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터 키튼


위대한 무표정(The Great Stone Face)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이름버스터 키튼
BUSTER KEATON
분야텔레비전, 영화
입성날짜1960년 2월 8일
위치텔레비전 : 6231 Hollywood Blvd.
영화 : 6621 Hollywood Blvd.

찰리 채플린, 해럴드 로이드, 로렐과 하디와 무성영화를 이끌던 전설

스턴트 액션의 대가이자 대부

본명은 Joseph Frank "Buster" Keaton (1895년 10월 4일 - 1966년 2월 1일). 미국영화배우이자 영화 감독.

1 생애

생후 18개월부터 가족들과 함께 보드빌 공연을 했다.[1] 주변 사람들이 아동 학대로 부모를 신고할 정도로 어린 나이부터 위험한 슬랩스틱 연기를 천연덕스럽게 해서, 마술사 해리 후디니가 버스터라는 예명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심지어 그의 산파였던 사람이 지어줬다는 설도 있을 정도로 여러 바리에이션이 존재하기 때문에 누가, 어떤 연유로 이 이름을 지어줬는지는 불확실하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보드빌 배우로 활동하던 키튼은 1917년 당대 유명 코미디언 로스코 아버클(1887~1933) 의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함으로서 영화계에 데뷔한다. 로스코 아버클은 키스톤 시절, 자신의 사촌 동생이자 롱 다리를 이용한 다리 찢기로 유명한 코미디언인 알 세인트 존 (1892~1963)과 콤비로 활동하면서 미국내에서 높은 인기를 얻고 있었고, 찰리 채플린의 코미디 영화 스승이자기도 했다. 채플린의 모자와 통이 넓은 바지는 아버클의 의상을 빌려 입은 것이었고 정말 편리해보이는 조립식 집을 선보인 <일주일>, 와이어 등을 사용하여 기계 장치들로 자동화된 집을 구현한 <일렉트릭 하우스> 등 키튼의 단편에서 나온 특수효과와 감각적인 카메라워크, 시대가 무색한 편집에서도 로스코 아버클의 영향이 깊게 느껴진다.

이 시기 아버클은 키스톤에서 독립하고 20세기 폭스사의 설립자 중 한 사람이자 유명 영화 제작자인 조셉 쉥크와 계약을 채결하면서 코미디언 최초로 자신의 개인 스튜디오를 설립했는데, 우연히 극장에서 키튼의 슬랩스틱 연기를 보고 키튼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키튼에게 자신과 영화를 같이 찍자고 러브콜을 보냈다고 한다.[2] 이들은 '뚱보와 홀쭉이'라는 컨셉을 최초로 시도하며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흥행을 거두었다.[3]

하지만 아버클은 1920년, 자신이 주최한 파티에서 단역 여배우 한 명이[4] 사망하는 사건으로 갑작스럽게 몰락하고 알콜 중독에 빠져 요절했다. 문제는 그녀의 지인이자 전과자였던 밤비나 델몬트라는 여성이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서 '아버클이 여배우를 죽였다' 라고 거짓 진술을 했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녀는 재판 이후 헐리우드의 뒷모습이라는 강연회를 열어 떼돈을 벌어들였다. 그러나 아버클의 사망 이후, 델몬트가 거짓 진술을 했다는 것이 밝혀지고 미국 사법부는 공식적으로 아버클에게 사죄하였다. 덤으로 악녀임이 드러난 델몬트는 무시당했고 자업자득으로 이 여자도 몰락하여 알콜 중독으로 비참하게 죽게 된다.

아버클을 마지막까지 변호하던 영화인이었던 키튼은 1920년 《바보》라는 정극 영화에 출연하며 단독 주연으로 데뷔한다. 직후, 찰리 채플린이 퍼스트 네셔널에서 유나이티드 아티스트로 이적하면서 퍼스트 내셔널의 개인 스튜디오를 넘겨주었고 키튼은 스스로 감독 및 주연을 맡은 단편 《일주일》을 시작으로 감독 / 각본/ 주연을 도맡아서 수많은 걸작들을 탄생시키게 된다. 단편 《경찰》과 《이웃》, 중편 《셜록 주니어》, 장편 《일곱 번의 기회》등 흔히 그의 대표작이라고 언급되는 작품들이 모두 이 시기의 작품들.

