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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조선 말기 악명을 떨친 탐관오리. (참고로 무관이었다.)
1858년 전라좌수사에 임명, 탐관오리 짓을 일삼다가 조정에 보고되어 처벌받았지만, 어떻게 다시 줄을 잘 탔는지 1861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어 진주목사 홍병원과 결탁하여 역사에 길이 남을 탐관오리의 명성을 쌓게 된다.
당시 백성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삼정의 문란, 그 중에서도 특히 환곡의 문제였는데 백낙신과 홍병원은 장부를 조작하고 백성들을 쥐어짜내서(...) 막대한 환곡을 거둬들였다. 수탈의 끝판왕. 그 뿐 아니라 개간지에 불법적으로 과세하고 그 세곡을 빼돌렸는데 이렇게 해서 모여진 재물이 미곡 15,000석에 달했다. 더 놀라운 건 백낙신과 홍병원이 15,000석을 모으는 데 걸린 시간이 1년도 채 안 됐다는 점이었다.
백낙신의 탐학에 끓어오를 대로 끓어오른 진주의 민심은 결국 폭발하고 만다. 결정적 계기는 역대 진주목사들이 빼돌린 미곡 28,000석과 경상우병영의 밀린 환곡과 군포 24,000석을 일시에 부과하기로 한 것이었다. 이에 몰락 양반 출신인 유계춘과 김수만, 이귀재 등이 진주 백성 8만 명을 모아 농민군을 조직한 후, 1862년 2월 18일 일제히 봉기했다.[1]
백낙신은 농민군을 달래려고 나섰다가 오히려 포위 당했고, 백성들은 아전 두 사람을 곤장으로 때려 죽이고 백낙신을 하루 내 감금했다가 풀어주는 등의 사태가 일어났다. 진주의 사태를 보고받은 정부는 당장 안핵사 박규수를 진주로 파견했다. 박규수는 조정에 백낙신의 재산을 몰수하고 귀양을 보내는 것만이 진주의 민심을 달래는 방책이라 건의하여 결국 조정은 박규수의 주청대로 백낙신의 재산을 몰수하고 전라도 강진현 고금도로 유배를 보냈다.
그러나 1년만에 귀양처가 고향으로 옮겨졌고(전리방원), 1865년에 귀양에서 풀려 영종진첨절제사로 복직되었다. 병인양요 때는 영종도와 행주를 방어했고 1877년에는 평안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고 하는데 수탈하느라 바빠서 그랬는지 임기가 끝난 후에도 돌아오지 않아 1885년에 다시 유배되었다. 1887년 4월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물론 그 당시에 탐관오리들의 학정이 도처에서 있었다지만, 백낙신의 경우는 초절정 스펙타클의 스케일로 탐관오리짓을 한 덕에 1862년 조선 각처에서 일어난 역사상 최대 규모의 농민봉기인 임술민란의 방아쇠를 당기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가히 전국구급 탐관오리라 이를 만하다.
참고로 첫째 마누라가 덕수 이씨 가문 출신이며 이순신의 후손이다.저승에서 통상영감한테 존X 까일 듯
2 미디어에서 등장
MBC 주말 드라마 닥터 진에서 진주 민란을 다루었는데 거기서 이 사람과 진주 목사 홍병원을 모델로 결합한 듯한 진주의 지방관이 한 명 등장한다. 민란 진압의 목적 아래 부녀자를 겁탈하려 드는 천하의 개쌍놈. 백성들에게 피습을 당하나 진혁에게 도움을 받게 되었는데 치료받는 도중에도 거드름 피우는 것은 여전. 결국 치료는 받으나 백성들에게 포로로 붙잡혔다. 그러나 백성들이 밀리게 되자 그 와중에 포박을 풀고 홍영휘를 총으로 쏴 버렸으나 곧바로 김경탁에게 사망. 이 드라마에서는 이미 역사가 바뀌어 버렸기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가 되었다.- ↑ 게다가 봉기 진압하라고 보낸 포졸들이 하라는 진압은 안 하고 오히려 그 포졸들까지 봉기에 가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