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 문서 : 바람의 나라(게임)
목차
1 개요
바람의 나라가 밟아온 길을 간략하게 되돌아보는 항목. 이 문서에서는 업데이트로 간간히 이루어지는 세밀한 것보다는 크게 변혁을 일으킨 부분만 다룬다.
2 과거 특징
- 통신비가 많이 나왔다
1990년대와 2000년대[1] 초반 유저들은 대부분 다이얼 방식 모뎀을 사용했기 때문에 통신고지서의 금액이 어마어마했다. 그때 미성년 유저에게 통신고지서는 저승사자나 마찬가지였다. 매달 고지서가 올때마다 비오는 날 먼지나게 맞았다[2]
- 유료로만 할 수 있던 게임이었다
2005년 7월까지 유료화 정액제 서비스였지만[3][4] 넥슨 측에서는 더 이상 수익성이 없다고 판단하여 2005년 8월 1일부로 넥슨 클래식 온라인 게임이라는 이름으로 무료화하여 전환되어 동시 접속자수 13만 명을 기록하기도 했다. 바람의 나라만은 정액제를 고수해왔는데, 다른 상용화 게임은 다 정액제에서 무료게임으로 전환되자 이를 눈치보아 무료화로 전환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개발자의 증언에 따르면 바람의 나라에서만 100억을 벌어들인다는 증언이 있을 정도라고했다.
- 그래픽이 많이 바뀌었다
그래픽을 보통 1세대, 2세대, 3세대로 나누는데, 1세대를 흔히 구버전 바람의나라[5], 2세대를 봉황클라이언트(봉클) 바람의나라[6], 현재를 3세대 그래픽으로 본다. 2세대 시절의 바람 일상은 조랑이의 바람일기를 통해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리즈 시절이었던 2세대 바람의 나라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많아 2014년 5월 27일 열린 넥슨 개발자 컨퍼런스를 통해, 첫 상용화 버전인 1996년 판으로 복각된 클라이언트가 공개되었다. 역사상 최초의 온라인 게임 백섭(Back server)[7] 복각 작업이 회사의 승인아래 이루어진 것이며 바람의 나라 홈페이지에서 다운로드받을 수 있다. 캐릭터를 생성하여 직접 육성하는 것은 할 수 없고 미리 생성되어 있는 캐릭터를 선택하여 플레이하는 방식으로 첫 상용화 버전을 체험해보는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 하지만, 캐릭터가 제대로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끊김이 잦고 튕김도 많아서 한번 튕기면 재접속은 포기하는 것이 속편하다. 일부 유저들은 복구를 해주려면 제대로 해달라고 하거나, 이렇게 옛날 버전 말고 2000년 버전의 바람의 나라를 돌려달라는 볼멘소리가 많다.[8] 제주도에 있는 넥슨컴퓨터박물관에서도 직접 플레이 해볼 수 있다.
- 레벨 99가 끝이었다
한 때 레벨의 최고한계가 99었는데 보통 ‘지존’으로 불리었다. 레벨 99가 된 뒤에는 ‘승급’을 통해 계속 육성이 가능했는데, 승급은 경험치를 체력과 마력으로 환원하는 방식으로 일정한 기준 체력, 마력을 달성해야했다. 승급 차수는 1차부터 6차까지 존재한다. 최근에는 레벨 640으로 범위를 대폭 늘렸지만 시스템은 그대로다.
2.1 세계 최초 MMORPG?
