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문고등학교 야구부 (Baemoon High School) | |
창단 | 1962년 |
해체 | 1981년 |
소속 리그 | - |
감독 | - |
연고구단 | - |
우승 기록[1] | 0회 |
|
대회 | 우승 | 준우승 | 4강 |
대통령배 | - | 1회(1968) | 1회(1974) |
청룡기 | - | 2회(1967,1970) | - |
황금사자기 | - | - | 1회 (1969) |
봉황대기 | - | - | - |
협회장기 | - | - | - |
1 역사
1.1 창단
배문고등학교는 과거 고교야구부가 존재했던 학교로 야구부 역사는 1961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62년에 창단된 배문고 야구부는 창단 첫 경기인 서울시내고교야구연맹전 청량고등학교와의 경기에서 4:2로 승리를 시작으로 5전 5승을 거두며 연맹전 우승을 차지하며 그들의 이름을 알렸다. 1964년에는 선발투수 김인식을 앞세워 서울고교야구 연맹전에서 8전 8승으로 우승을 차지, 제16회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는 4강에 진출하기도 했다.
1.2 연이은 전국대회 준우승
그들의 아성이 전국으로 퍼져 나갔던 것은 1967년 청룡기때 였다. 에이스 이영배를 앞세워 인천고를 격파한후 경북고에 패배하며 패자조에 내려갔지만, 이성수와 백기성의 연이은 득점으로 경남고를 격파하고 패자조 결승에 진출, 성남고를 8:4로 패퇴시키며 결승전에서 경북고와 마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임신근을 앞세운 경북고에 5:2 패배를 기록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그리고 1968년 배문고는 백기성[2]을 앞세워 대통령배에서 부산고와 선린상고를 연달아 격파하며 결승전에 올랐는데, 이때 결승전에서 기다리던 상대는 청룡기에서 자신들을 가로막은 경북고였다. 그러나 에이스 임신근이 버틴 경북고는 막강했고 배명고의 선발투수 김종인과, 이어서 마운드에 올라온 이영배, 차경환, 박찬영이 경북고의 강타선을 제대로 막지 못하며 6:1로 패배, 또다시 우승컵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1969년에는 황금사자기 4강에 진출 했지만 선린상고에게 패배하며 패자조로 진출, 경남고를 꺽었으나 패자조 결승에서 경북고에 패배한 선린상고에게 패배하며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1970년 8강에서 부산상고를 13:3으로 격파, 패자조 준결승에서 부명고를 5:2로 격파후 패자조 결승에서 부산고등학교를 격파하고 대구상고와 결승에서 맞부딪혔다. 동대문운동장에 무려 3만명이 달하는 관중이 모였고, 6월 16일에 펼쳐진 경기에서는 백창현의 역투로 대구상고를 꽁꽁 묶었고, 대구상고도 에이스 정기혁의 호투가 이어지며 3시간 동안 13회까지 0:0 무승부를 기록, 6월 17일 재경기가 열렸다. 또다시 양 에이스들이 등판한 가운데 4회까지 양팀다 호투를 펼쳤으나 배명고의 백창현이 5회말 대구상고의 황상전에게 일격을 맞았고, 6회초 에이스 백창현이 타석에서 안타를 뽑아내며 1:1 동점을 이뤄냈으나, 6회말 대구상고의 공격, 1사 만루의 위기에서 김영현의 기습 번트로 역전을 내주게 되었고 더이상 양 팀의 타자들이 점수를 내지 못하며 그대로 경기 종료. 1970년 불타는 여름이 그들 역사상 가장 우승에 근접했던 날이었고 이날은 그들의 마지막 결승전이 되었다.
1.3 평범한 팀으로 전락, 그리고 해체
1971년에는 대통령배와 황금사자기에 각각 8강에 진출했었으며 1973년에는 대통령배에 4강까지 올라갔다. 1974년에는 28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선수생활을 마감한 김인식이 감독으로 취임해 팀을 이끌었다. 그러나 그가 이끌덜 시절에는 전국대회에 진출 해도 번번히 1회전 탈락이라는 고비를 마셨고, 1977년이 되서야 황금사자기에서 8강에 진출하며 오명을 씻었다. 그후 매년 전국대회 8강은 진출 했지만, 그 외에는 별다른 활약이 없었고 1981년을 끝으로 해체되었다.
2 출신 선수[3]
이름 | 포지션 | 프로입단 | 경력 |
김인식 | 투수 | - | 크라운맥주(1965)-해병대(1966~1968)-한일은행(1969~1973) |
김성호 | 포수 | 1984년 1차지명 | 영남대-실업 롯데(1978~1979)-육군 경리단(1980~1981)-포항제철(1982)-OB(1984~1985)-빙그레(1986~198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