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진 시대 이름난 졸부
石崇
(249 ~ 300)
서진(西晉)의 인물. 자는 계륜(季倫). 석포의 막내아들. 어릴 때의 이름은 제노(齊奴).
청주에서 태어났고 어릴 때부터 영특하여 아버지 석포가 '재산을 물려주지 않아도 거부(巨富)가 될 운명이다.'며 석숭에게는 단 한 푼도 물려주지 않았다. 20세에 수무령을 지내 유능하다는 평판을 받았으며, 조정에 들어가 산기랑을 역임하다가 성양태수로 전임하고 오 토벌의 공적으로 안양향후에 봉해졌다.
성양군의 직무가 있었지만 학문을 좋아해서 병을 이유로 관직을 떠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황문랑이 되었으며 무제 사마염에게 중용되어 290년에는 시중, 산기상시 등을 역임했고 1월 18일에 신하들에게 작위를 올리는 논공행상을 하자 산기시랑 하반과 함께 대를 이어 진나라는 계속될 것인데, 이런 제도를 시작하면 몇 세대가 지나 모든 사람이 작위를 받으리라고 하면서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원강(元康)[1] 초 남중랑장을 지냈고 이어서 형주 자사가 되어 가렴주구와 부정부패로 악명이 높았고 외국사신이나 상인 습격, 상선 약탈(…) 등 한 나라의 관리가 일개 산적이나 해적이나 할 짓을 저지르거나 아부와 뇌물로 무역로를 독점하여 많은 이익을 챙겼다.
이후 대사농에 초빙되었지만 초빙하는 서류가 도착하지 않자 마음대로 관직을 그만두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조정에 들어가 태복이 되었다가 정로장군, 감서주제군사가 되었다. 석숭은 별장을 금곡이라는 이름을 붙여 잔치를 벌였다가 서주자사 고연과 서로 업신여겨 싸운 일로 면직되었다가 위위에 임명되었으며, 291년 가밀과 곽창의 권세가 대단하자 가밀에게 아첨했고 가밀의 친구들인 24우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석숭은 이렇게 엄청난 재산을 모았으며 산기상시로 있을 때 282년 사마염의 외삼촌인 후장군 왕개[2]와 벌인 돈지랄 싸움(…)이 유명하다. 왕개가 집안에서 솥을 때 맥아당으로 닦자 석숭은 자기 집에서 밥을 할 때 짚 대신 밀랍을 썼다. 또 한번은 왕개가 자기 집문 앞 대로 양쪽으로 40리(약 20km)에 걸쳐 보라색 비단[3]로 천막을 치자 석숭은 더 비싼 비단로 50리(약25km)를 쳤다.
외삼촌인 왕개가 밀리자 사마염이 귀한 산호수를 하나 주었는데, 크기가 두 자나 되는 것이었다. 왕개가 석숭에게 이 산호수를 보여주며 과시하자, 석숭은 손에 쥔 철여의로 산호수를 부쉈다. 왕개가 격노하니까 석숭은 "걱정 마시오. 보상해주겠소."라며 하인을 시켜 자기 산호수를 모두 가져오게 했다. 그 중에는 세 자 짜리가 예닐곱 개 있었으며 모두 왕개의 것보다 훨씬 아름다웠고, 왕개의 것과 같은 두 자 짜리는 아주 많았다. 결국 왕개는 완패(…)를 인정했다.
사실 정상적이었다면 감히 황제의 하사품을 깨뜨린 석숭의 목이 무사하지 못해야 하지만 그럭저럭 무사히 넘어갔다. 이는 초대 창업 군주인 사마염의 권력이 그렇게까지 강하지 못했다는 증거이며, 또한 위나라 시대부터 이어진 명문가들의 기반이 그만큼 튼튼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구품관인법 참고.
석숭은 종들을 가혹하게 대했는데, 연회에서 기녀들이 노래를 못 부르거나 기녀가 권한 술을 손님이 안 마시면 그 자리에서 참수했다. 한번은 뒷날 동진의 공신 왕도와 그의 사촌형 왕돈이 연회에 참가했다. 왕도는 술을 잘 못함에도 기녀들을 위해 열심히 술을 마셨지만 왕돈은 주당임에도 일부러 술을 안 마셨고 결국 기녀 셋이 희생당했다. 보다 못한 왕도가 "술 좀 마셔, 형 때문에 기녀들 다 죽게 생겼어." 라고 하자 왕돈은 "자기 집 기녀들 죽이는데 나랑 뭔 상관?" 이라 대답했다. 이때부터 왕돈의 막장인 인간성이 드러난다. 왕도는 동진 건국 뒤 공신 외에 충신과 명신으로 후세에 이름을 남겼지만 왕돈은 결국 반란을 일으키면서 공신 대신 역적으로 이름을 남기게 된다.
그는 화장실을 침실처럼 화려하게 꾸몄기에 손님들은 석숭네 집 화장실을 침실로 알았다. 또 시녀를 시켜 손님들의 손을 씻겨주고 옷을 갈아입게 해줬기 때문에 손님들은 부담스러워 이를 꺼렸다. 역시나 우리의 왕돈(...)은 이 서비스를 당당하게 받았는데 이에 시녀들은 그가 엄청난 일을 할 거라고 말했다.
《세설신어》의 태치편에서 왕개와 돈지랄 경쟁하는 여러 가지 일화가 나온다. 석숭의 처첩은 100여 명이었고 하인만 800여 명이었다고 한다.