이 게임이 서비스되기 전인 1995년 12월 15일부터 메리디안 59(Meridian 59)라는 MMORPG라는 게임이 미국에서 서비스를 시작했으며 MMORPG의 역사는 통상적으로 메리디안 59부터 시작한다. 메리디안 59는 상당히 많은 양의 정보표현(전투, 이동, 아이템, NPC등)을 3D 그래픽+2D 그래픽으로 처리했으며 GUI는 지금봐도 플레이가능할 정도로 체계가 잡혀있었다.플레이영상 보러가기
또한 MMORPG라는 개념이 탄생하기도 한참 전인 1991년부터 (동명의 CRPG와 다른)네버윈터 나이츠(NeverWinter Nights)라는 머그(Graphical MUD)게임이 통신사업자를 통해 서비스하고 있었으며 1997년까지 서비스되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MMORPG라는 단어 자체는 리처드 개리엇이 만들었으며 울티마 온라인의 성공 이전에는 MMORPG라는 개념이 거의 퍼져있지않아서 울티마 온라인 역시 종래의 그래픽 머드(Graphical MUD)라고 불리거나 '메리디안 59'는 MMPRPG(Massively Multi-Player Role-Playing Game)라고 자신의 장르를 정의할만큼 MMORPG의 개념 자체가 빈약했다.
이런 상황에서 바람의 나라는 천리안과 유니텔을 낀 머그(MUG, Graphical MUD의 콩글리쉬)게임으로 서비스를 시작했는데 이런 식의 머그 게임이라면 이미 미국에서 1991년부터 다수의 게임이 존재했다. 바람의 나라가 은근슬쩍 MMORPG로 편입된 것은 MMORPG라는 개념이 울티마 온라인의 흥행으로 확립되고 바람의 나라가 천리안/유니텔이 아닌 인터넷을 통해 직접 서비스한 이후의 일이고 시작은 분명히 머그 게임(Graphical MUD)이었으며 머그 게임 혹은 그래픽 머드게임이라는 장르는 울티마 온라인으로 대표되는 MMORPG와는 분명히 다른 개념이다.
머그 혹은 그래픽 머드(Graphical MUD)게임과 MMORPG의 차이점과 간략한 역사를 보려면 MMORPG항목을 참조.
1991년 서비스된 최초의 그래픽 머드게임인 네버윈터 나이츠의 그래픽 수준이 빈약하고 텍스트성이 과다하게 많으므로 "별다른 텍스트의 설명 없이 직관적으로 판단을 할 수 있는 그래픽을 최초로 사용했다고 보는 게임은 바람의 나라로 볼 수 있다"는 주장도 있으나 1992년부터 시에라 온라인(Sierra Online)에 의해 서비스되어 상당한 인기을 얻은 북미의 게임 '이서비우스의 그림자(The Shadow of Yserbius)'만 하더라도 상당히 직관적인 GUI를 가지고 있다. 바람의 나라보다 약간 앞서 서비스된 메리디안 59까지 가면 이동과 전투화면이 3D 그래픽으로 구현되는 등 더욱 그래픽성은 강화된다.
서비스를 제외하고 상용화 자체는 메리디안 59(1996년 9월)보다 바람의 나라(1996년 4월)가 다소 빨랐으니 "(최초로) 실제 상용화된 그래픽 기반의 MMORPG"라고 설명할 수는 있겠지만 본 문서의 다른 곳에서도 언급되듯이 바람의 나라가 최초로 등장한 것은 머그 혹은 그래픽 머드(Graphical MUD)로서 등장한 것이지 MMORPG가 아니며, 머그 혹은 그래픽 머드라는 장르로 국한한다면 바람의 나라보다 앞서 상용화된 게임은 존재한다. 위에서 언급한 네버윈터 나이츠(1991년)와 이서비우스의 그림자 시리즈(1992~1995년)가 대표적.
MMORPG라는 개념이 생기지도 않았을때 북미에서 이미 뿌리내린 장르인 머그게임(Graphical MUD)으로서 애초에 선보였다가 나중에 MMORPG로 편입된 게임이 '최초의 상용화 MMORPG'라고 불릴 수 있을지 각자 자문해볼 일이다. 기네스북이 머그시절의 바람의 나라도 MMORPG로 인정한 것처럼, 머그게임/그래픽 머드게임도 MMORPG라고 인정한다면 네버윈터 나이츠와 이후에 북미에서 서비스된 머그게임/그래픽 머드게임이 최초의 상용화 MMORPG로 인정받지 못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즉, 요약하자면
- 머그/그래픽 머드(Graphical MUD)게임을 MMORPG의 초기형태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바람의 나라는 네버윈터 나이츠(1991년)나 이서비우스의 그림자 시리즈(1992년~1995년) 같은 미국의 머그/그래픽 머드게임보다 늦게 개발되었다. 상용화를 따지든 그래픽 구현을 따지든 전부 늦다. 또한 당시 미국의 머그/그래픽 머드게임은 후대로 갈수록 GUI가 직관적인 형태로 발전했고 그래픽 퀄리티도 좋아졌으므로 바람의 나라의 그것보다 떨어진다고 할 수 없다.
