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윤

司馬允
(272 ~ 300년 8월)

서진의 황족으로 무제 사마염의 9남으로, 자가 흠도(欽度). 봉토는 회남군(淮南郡)이고 작위는 왕(王)이며 추시(追諡)가 충장(忠壯)이므로 봉작은 모두 더해서 회남충장왕(淮南忠壯王)이다. 모친은 이부인이다.

요약하면 팔왕의 난에서 가장 담백한 황족이었는데 용기있게 궐기했다가 승리도 권력 획득도 못해보고 훙서.

정확히 말하면 팔왕에 속하지도 못한다. 안습.

277년 8월 21일에 복양왕으로 봉해졌다가 289년에 회남왕으로 봉해져 도독양강제군사가 되어 가절을 가지고 봉국으로 갔으며, 300년에 조왕 사마륜이 혜제(사마충)의 황후 가남풍을 폐위하자 여름 4월 7일에 표기장군, 개부의동삼사가 되어 중호군을 관장하게 되었다. 성격이 침착하지만 굳건해 숙위하는 장령 등과 병사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복종했으며, 사마륜과 권신 손수(사마륜의 직속 부하)가 다른 뜻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몰래 죽음을 무릅쓰고 싸울 병사를 기르면서 그들을 몰아내려고 했다.

가을 8월에 태위로 임명되어 사마륜이 관직을 높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면서 병권을 빼앗으려고 하자 몸이 아프다고 해 벼슬을 받지 않았으며, 손수가 어사 유기를 파견해 사마윤을 압박하면서 그의 관속 이하 여러 사람들을 체포했다. 또한 손수가 조서를 거부해 대역 불경한 죄를 지었다는 명목으로 탄핵하자 조서를 보고 손수가 직접 손으로 쓴 것임을 확인하자 크게 화가 나 어사를 가두고 그의 목을 베려고 했다가 어사가 도망가자 그의 영사 두 명의 목을 벴다.

회남국의 군사와 장하에 있는 700명을 인솔해 조왕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외치면서 자신을 따를 사람은 옷을 왼편으로 여미라고 하자 그에게 귀부하는 사람이 많았으며, 궁궐로 갔지만 상서좌승 왕여가 액문을 닫아걸어 들어가지 못하자 상국부를 포위하면서 사마륜을 공격해 여러 차례 이겼다. 사마윤은 승화문 앞에 진을 치고 궁노를 일제히 발사했고 이 때 진준이 사마윤을 돕기 위해 사마충에게 백호번[1]을 보내 싸움을 해산시켜야 한다고 했고 사마독호 복윤이 기병 400명을 거느리고 나갔다.

그런데 복윤이 여음왕 사마건의 설득에 넘어가 사마륜을 돕기로 하면서 복윤이 글자가 없는 공판을 가져서 거짓으로 황제(혜제)가 회남왕을 도우라는 조서를 내렸다고 하자 진을 열어 복윤을 들어오게 했다. 사마윤은 수레에서 내려 조서를 받으려고 했다가 이 틈을 노린 복윤에게 살해되었다.

사마윤이 그렇게 막으려고 했던 사마륜은 결국 이 사건 이후 황제에 올라 혜제를 폐위했다가, 다시 사마경 등에게 역관광 당해 세상을 하직하고 그렇게 황족들의 피바람은 이어진다.

따지고보면 동진의 시조인 원제 사마예보다 고작 네살이 많다. 좋은 평가를 들었다는 점과 봉토가 회남으로 (낭야왕이었던 사마예를 포함해) 강남에 가장 가까웠다는 점에서, 살아있었다면 위기 상황에서 더 큰 역할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 여러모로 안타까운 인물이라 하겠다.
  1. 궁궐 안에 근무하는 장교로 위장군 소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