 하향식 수색을 채택하여 헬기로 내려가 호텔의 맨 위에서부터 차례로 객실을 소탕했다. 그와 동시에 손님들을 대피시켰다. 이후 구출작전이 생중계되고 테러범들은 호텔의 고지대를 점령한 뒤 수류탄을 던지며 저항했지만11월 28일 11시, 호텔의 테러범들이 사살되고, 오후 3시에는 트라이던트 오버레이 호텔의 2인조 테러범이 사살되었다. 나리만 하우스의 테러범 2명은 유대인 5명을 인질로 잡고 구출부대와 대치했지만 Mi-17 헬기가 호버링 하는 사이 블랙캣 대원들은 급속 로프 강하를 하여 나리만 하우스로 접근한 뒤 테러범과 총격전을 벌이고 28일 오전 8시 30분, 테러범 2명이 사살되면서 테러는 끝이 났다.

6 테러 이후

인도 정부는 테러 발생 초기 늑장 대응으로 비난을 받고 테러 대응에 소홀했던 점을 인정한 뒤 반테러 법안을 통과시키는 등 대책을 강구했다.

7 시사점

이 사건은 1998년 인도와 파키스탄이 서로 경쟁적인 핵실험을 통해 핵무장을 공식화한 이후, 양국간에 무력분쟁 발생 위험이 높아진 상황을 반영하는 사례로 손꼽힌다. 특히 양국이 영국의 식민지배에서 독립, 분리 건국된 당시부터 계속되어 온 카슈미르 영유권 분쟁에서 도전자 입장에 놓인 파키스탄이 핵무장을 앞세워 인도의 대규모 군사보복과 반격에 따른 부담을 거부하고, 제한적 수준의 무력 공세 빈도를 높여 인도에 전략적 부담을 강요하고 있는 추세인 것이다.[12] 이 점에서 1999년 카슈미르 접경에서 발생한 카길 전쟁, 2001년 인도 뉴델리의 국회의사당 습격 등과 연장선 상에 있다고 평가된다.

또한 이 사태을 통해 인도군과 경찰의 테러 대응 능력이 매우 부족하다는 점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대응 자체가 늦어진 것 외에도 세부적인 작전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여러가지 난점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장비 면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였는데, 출동한 경찰들 중엔 제대로 된 돌격소총이 아닌 2차 세계대전 때나 쓰던 리-엔필드로 무장한 모습까지 나오는 등 여전히 열악한 실정임을 보여주었다.
  1. 순수한 자의 군대라는 의미
  2. 파키스탄 정보국은 오사마 빈 라덴일당도 지원한적이 있는데, 이슬람 원리주의 테러범들을 활용해 국경 분쟁 중에 있던 아프가니스탄과 인도를 공격하려는 포석이었다.
  3. 다만 혹시 몰라 인도 정보기관은 활동을 추적하기 위해 비밀 경찰을 이용, 인도에서 사용하는 휴대전화 심카드를 입수한 뒤, 번호를 기록해 테러 조직원들에게 심카드를 넘겨줬고, 그중 일부가 뭄바이 테러범의 휴대전화에 삽입되었으나 이들은 전화 도청 가능성을 알고 목적지에 도착할 때 까지 사용하지 않았다.
  4. 이 때문에 테러 당시 경찰대응은 6분도 안 되어 이루어졌으나 AK-47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테러범들에게 밀려 사살 당했다.
  5. 잠을 못자도록 암페타민, 코카인, LSD 같은 마약도 복용했다.
  6. 개명한 이름. 개명전 이름은 다우드 길라니. 민족성을 숨기기 위해 개명했다. 뭄바이 테러 10개월후, 미국에서 '유럽에서 벌인 테러' 혐의로 체포된뒤 아래의 사실을 털어놓았다. 이후 12건의 테러에 대한 유죄를 인정한후 사형은 면해도 35년형을 받았다.
  7. 이 때문에 택시의 폭탄이 터졌을 때 사방에서 테러가 일어났단 전화가 경찰서에 폭주했고, 테러범의 수가 60명이나 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8. 이후 구조된 후 생존한다.
  9. 이후 대량살인죄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고 2013년 사형에 처해졌다.
  10. 1903년에 지어진 호텔로 인도의 국가적 자존심을 상징하는 건축물이었다. 인도의 엘리트 계층과 외국의 주요 인사들이 머무는 곳이었고, 객실 수는 565개에 달했다.
  11. 이때 타지마할 호텔 19층에서 한국 총 영사관 주최로 개최된 ‘한.인도 실업인협회 창립총회’ 에 참가한 한국 외교관과 교민 26명도 탈출했다. 다행히 연회 장소는 호텔 구관이었고, 테러 발생 장소는 신관이었다.
  12. 한반도에서 북한이 핵무장 능력을 배경으로 2010년 천안함 피격사건, 연평도 포격전 등을 도발한 것도 파키스탄과 유사하다는 평가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