- 바람의 나라는 1995년 12월 15일부터 서비스를 시작한 메리디안 59(Meridian 59)보다 늦게 출시되었다. 그리고 메리디안 59는 인터넷 기반으로 서비스되었으며 이는 바람의 나라의 PC통신 천리안/유니텔 기반보다 훨씬 선진적인 방식이었다.
참고로 대학에서 게임 시나리오 라이터 관련 강의나 게임 제작 강의에서 게임의 역사 부분에서 많은 교수들은 바람의 나라를 실제 상용화된 그래픽 기반의 MMORPG라고 설명을 하며 각종 국제 컨퍼런스에서 이러한 의견을 피력하여도 반론이 없다고 한다.[9]
때문에 바람의 나라가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는 말은 '가장 오랫동안 상용화 서비스중인 MMORPG(the longest-running commercial graphical MMORPG)'이지 최초로서 등재되었음은 아니다. 참고로 바람과 나라보다 일찍 서비스한 그래픽 머드게임나 MMORPG들은 나중에 거의 서비스를 중단했고 일부는 추억팔이때문에 무료로 다시 서비스하고 있다.
때문에 그래픽 기반 온라인 게임의 출발점이라기 보다는 여명기를 밝힌 작품이라고 봐야 정확할 것이다. 당시에는 그래픽 기반 온라인 게임을 머그 게임이라고 했는데, 초기 홍보 단계에서 머그 게임이라는 말을 도저히 알아듣질 못해서 난항을 겪다가 울티마 온라인이 나온 이후로 '울티마 온라인 같은 게임입니다'라고 홍보했다고...사실 미국인도 무슨 말인지 모른다. 구글에서 MUG game이라고 검색해보라. 머그컵만 잔뜩 나온다(...) 근데 애초에 Multi-User Graphic이라는 조어가 말이 되나?
3 역사
3.1 구버전 시기(1990년대 중반)
극초창기. 도스용 머드게임에 그래픽만 입힌 개념이었던 시절로 인터넷의 상용화도 거의 되지 않았던 때여서 경험해본 사람의 수가 손에 꼽는 시대이다. 일단 당대부터 플레이해 온 유저의 인터뷰에 따르면 1만 명 정도는 거뜬한 "현재(2000년 경으로 추정)"와 달리 서버에 100명 정도만 접속해도 끊김이 일어나던 시기였다고 하니(...).
