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후삼국시대~고려 초의 인물 박영규
朴英規
생몰년도 미상.
1.1 개요
전라남도 승주(오늘날의 순천시) 출신으로 승주의 대호족이었다. 순천 박씨의 시조. 신라왕조가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해룡산성[1]에서 할거했다고 한다. 중요한 지역의 호족이었기 때문에 견훤이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 사위로 삼았다. 견훤의 사위였기 때문에 견훤에 대한 충성심이 남달랐던 것 같다.
그러던 중 신검이 쿠데타를 일으켜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당하고 이어 고려로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박영규는 겉으로는 신검에게 복속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견훤과 은밀히 연락하면서 기회를 엿보았다. 결국 936년, 왕건이 후백제를 치자 배신 크리를 작렬해 결국 신검의 패배에 공헌했다. 박영규의 서찰로 전해진 이 소식이 왕건은 어찌나 반가웠는지 형님으로 모시고 싶다고 답장을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왕건에게 아버지(상보尙父) 소리를 들은 견훤이 쩌리 취급을 받는 것과는 달리 위세를 꽤 누리게 된다.[2]
이후 이 공으로 벼슬과 많은 토지를 받았고 두 아들들도 벼슬에 올라 개국공신으로서 대우를 받았다. 이후 정종에게 두 딸을 시집보내 정종 치세에 상당한 권력을 누리게 되었다.
1.2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사극 태조 왕건에서는 2번의 박영규 씨가 맡지 않고, 야인시대에서 장택상 역을 한 임혁주가 맡았다.[3]
극 전반부와 공직과 더불어 견훤의 휘하에 들어온 호족으로서, 견훤이 자신의 사위로 삼았다. 또한 극 중에서는 견훤의 후궁이자 금강의 친모가 되는 고비라는 여인을 소개하였는데, 그녀는 박영규의 일족으로 설정되어 있었다.[4] 이후, 견훤을 따라 여러 전장을 다니며 활약하였다. 특히 견훤이 최승우와 더불어 마지막까지 신뢰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박영규가 부각되는 것은 극 후반부에 후백제의 후계자 문제와 관련하여서였다. 본래는 후계자 문제에서 중립을 지켰지만[5] 이후 신검으로서는 도저히 고려를 이길 수 없다 는 생각에[6] 금강을 후계자로 삼겠다는 견훤의 뜻에 동참한다. 고창 전투에서 후백제 군이 대패하여 금강, 파진찬 최승우와 함께 견훤을 무사히 탈출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운주 전투에서 견훤의 몸을 걱정하며 금강, 최승우 등과 퇴각을 권유하나 신검이 무리하게 적진으로 들어간 탓에 패배한다. 군졸로 변장하여 견훤을 수행하며 퇴각하는 와중에도 전의성주 이치(이도 라고도 하며 전의 이씨의 시조)가 이끄는 고려의 추격군과 맞서 싸워 견훤을 탈출시키는 등 견훤의 주변에서 활약하였다. 이러한 활약 덕분에 견훤의 신임을 얻어 금강을 뒷받침할 사람으로 지목되어 모든 군권을 일임받는다. 하지만 신검의 쿠데타로 인해 그 자리에서 밀려나 구금되었다가, 신검이 자신의 매부임을 고려하여 목숨을 보존하여 낙향시키는 형벌을 내리는 정도로 그쳤다.[7]
낙향한 이후 고향에서 지내던 중, 김제 금산사에 구금되어 있던 견훤이 왕사(王師)인 경보대사를 통해 그곳을 탈출할 의사가 있음을 사위인 박영규에게 알리자, 박영규는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자신의 부인이자 견훤의 딸인 국대부인이 견훤을 도와줄 것을 청하면서 자신이 부리는 사람들을 보내 견훤을 금산사에서 빼내어 나주를 통해 고려로 귀순하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8] 이후에는 더 이상의 출연이 없었다.
사극 제국의 아침에서는 원로배우였던 故 김상순이 열연하였으며, 자신의 외손자이자 정종의 아들인 경춘원군과 함께 광종의 왕권강화로 인해 숙청당한 것으로 나온다.
2 대한민국의 배우 박영규
박영규(배우) 항목으로.
3 아마추어 역사가 박영규
박영규(1966) 문서로.- ↑ 海龍이다. 당시 박영규의 위세와 기반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이름이다
- ↑ 사실 당시에 견훤이 나이가 워낙 많이 들어서 투항한 이후로 한두 해 정도 밖에 못 살고 등창으로 사망한 탓도 있다.
- ↑ 당시 태조 왕건 인터넷 게시판에서는 1의 배우가 등장하기 전까지 2에게 박영규 역을 맡겨야 한다는 꾸준글이 종종 올라왔다.
- ↑ 처음에는 장모인 박씨 부인은 박영규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자신의 딸과 나이 차가 많은 상대인 데다, 후궁이 되는 여인을 소개하였던 것 때문이다. 하지만 극의 흐름이 진행되면서 박영규를 사위로 인정하고 대우하는 모습을 보인다.
- ↑ 신검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는 신료들의 뜻에 동참한 적도 있다.
- ↑ 고창 전투와 운주 전투에서 견훤을 수행하면서 신검의 온갖 병크를 보기도 하고 그 병크에 휘말려 죽을 뻔하기도 했다. 반면에 함께 견훤을 수행한 금강은 신검보다 훨씬 나은 모습을 보였다.
- ↑ 신검의 쿠데타를 지지한 왕후 박씨도 자신의 딸의 처지를 고려해 그의 목숨은 살려줄 것을 능환, 능애 등 주동 세력에게 요청한 적이 있었다. 신검 역시 매부가 후계를 둘러싼 갈등에 적극적인 의지를 갖고 참여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자신의 누이를 고려하여 박영규를 죽일 생각은 없었다.
- ↑ 국대부인은 자신의 동복 아우들이 정권을 장악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복 동생과 파진찬을 죽이고 아버지를 감금한 그들을 비판하였다. 그래서 자칫하면 견훤의 탈출이 후백제에 화가 될 수 있기에 망설이는 박영규에게 견훤을 도와달라고 적극적으로 요청하였고, 결국 박영규도 부인의 말에 따라 결심을 굳히고 견훤을 돕기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