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량

司馬亮
(? ~ 291)

1 개요

삼국시대 위나라의 관료이자 서진의 황족으로 자는 자익(子翼). 봉토는 여남군(汝南郡)이고 시호는 문성(文成)이고 작위가 왕(王)이어서 모두 더해 여남문성왕(汝南文成王)이다.

사마의의 삼남이자 사마주의 친형이며[1], 생모는 복부인으로 사마사, 사마소와는 이종동생, 사마간과는 이복 형, 서진 무제 사마염의 삼촌.

212년 ~ 226년 사이 출생인데, 226년생으로 따져도 66세에 죽은 게 된다. 그래서 보통 220년간 출생하여 터울로 봐서 이복형 사마소와는 터울이 크고, 동복동생 사마주와는 터울이 적을 것으로 추정된다.

좋은 근거로 어머니 복부인이 사마주부터 사마준까지 세 명의 동생을 227년부터 232년 초 사이에 낳았다는 점이 있으며, 또 사마량이 212년 ~ 219년 사이에 태어났다면 사망할 때의 나이가 칠순을 넘게 된다. 이복형 사마사는 47세, 사마소도 54세, 친동생 사마주도 56세에 죽었는데, 이 사람들이 장수한 건 아니지만 가장 장수한 사마간이나 아버지 사마의도 여든을 못 넘기고 사망한 상황에서 사마량만 독보적으로 칠순을 넘어서도 멀쩡히 살아있다가 끔살 당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운 점도 있다.

그런데 끝내 끔살당했다. 종실의 웃어른이자 세조 무황제의 고명대신이었고 재능도 나쁘지 않았지만 경쟁자 양준이 죽었다는 것에 늙으막에 너무 방심했고 그 댓가를 치렀다. 이는 결정적일 때 마다 봉기(저항)하지 않고 우유부단했다는 점도 크다. 팔왕의 난에서 그의 행적을 간추리면 나서야 할 때 나서지 않고 몸을 사리다가 몸을 해치고 난을 막지 못 하였다. 그리고 난도 안 일으켰는데 팔왕에 든다.

2 생애

위나라에서 동중랑장을 지내다가 서진이 세워지면서 265년에 부풍왕이 되었으며, 270년 6월에 호열선비족독발수기능과 싸울 때 장군 유기를 파견해 구원하려고 했지만 유기가 관망만 하면서 만곡퇴에서 호열이 전사하자 이 일에 연루되어 평서장군으로 강등되었으며, 장수 유기가 참형될 위기에 처했다. 그러자 유기를 통제하지 못한 자신으로 인해 허물이 나온 것이니 그의 죽음을 면해달라고 해 유기는 죽음을 면하고 사마량만 면직되었다.

277년 8월 21일에 여남왕으로 봉해지면서 진남대장군, 도독예주제군사가 되었으며, 282년에 태위, 녹상서사, 영태자태부가 되었다. 284년에 위관과 함께 진군이 제정한 구품관인법을 귀족 가문 일부가 관직을 독점하게 된다고 해서 제도의 폐지를 주장했으며, 289년에 양준이 정권을 잡으면서 꺼려했기 때문에 조정에서 쫓겨나 11월 23일에 시중, 대사마, 가황월, 대도독, 독예주제군사가 되어 허창을 치소로 삼게 되었다.

290년에 무제(사마염)이 죽기 전에 아직 임지로 출발하지 않아서 양준이 무제가 불예하자 근신을 바꿔 그의 심복들을 심어놨는데, 황제가 조금 차도가 있어서 새로 채용한 사람들을 보고 정색하면서 양준에게 어찌하여 마음대로 할 수 있냐고 물어 중서감으로 하여금 조서를 만들게 해 사마량에게 양준과 함께 보정하게 했다. 그러나 사마량이 낙양에 도착하기 전에 무제가 1월 20일에 붕어하자 양준이 두려워 영구에 다가가지 못하고 대사마문 밖에서 곡을 했으며, 나가서 성 밖에 군영을 만들고 표문을 올려 장례를 지내고 나서 가게 해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사마량이 병사를 일으켜서 양준을 토벌할 것이라고 고발하자 양준이 크게 두려워해 이를 태후에게 말하고 혜제 사마충으로 하여금 조서를 석감과 장소에게 내려 능묘를 만드는 병사들을 인솔해 사마량을 토벌하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사마량은 이 사실을 알고 정위 하욱에게 계책을 물어 양준을 토벌할 것을 권고받았지만 그러지 않고 밤 중에 허창으로 피했다.

291년에 양준이 죽자 사마충의 부름으로 태재가 되어 태보 위관과 함께 녹상서사가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려고 양준을 주살한 공로를 토론하게 해 부곡의 독과 장들 중에서 후에 책봉된 사람이 1081명이나 되었다. 이에 부함이 공로가 없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면 안된다고 간언했지만 이를 무시했다.

사마위 대신 배해를 북군중후로 대신하게 하려고 했지만 거절하자 위관과 모의해 여러 친왕들을 봉국으로 가게 했으며, 결국 이 일이 사마위의 원한을 사 사마위가 황후 가남풍에게 사마량을 참소했다. 결국 3월부터 6월까지 4개월간 위관과 권력을 잡다가 사마위의 군사들이 공격하자 장하독 이룡, 장사 유준 등이 싸우고자 했지만 이를 거부했다가 적노장군 이조에게 붙잡혔다가 참수되었다. 하지만 가남풍이 토사구팽으로 사마위를 제거하자 작위가 추후로 복위되었다. 결국 이 둘 모두 가남풍에게 이용이나 당한 것이다.

3 미디어 믹스

삼국전투기에서는 청의 엑소시스트의 츠바키 카오루로 나온다.
  1. 4남으로 본다는 말이 있는데, 사마량이 사마주의 형이면 3남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