우선 게임의 기본 구조부터가 현재와는 엄청나게 달랐는데 물가 자체가 지금보다 1000배 가량 비싸서 도토리를 모아 푸줏간에 팔면 100만전 정도를 얻을 수 있던 시기였고, 포목상이나 갑옷점, 대장간 등에서 파는 초보용 무기가 최소 1만전에 비싸면 수천만 전까지 나가기도 하는 괴랄한 물가를 자랑했다.[10] 또 승급 개념도 없었고 자호굴, 전갈굴, 해골굴 등의 바람하면 떠오르는 기본적인 사냥터도 거의 미비했던 시절이었다. 반면 기원이라든가 무한장, OX퀴즈, 감옥 등의 부가적인 요소들이 많았고 당시에는 꽤나 인기였던 콘텐츠였는데 이는 MMORPG로서의 온라인 게임이라는 틀이 덜 잡힌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요소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3.2 과도기(1990년대 후반)
PC통신에서 인터넷으로 넘어가는 시기로 게임 인터페이스 자체에 대대적인 격변이 일어났던 시기. 많은 사람들이 흔히 떠올리는 구버전(정확히는 1997년 이후의 그래픽) 그래픽이 이 때 정립되었고 게임 시스템 자체가 갈아엎어져 게임 내 아이템, 마법, 승급제, 각 성별 사냥터 등의 현재까지 이어져내려오는 게임의 기본적인 구조가 대부분 이 때 정립되었다. 유저들이 적었던 초창기에 적극적으로 유저들과 소통을 하고 온라인 게임으로서 필요한 것들을 운영진 측에서 적극 반영한 결과 대대적인 유저들의 유입으로 2000년대 초반까지 이어지는 제1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이 시기에 정립된 인터페이스들은 수도 없이 많은데, 기본적으로 1차부터 3차까지의 승급체계가 이 때 만들어졌으며 그에 따른 사냥터 또한 생겨나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또 부여 지역이 생겨나 국적 개념이 추가되었으며 물가가 리셋되었고, 마법들의 영어 명칭이 한국어식으로 변경되는 등 구버전 하면 떠올리는 대부분의 체계가 이 시기에 완전히 정립된다.
3.3 무료화 이전(2000년대 전반)
바람의나라 제 1의 전성기라 불리는 시기이며 그 당시 인기아이템들을 구할수 있었던 북방대초원, 일본(2000년), 용궁, 세시마을(2001년) 등과 승급자들을 위한 사냥터인 선비족, 흉노족(2002년) 그리고 그 당시 최고의 노가다 장소 환상의 섬(2003년)이 이시기에 생겼다. 다만 이 시기에 만들어진 대부분의 콘텐츠들은 기본적인 틀에 추가된 부가 콘텐츠에 가까운 것이 특징이며 한편으로 이런 콘텐츠들의 지나친 범람은 기존 성에 위치했던 사냥터나 그곳에서 얻을 수 있는 아이템들의 가치를 하락시켜 후에 이들 지역이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는 원흉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3세대를 대표하는 그래픽 패치가 선을 보였던 것도 이 시기였으며 전반적으로 평가가 좋지는 않았으나 다들 알다시피 넥슨은 결국 이를 밀어붙인다(...).
이 시기에는 인터넷의 상용화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지고 RPG의 개념도 정립되면서 경쟁 온라인 게임들이 많이 등장했던 시기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래픽이나 인터페이스가 구시대적일 수밖에 없는 바람의나라 운영진 입장에서는 유저들을 유지하고 끌어모으기 위한 컨텐츠가 필요했던 것은 어쩔 수 없었으며, 앞서 언급된 부가 콘텐츠들 또한 이러한 이유에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업데이트는 일시적으로 성공을 거두었으나 바람의나라라는 게임이 원작과 동떨어지는 근본 원인이 되었으며 동시에 오늘날 바람이 비판을 받는, 초심에서 멀어진 운영진의 행태라는 원인의 출발점이 되었던 어두운 그늘이라고 볼 수도 있다.
3.4 무료화 이후(2000년대 중후반)
2005년 8월 무료화 직후 동접자수가 10만명을 돌파하는 등 제 2의 전성기라고 불렸던 시절이였다. 하지만 신버전 구버전 투표 조작 이후 구버전이 없어지면서 짧은 전성기는 끝이나고 말았다.
2009년에는 기술연마가 처음 도입되었고[11] 4차승급이 추가된지 7년만에 5차승급이 추가되었다.
3.5 최근(2010년 이후)
2010년 12월에 '격풍'이라 불리는 대형 패치를 통하여 많은 변화가 있었고 신규서버인 '비류'가 추가되었다. 특히 기존에 NPC에게 제물을 바치고 마법을 배우는 방식에서 전원 기술연마를 통해서만 마법을 배울 수 있도록 변경되었다.