1920년대, 버스터 키튼은 찰리 채플린, 해럴드 로이드와 함께 코미디 스타로 대인기를 누렸는데, 채플린이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적극적이었고, 로이드가 당시 절정에 다다른 영화라는 매체를 어떻게 활용할지 고민했다면 키튼은 자신의 뛰어난 스턴트 능력으로 코믹한 액션 연기 연출에 방점을 찍었다.

그의 스턴트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인데, 키튼은 본인의 스턴트는 물론이고 여차하면 다른 배우들의 스턴트까지 도맡아 했다고 한다. 비록, 스턴트 때문에 갖가지 부상들에 시달렸지만 키튼은 위대한 무표정 The Great Stone Face라는 별명까지 생길 정도로 별로 내색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1924년, 《셜록 주니어》 촬영 중 목뼈에 금이 갔는데도 두통이겠지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가, 1928년 《스팀보트 빌 주니어》를 촬영하던 중 왼쪽 갈비뼈가 부러져서 엑스레이 검사를 받은 이후에야 목뼈가 골절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흠좀무. 실제로 영화 속 키튼도 항상 무표정이다. 정말 절대로 웃거나 울지 않는다. 깜짝 놀랄 만한 일이 생기면 잠깐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올려보고는 그만. 위에서 말했던 아버클 시기 단편들에선 과장된 연기를 주로 선보였지만, 어린 시절 선보였던 보드빌 쇼에서 배운 "내가 무표정이면 다른 사람들이 더 많이 웃는다" 라는 일종의 공식을 떠올려 단독 주연으로 데뷔할 때부터 무표정을 컨셉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의 무표정 속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들이 많아 채플린만의 감성적이고 다채로운 얼굴 표정과 주로 비교된다.

하지만 1926년, 《제너럴》이 개봉 당시 흥행에 실패하면서 사실상 그의 마지막 감독작이 되고야 만다. 《제너럴》은 철덕이었던 키튼의 취향을 살려 제 1차 세계대전에서 실제로 운용된 증기 기관차를 박살내고 500명의 엑스트라를 기용하는 등[5] 75만 달러라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제작비로 제작된 영화였지만 흥행은 제작비의 1/5인 15만 달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제너럴의 실패로 키튼은 그 동안 자신의 영화들을 제작하던 제작자이자 키튼의 동서이기도 했던 조셉 쉥크와의 계약이 파기당하고 아내와도 이혼한다.

이후 키튼은 찰리 채플린이나 해럴드 로이드의 극구 만류에도 불구하고 재기를 위해 유성 영화에 출연하기로 결정, 당대 헐리우드에서 가장 큰 영화사였던 MGM과 전속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계약 이후, 키튼의 인기는 목소리 문제[6], 영화사와의 불화[7]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오히려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게 된다. 결국, 아내와 이혼 후, 알코올 중독 증세까지 보이고 있던 키튼은 1933년 MGM에서 해고당하고 배우가 아닌 코미디 작가를 본업으로 삼으며 힘겹게 살아가는 신세가 되고만다. (훗날 키튼도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실수였다고 회고했다.) [8] 불행 중 다행히도 이 시기 그는 평생의 반려자가 된 댄서 엘라노어 노리스와 결혼한다.

이후 버스터 키튼은 자신이 아직 완전히 몰락하지 않았다는 것을 대중들에게 알리기 위해 해럴드 로이드의 추천으로 1951년부터 본인의 이름을 딴 코미디 TV 쇼에 출연하여 전성기 시절 자신의 스턴트 연기를 다시금 선보인다. 키튼의 슬랩스틱은 당시 복고 열풍이 불고있던 대중들의 입맛을 사로잡았고 프로그램은 그야말로 대성공하게 된다. 그리고 1952년, 찰리 채플린의 자전적 영화 <라임라이트> 에서 채플린의 보조 피아노 연주자 역할을 맡게 된다. 근데 분장한 모습은 그루초 막스 채플린은 키튼을 위해서인지, 완벽한 영화를 위해서인지 해당 장면을 편집할 때 본인의 파트는 줄였지만 키튼의 파트는 전부 남겨두었다고 한다. 재기를 위한 그의 불꽃같은 열정은 드디어 다시금 관객들의 눈에 띄게 되고 그는 다시 꾸준히 여러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MGM 시절처럼 자신의 캐릭터가 파괴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스톤페이스를 몰락한 무성영화 배우라는 자신의 새로운 캐릭터에 접목시키면서 새로운 전성기를 열게된다.