인간성은 막장이어도 글은 잘 썼는지 금곡시서라는 것을 남겼는데 왕희지가 젊을 때 쓴 난정연집이 석숭의 금곡서문보다 뛰어나다는 말이 있다. 진서 희지전에는 반악의 금곡시서가 석숭보다 뛰어났다고 나온다. 왕희지의 글과 비교할 정도면 그래도 상당한 수준이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운다고 했던가? 석숭의 부귀영화와 운명은 팔왕의 난에 접어들면서 종말을 맞았다. 조왕 사마륜의 심복 손수는 석숭의 심복인 황문랑(黃門郞) 반악(潘岳)에게 소시적에 꾸지람을 들은 적이 있어서 원한을 품고 있었다. 또 예전에 석숭이 아끼는 기생 녹주를 바래서 달라고 했지만 석숭에게 거절당했으며 석숭의 외사촌 아들[4]이었던 구양건(欧阳建)은 사마륜과 사이가 나빴기 때문에 손수는 석숭을 죽일 핑계를 찾았다. 가남풍을 죽인 사마륜이 혜제 사마충을 폐위시키며 황제가 되자 손수는 권세를 이용해 임의로 사람들을 살육했다. 이에 위위로 석숭은 반악과 함께 회남왕 사마윤(司馬允)과 제왕 사마경(司馬冏) 등과 연합해 사마륜을 제거하려 했다. 손수가 이를 알고 대군을 이끌고 금곡원을 포위하고 석숭, 반악, 구양건을 체포했다. 석숭은 '저 노복 놈이 내 재산에 눈독을 들인다.'고 한탄했는데 체포하러 온 사람이 '재물이 화임을 알면 어찌하여 그것을 흩어버리지 않았냐.'고 하자 못 대답했으며, 고작 향년 51세로 석숭은 참살당했다.
이 때 석숭은 삼족이 멸족당하고 막대한 재산은 모두 사라졌으며, 석숭이 참살당하기 전 녹주는 누각에서 몸을 던져 자결했다. 결국 '석숭의 재물도 하루아침이다'란 말은 여기서 나왔다. 오죽했으면 '죽은 석숭보다는 산 돼지가 낫다.'는 속담도 있겠는가.[5]
비록 말로는 비참했지만 석숭은 중국은 물론 동아시아 지역에서 오랜 기간 동안 부자의 대명사처럼 여겨졌다. 중국에서 석숭은 복(福), 녹(祿), 수(壽)의 삼선(三仙) 가운데 녹(祿)을 상징하는 인물로 숭앙되었다고 한다.
2 대한민국 전래동화의 주인공
1의 석숭과는 동명이인이지만 모티브를 받은 캐릭터이다.
줄거리는 가난하고 박복한 젊은이인 석숭이 10년 동안 머슴으로 열심히 일한 돈을 항아리에 채워서 고향으로 가지고 가다가 잠시 눈을 붙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도둑맞았으며 이에 석숭은 억울하고 분해서 염라국으로 염라대왕한테 팔자를 따지러 가려고 했다. 가다가 어느 집에서 머물렀는데 남편을 맞이할 때마다 죽어 나가는 박복한 생과부의 이야기를 듣고 과부의 팔자도 물어봐 주기로 했다. 한참 가다 보니 어느 노인이 지게에 큰 바위를 지고 꽁꽁 얼어 있었는데 이 노인의 팔자 역시 물어봐 주기로 했다. 또 가다가 집을 지을 때마다 무너져 아예 오두막을 엮고 사는 일가의 팔자도 물어봐 주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염라국으로 가는 강을 건너려는데 커다란 이무기가 천 년이 지나도 용으로 승천하지 못한다고 한탄하고 있었다. 이에 석숭은 그의 팔자도 물어봐 주기로 했고 이무기는 석숭을 태워 강 건너로 보내 주었다.
염라대왕에게 공손히 물어보니 1의 이유 때문이라고이제부터는 팔자가 펴질 것이라고 말해줬다. 그리고 과부는 배필운이 없다며 가장 최근에 죽은 남편 제사를 지내고 나서 처음 만나는 남자가 그의 배필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노인은 산지기로 있으면서 지나가던 사람들의 물건과 아이들의 도구를 빼았으므로 벌을 내린 것이라고 하고 지나가는 사람 백 명에게 지게 지고 절하면 괜찮아 질거라고 했다. 또 집을 지을 때마다 무너지는 집은 조상 제사를 제대로 지내지 않아서 그렇다면서 찬물 한 그릇이라도 정성껏 떠 놓고 지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이무기는 욕심이 많아서 하나만 있으면 되는 여의주를 2개나 가지고 가지고 있어서 승천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
- ↑ 혜제 때 쓰인 세 번째 연호로 291년부터 299년까지 쓰였다.
- ↑ 사마염의 어머니 왕원희의 남동생이다. 아버지는 왕숙, 할아버지는 왕랑이다.
- ↑ 비단 자체도 비싸지만 보라색 비단인 자사포는 상당히 비싼 색깔이었다.
- ↑ 즉 오촌 조카에 해당한다.
- ↑ 그러나 북위 효명제 때는 이보다 더한 호태후가 있었다. 호태후는 선무제의 황후로 효명제의 모친이었는데 '나는 석숭의 사치 같은 것은 보기 싫다. 다만 석숭에게 내 사치를 못 보여줘 유감이다.'라고 했을 정도였다. 정치에 재능이 있었지만 불교에 돈지랄을 하고 사치스러웠으며 굉장히 음란했다. 또 아들 효명제가 이주영을 시켜 자신의 권력을 뺏으려 하자 아들을 먼저 독살하고 효명제의 어린 딸을 아들로 속이고 황제로 세웠다가 다른 황족인 소공제 원쇠를 세웠다. 그러나 이주영은 끝내 '육진의 난'에서 호태후와 원쇠를 황하에 처넣어 수장하고 중신 2천명을 학살했다. 끝내 이것은 북위가 서위, 동위로 나뉘어 멸망하는 큰 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