특히 게임의 난이도를 줄이겠다는 제작진의 의도에 따라, 몬스터 난이도와 경험치가 전면적으로 개편되었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 이 조치 이후로 거의 모든 승급자용 던전이 망하고 백제의 마한산적굴/와산성 인던만 흥하게 되었다.[12] 한빙지옥과 풍도지옥은 망했어요. 지옥 던전은 매크로 던전이 되어버렸다. 마한도 마찬가지
더불어 고전 아이템(해골무기, 깹무기류, 산신옷, 이가닌자의검, 등대빛의검, 용궁산 아이템, 천부연아이템 등)의 능력치 상향 조치로, 얼마전까지만 해도 듣보잡 취급받던 이가검과 등빛검의 수요가 초보자들 사이에서 급등하여 시세의 격변을 보여주었다. 33, 66, 99직업무기를 퀘스트 없이 공짜로 주게 되어, 괴력선창과 같이 시세가 폭락해버린 비운의 아이템도 존재.
2011년 12월엔 룰렛이벤트로 인해 여신의 방패랑 양첨목봉이 시세가 똥값내지 바닥에 버리는 쓰레기템이 됐으며 2012년 2월 9일 발렌타인이벤트가 시작되면서 초콜릿귀걸이들의 능력치가 기존 방어구보다 상상을 초월한거 모자라 리붓초반엔 확률도 그럭저럭 잘 나오는 현상이 발생하면서 고급초콜릿귀걸이들의 물량이 대량으로 풀려버리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로 인해 현재 전 서버상황이 헬게이트가 열렸으며 기존 방어구었던 보무의 목걸이, 수정의 귀걸이, 해골 목걸이, 금편의 목걸이, 몇년동안 희귀아이템이자 30만원이나 넘는 고가템이었던 승리의 증표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똥값으로 몰락하면서 던전 앤 파이터의 키리의 약속과 믿음 이벤트나 라그나로크 온라인의 드햇나로크나 메이플스토리 언리미티드 패치의 헤파이스토스에 도전하라 이벤트 당시 놀장강과는 다른 병맛 쩌는 이벤트를 하면서 유저수 30%이상이 접게 되었다. 지못미. 특히 승리의 증표는 이벤트로 인해 현금 3만원으로 10배이상 폭락해버려서 승리의 증표를 가진 사람들은 장례식을 치룰...뻔 했으나, 다행히도 이후 승리의 증표 능력치 상향으로 다시 올라가게 되었다..
2011년 이후부터 던전의 몬스터들이 저마다 독특한 패턴을 갖게 되었다. 위례성, 지옥, 시간의 문 몬스터들이 전부 그래픽만 다르고 판박이같은 행동 패턴을 보여주던것과 달리 한성, 관미성, 미륵사, 흉수계, 봉래산(바람의 나라) 등의 지역에 등장하는 모든 몬스터들은 패턴이 중복되는 몬스터가 하나도 없다. 심지어 2015년 추가된 흉수계 지역은 맵마다 몬스터나 유저와 상호작용하는 오브젝트까지 도입됐다.
2012년 12월엔 16년만에 만렙이 풀렸다. 1차승급시 100레벨부터 시작하여 특정 체마량에 도달할때마다 레벨이 오르고, 199레벨을 넘어가면 2차승급을 해 200레벨부터 시작하게되는 시스템이 되었다. 렙업시마다 약간의 체마를 올려준다고 하니 레벨링이 약간이기는 하나 한층 더 쉬워질듯. 현 만렙은 6차 승급 패치로 640.
2014년 2월, 부족한 유저 수 때문에 13개의 서버들이 5개로 통합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을 제외한 다른 서버는 사람이 없어서 참담한 상황.