역시 무성영화 시절에는 감독으로 유명했다가, 유성영화의 시대가 오면서 배우로 활약한 에리히 폰 슈트로하임과 함께 빌리 와일더 감독의 1950년 작품 <선셋 대로> 가 이러한 키튼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영화로 슈트로하임은 무성영화때 대단히 잘 나가던 감독이지만[9] 지금은 배우의 뒷바라지를 하고 사는 집사, 그리고 버스터 키튼은 한때 잘나갔던 무성영화 배우의 배우 시절 친구로 카드 놀이 하는 장면에서 나온다. 키튼과 여주인공인 글로리아 스완슨을 포함하여 그 장면에서 카드 놀이를 하는 배우 모두가 왕년에 무성영화계를 주름잡던 배우들이라고 한다. 비록 버스터 키튼은 별다른 대사 없이 잠깐 얼굴만 스쳐가는 카메오 수준의 분량이라 모르는 사람은 그냥 그러려니 지나쳤지만, 키튼을 아는 올드팬들은 이를 보며 굉장히 놀라워했다고 한다.

프로그램과 영화의 성공 후, 키튼은 그가 출연했던 영화들을 연이어 재개봉시키고 광고도 숱하게 출연하여 안정적인 재정적 기반을 마련하였고 1957년에는 키튼의 전기 영화가 나오는가 하면, 1959년 미국 아카데미에서는 키튼에게 평생공로상을 수여하면서 명예도 완전히 회복하였다.

이 시기 오히려 채플린이 조금 올드한 영화들을 찍어내며 관객들에게 외면받은 것을 생각하면 그의 성공은 대단하다. 그의 마지막 영화는 스티븐 손드하임 원작의 뮤지컬을 영화화한 《로마에서 일어난 기묘한 사건, 1966》인데, 이 역시 호평 일색. 1965년에는 베니스 영화제에 초대돼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다. 30년 만에 다시 찾아온 영광에 마침내 한을 풀었던 것일까? 1966년 2월 1일, 영화사에 길이 남을 이 위대한 배우는 폐암으로 눈을 감는다.

그리고 뒤늦게 천재를 알아 본 신세대 영화 팬들의 추모가 이어진다. 그의 시대를 앞서간 시도들은 영화학자와 영화감독들에 의해 후일 재조명된다. 이를 테면,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 에서 주인공들이 키튼과 채플린 중 누가 더 위대한가로 다투는 장면이 있다.

영화 평론가는 두 거장의 대조적 이미지에 대해 이런 분석을 내렸다. "채플린은 사랑스런 방랑자(the tramp)이지만, 사회에 대해 냉소적이다. 대부분의 채플린 영화들은 그가 사회에 정착하지 못하고 다시 방랑을 떠나는 것으로 끝난다. 반면, 키튼는 무표정한 얼굴(stone face)이지만, 사회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결국 사회에 편입되는 것으로 끝난다." 실제로 키튼도 이렇게 언급한 적이 있다. '채플린의 방랑자는 귀여웠지만 범죄를 저지를 기회가 온다면 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달라요. 언제나 정직했죠.' 무성 영화 시대의 두 거장 버스터 키튼 VS 찰리 채플린

2 영향력

일반인들은 잘 모르지만 영화광이나 영화 감독들은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영화 감독이 되려면 영화를 많이 공부해야하고 당연히 무성영화도 봐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 감독중에는 버스터 키튼을 좋아하는 사람도 꽤 된다. 영화 평론가야 영화 역사는 당연히 꿰고 있어야하니 보기 어려운 무성영화도 보니까 잘 안다. 무성영화는 소리가 없지만 그래서 더 보기가 어렵다. 그래도 찰리 채플린이 더 유명하고 인기있고 영향력 있다. 안습 ... 였지만!

키튼의 재평가가 활발히 이루어지던 60년대 말부터 80년대 후반까지는 영화계에서 채플린보다 키튼을 더 높이 사는 분위기도 조성되었다. 영국의 Sight And Sound 지에서 매 10년 마다 선정하는 세계 10대 영화 리스트에서 꾸준히 한 자리를 차지하던 <시티 라이트> 는 72년과 82년도에 제외되었는데, 바로 키튼의 <제너럴> 때문이었다. 그 뒤로는 둘 다 빠지고 <모던 타임즈> 가 한 자리.

