裴楷
생몰년도 미상
서진의 인물. 자는 숙칙(叔則). 배휘의 아들이자 배찬(裴瓚)[1]의 아버지이며, 배수의 사촌 동생.
하동군 문희현 사람으로 밝고 깨우쳐 알면서 식견과 도량이 있었으며, 어려서부터 왕융과 함께 나란히 명성이 있었다. 풍채와 정신이 고매하면서 생김새가 빼어나 훤칠했으며, 처신과 취사를 마음에 맡겨 행동해 비방과 칭찬이 자신에 이를지라도 편안하게 대처한 것이 이와 같았다고 한다.
여러 책을 두루 섭렵하면서 특히 이치를 따지고 옳고 그름에 자세했으며, 그 때 사람들이 그를 일러 옥인(玉人)이라고 하면서 배해를 보면 마치 옥으로 빚은 산이 사람을 비추는 듯하다고 했다.
종회가 왕융과 함께 추천해 사마의를 섬겨 상국연이 되었다가 이부랑의 자리가 비웠을 때 종회가 배해는 맑고 사리에 정통하다고 하면서 왕융과 함께 추천하자 이부랑이 되었으며, 이후에는 중서랑이 되었을 때 그를 만나는 사람마다 숙연해져 얼굴빛을 고쳤다.
268년에는 상서랑을 지내면서 가충 등이 수정한 율령을 읽었으며, 후에 여러 번 옮겨서 태보, 중서령과 시중, 위위 등을 역임했으며, 271년에 시중을 지낼 때 사마염이 현재의 잘못을 묻자 가충의 무리들을 조정에 있게 한 것을 지적했다. 290년 가을 8월 26일에 소사로 임명되었다.
291년에 사마량, 위관 등이 북군중후에 임명되었지만 사마위가 북군중후에 임명되지 못해 화가 난 것을 알고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안남장군을 지대다가 가남풍이 정권을 잡자 중서령, 시중에 임명되었다.
세설신어에는 조세를 구걸해 남에게 나눠준 일화, 왕융의 모친상을 찾아간 일화, 시초점을 친 일화, 석숭을 만류한 일화가 있다.
- 조세를 구걸해 남에게 나눠준 일화
양왕 사마동, 조왕 사마윤 등에게 조세 중에서 수백만 금을 청해 친척 중에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해 어떤 사람이 어찌 남의 물건을 구걸해 은혜를 베푸냐고 하자 남아도는 것을 덜어서 부족한 것을 보태는 것이 하늘의 도라고 했다. 훌륭한 횡령죄
- 왕융의 모친상을 찾아간 일화
왕융이 모친상을 당할 때 만약에 한 번 통곡할 때 사람이 상하게 되면 왕융은 성명을 끊었다는 비난을 반드시 면치 못할 것이라고 했다.
- 시초점을 친 일화
사마염이 황제가 되자 치세가 얼마나 길지 점을 쳤을 때 하나라는 점괘를 얻어 사마염이 기뻐하지 않은 것을 보고 "노자에 하늘은 하나를 얻어서 맑아지고 땅은 하나를 얻어서 편안하며, 임금은 하나를 얻어서 천하를 바르게 한다고 했다."라고 말해 사마염이 기뻐했다.
- 석숭을 만류한 일화
석숭이 장수교위 손계서와 함께 주연을 즐긴 적이 있었는데, 손계서가 지나치게 오만불손해 석숭이 표문을 올려 그를 파면시키고자 했다. 배해는 그 말을 듣고 손계서의 술주정은 온 세상이 알고 있는데, 광약(술)을 먹이고 나서 바른 예절로 그를 나무란다면 또한 잘못된 게 아니겠냐고 했다.
- ↑ 자는 국보(國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