2014년 6월, 기술연마 패치로 전위력이 사라지고 랩제에 따라 스킬을 배울수있게되었는데 애초에 승급기준으로 기연을 올리던 천인직업이 큰 타격을 입게되어 마력을 굳이 올려두지 않은 레벨 400이 안 된 낮천위(천인 4차)들이 모조리 예리함1성으로 사냥을 해야하는 말도 안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다람쥐나 잡으란 말이냐 그외에 기연을 초기화 시켜주지않은데다가, 마법슬롯칸의 제한을 넘기면 더이상 마법을 배울수가 없어서 전위력 제한 풀렸다고 마구 찍어대던 도사/주술사 계열도 모두 병크...기술연마 초기화 캐쉬템이 그 후 대량으로 팔렸으니 ...모든건 돈슨의 계획대로... 후후 [13]그러나 전위력이 사라져 전위력 신경쓰지 않으면서 다채롭게 기술을 올릴 수 있게된 점은 호평을 받았다. 이전에는 스킬을 고르느라 머리가 아팠다면 이제는 스킬을 어디다 배치하느냐로 머리가 아프다고...
2015년 8월, 결국 6차승급 업데이트 되었다. 뭐 5차승급이 2009년에 업데이트 됐으니 시기상으로는 적절하겠지만 중요한건 레벨제한만 올리면 뭘 하냐는 점이다(...) 뭐긴 뭐야 재미없고 돈도안되는 사냥만 죽어라하겠지. 그런대 공개된 승급명이 어감이 좀 미묘해서 팬사이트에서 명칭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바람의 나라(게임)/비판 항목 참조.
- ↑ KT POWWOW(01412)에서 2000년에 매월 4000원(분당 3원)으로 요금을 조정해서 2000년대 초반 유저들은 요금걱정에는 자유로운 편이였다..#
하지만 다른 ISP를 쓴다면? - ↑ 물론 야간정액제나 ADSL에 가입하면 요금폭탄을 회피할수 있었다.
- ↑ 초창기엔 레벨 10까지의 무료 체험판 기간이 존재했고 2001년 후반 20까지 연장되었다.
- ↑ 다만 '괴유'라는 테스트 서버에서만 무료로 플레이하는 것이 가능했는데, 당연히 접속자가 미어터져 접속이 되지 않거나 접속해도 끊어지는 경우가 다반사여서 플레이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또 초창기에는 이 서버만 전면적으로 PK가 허용되었기 때문에 높은 인구밀도+PK의 시너지로 웬만해선 생존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운 인외마경이었다.
- ↑ 초기부터 1997년까지.
- ↑ 1998년부터 2005년까지.
- ↑ 서버의 시각을 예전으로 되돌리는 것
- ↑ 당연하지만 인터넷은 고사하고 컴퓨터 자체의 보급률도 그리 높지 않았던 96년보단 2000년 이후가 본격적인 바람의 리즈 시절일 수밖에 없고, 그 때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훨씬 많을 수밖에 없다. 뭐, 지금 보기에는 두 시기 다 옛날이지만(...)
- ↑ 다만 이때문인진 모르겠으나 국내의 상당수의 게임은 온라인게임으로만 제작되었고 이러한 컨퍼런스에서 우리나라는 온라인 게임 이외에 패키지나 콘솔 게임에서는 상당 부분 취약성을 안게 되었다.
- ↑ 사실 괴랄하다기보다는 그냥 액수단위가 오늘날과는 달랐다고 보는게 맞다. 물가가 높은 만큼 벌기도 쉬웠던 시절이니.
- ↑ 이때는 기존처럼 npc를 통해서 마법을 배우는것도 가능하였다.
- ↑ 한때 5차 승급자들의 유일한 희망이던 구양성은 보무상태 타당 데미지 20~30만의 살벌한 곳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구양성만큼의 경험치를 주는곳이 없어서 어쩔수 없이 가는곳이였이였으나 한성 패치이후 다 미륵사로 가버려서 망했어요.
- ↑ 2015년 8월 6일 업데이트로 마법슬롯이 100칸으로 늘어나서 이런 걱정은 덜어졌다. 6차승급마법이 새로 생기긴했지만말이다.
- ↑ 기존 42억 9496만 7295에서 레벨 630기준 대략 2800억정도
- ↑ 도사 1명+격수 1명으로 이루어진 파티사냥
- ↑ 보통 10명 꽉 채워서 가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