2012년 8회째 개최한 제천국제음악영화제 두번째 날 저녁에 진행되는 행사에 키튼의 작품 <카메라맨> 이 상영되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깔깔깔.

성룡이 가장 존경하고 영감을 많이 받은 배우이자 감독이다. 아직도 성룡에게 가장 존경하는 영화인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0.5초만에 버스터 키튼이라 말할 정도. 성룡은 80년대 헐리웃 진출 당시, 제작환경에 적응을 못해 완성도가 떨어지는 영화를 많이 찍었는데, <배틀 크리크> 를 찍을 당시 스텝으로부터 "당신은 버스터 키튼과 비슷한 면이 있다. 참고해 봐라"라는 조언을 들었다. 성룡은 버스터 키튼의 영화를 보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고, 홍콩으로 컴백한 뒤에 감독한 영화들에서는 키튼의 영향력이 아주 강하게 느껴진다. 특히, 프로젝트 A2의 화판이 쓰러지는 장면은 완벽한 키튼의 오마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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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여러 영화에 이런 식으로 종종 오마쥬 된다.

네이버 스페셜 리포트에서 더 많은 사진과 함께 키튼의 인생을 훑어볼 수 있다. 내용은 본 항목과 살짝 다른데, 참고 자료가 조금 다른 모양. 위대한 무표정 버스터 키튼

이동진 평론가가 선정한 '올타임 베스트 10' 명단에 <우리의 환대>가 있다.
  1. 후에 그의 아버지 조 키튼은 키튼의 감독작에 종종 조/단역을 맡았다.
  2. 키튼은 아버클과의 첫 미팅때 그에게 영화 카메라 한 대를 빌려 달라고 요청, 밤을 새가면서 카메라의 작동 원리와 자신이 카메라에 찍히면 어떻게 보일지 등을 연구했다고 한다.
  3. 대중들이 흔히 알고있는 뚱보와 홀쭉이 컨셉은 본래 아버클과 키튼의 '재치있는 뚱보와 멍한 홀쭉이' 컨셉을 둘의 후배인 로렐과 하디 콤비가 '재치있는 홀쭉이와 멍한 뚱보' 로 변형하여 유명해진 것이다.
  4. 그녀는 평상시 술이 약한 체질인 데다가, 난소에 질병을 앓고 있었는데 파티에서 술을 마시고 나서 쓰러져 그대로 사망했다.
  5. 여기서 중요한 점은 키튼이 실제로 오리건 주의 군인들을 기용했다는 점이다. 파일:Attachment/버스터 키튼/10523560 10153003219058704 8872742985172785044 n.jpg 흠좀무.
  6. 그는 말도 유창했으며 자신의 목소리에 대해서 자신감도 있었고 무엇보다 무대 경험이 풍부했기 때문에 다른 무성영화 스타들과는 달리 유성 영화의 도입을 반겼지만, 특유의 금속 소리가 섞인 저음의 목소리가 홀쭉한 스톤 페이스의 키튼을 생각하던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7. MGM에서는 비용이 많이 들고 영화사의 시스템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키튼이 영화에서 직접 스턴트를 행하거나 영화를 감독하는 것을 막았고 MGM 소속의 제작자와 감독들은 그의 캐릭터를 반강제로 파괴시켰다. 그가 감독한 전성기 시절 영화들 속 그의 모습은 영민하고 성실하지만 실수도 자주 하는 청년이었고 그가 행하는 스턴트도 난관을 헤쳐나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하는 상황에서 벌어졌다면, MGM에서 찍게 된 영화들에서의 키튼은 그냥 다른 사람들의 계략에 빠지거나 본인의 실수로 바보짓을 하는 캐릭터였다. 심지어는, 1930년대가 찾아오면서 키튼은 단독 주연에서 밀려나서 지미 듀란테와 공동 주연을 맡게되고 이들 영화에서는 눈에 띄지도 않는 무미건조한 캐릭터가 되어버린다.
  8. 이 때문에 버스터 키튼의 영화는 판권과 필름이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무성 코미디 영화 삼인방 중에서는 복원하기 까다로운 케이스에 속한다. 화질도 썩 만족스럽지 않은 편. 그래도 2015년 이탈리아 쪽에서 주선해 4k DCP로 깔끔하게 복원하는데 성공했다. 자세한건 다음 링크 참조.
  9. 작중 여주인공이 자신의 예전 연기를 보여준다며 남주인공에게 보여주는 영화가 바로 슈트로하임이 연출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