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 채플린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이름찰리 채플린
CHARLES CHAPLIN
분야영화
입성날짜1972년 4월 10일
위치6751 Hollywood Blvd.
KBE [1]

동일인물 맞습니다. 이 미칠듯한 괴리감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요,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Sir Charles Spencer Chaplin, KBE

20세기 전반의 대중문화를 대표하는 얼굴 중 하나이자, 위대한 영화인

1889년 4월 16일 ~ 1977년 12월 25일.[2]

영국 태생의 배우, 감독, 영화 음악, 편집, 작가를 겸한 먼치킨 천재 영화인. 코미디언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1 생애

1.1 유년기와 연극 무대

정확한 출생지는 호적 기록이 없어서 불확실하지만, 채플린 자신이 자서전에서 회고하기로는 사우스 런던의 빈민촌인 월워스(Walworth)라고 한다. 할머니가 롬족(Rom), 흔히 말하는 집시라서 채플린에게도 집시의 피가 흐르는데, 채플린은 이를 부끄러워하기는 커녕 자랑스럽게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출생지와 집시 혈통에 관해 최근에 새로운 주장이 나왔는데, 채플린이 1889년 남부 런던에서 태어난 게 아니라 웨스트 미들랜즈 지방의 집시 캐러번에서 태어났다는 내용의 편지가 발견된 것. 채플린이 쓰던 책상 서랍에 있던 어느 편지에 의하면 '당신(찰리 채플린)은 버밍엄에서 가까운 스메스위크의 블랙 패치(Black Patch) 지역 "집시 퀸"에 속한 캐러번에서 태어났다'는 글이 적혀있다. 채플린이 태어난 1880년대에 그곳은 버밍엄 변두리 산업지대 집시족 마을이었고 따라서 이 편지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채플린은 집시의 피가 흐르는 게 아니라 완전한 집시인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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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나이티드 아티스츠 창립 모습. 가운데 있는 여성은 무성 영화 시절 톱스타 '메리 픽포드'.[3]
이 사진을 보면 다른 사람들은 딱 유럽인인데 채플린만 정말 인도계 집시처럼 보이기는 하다

어쨌든 부모가 모두 무대 연예인이었는데, 아버지인 찰스 채플린(Charles Chaplin Sr., 1863년 3월 18일~1901년 5월 9일)[4]은 런던 뮤직홀에서 약간 이름난 가수였고, 어머니 해나 채플린(Hannah Chaplin, 1865년 8월 11일~1928년 8월 28일)[5]은 이런저런 연극에서 하녀나 잡역 등 단역을 도맡아하는 직급 낮은 배우였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내 뮤직홀 배우들의 고질병인 알코올 중독에 빠지게 되었고, 어머니는 남편이 미국에 순회공연간 사이 다른 배우와 불륜을 저지르는 바람에 결국 별거하게 되었다.

별거 후 해나는 목을 상해 몇번씩 극단을 옮겨다녀야 했고,[6] 연극 일을 포기한 뒤에는 재봉사로 근근이 생계를 잇는 지경이 되었다. 채플린은 이 시절 겪은 배고픔을 평생 잊지 못했고, 이 때의 경험이 훗날 영화들에 반어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게다가 1895년에 해나가 정신분열 증세의 악화와 호전을 반복하며 수시로 정신병원에 들락거리는 바람에, 보육원에 맡겨지거나 아버지와 잠시 지내는 등 상당히 불안정한 생활을 해야 했다. 1912년에 어머니를 만났을 때의 일화가 자서전에 나와 있다.

어머니께서 편찮으셨기에 우울한 하루였다. 어머니께선 찬송가를 부르며 날뛰시던 시기를 막 지나서 방에 격리되신 상태였다. 이에 대해 사전에 간호사가 우리에게 경고했다. 시드니(찰리의 형)는 어머니를 뵈러 갔지만, 나는 그럴 용기가 없어서 기다렸다. 형은 침울해져서 돌아오더니, 어머니가 얼음처럼 차디찬 샤워로 충격 요법을 받으셔서 얼굴이 새파랬다고 말했다.[7] 그래서 우린 어머니를 사립 시설로 모셔오기로 했다. 지금은 그럴 여유가 있었으니까.

It was a depressing day, for she was not well. She had just got over an obstreperous phase of singing hymns, and had been confined to a padded room. The nurse had warned us of this beforehand. Sydney saw her, but I had not the courage, so I waited. He came back upset, and said that she had been given shock treatment of icy cold showers and that her face was quite blue. That made us decide to put her into a private institution - we could afford it now.

그러나 아버지가 아들의 재능을 간파해 1898년에 자신의 친구가 경영하는 에이트 랭커셔 래즈(Eight Lancashire Lads)라는 아동극단에 입단하도록 주선했고, 여기서 처음으로 코믹 연기를 선보여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이 극단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고, 배우의 길을 걷는 것을 반대한 어머니 때문에 1901년에 퇴단했다. 한편 형인 시드니는 여객선의 나팔수 겸 급사로 취직했고, 이후 동생과 마찬가지로 연기에 재능을 보이면서 먼저 연예계에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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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셜록 홈즈'에서 꼬마 급사를 연기하는 채플린, 1903년~1906년경.

어머니가 다시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한 1903년에는 형의 권유로 '블랙모어 극단'에서 나이를 14세로 속여 오디션을 보았고, 여기서 '셜록 홈즈' 연극에 꼬마 급사로 출연해 호평을 받았다. 무려 3개국을 돌아다녔으며, 나중에는 런던으로 가서 연극 '셜록 홈즈'의 원작자(정확히는 아서 코난 도일과 공동집필)이자 연극에서 최초로 셜록 홈즈를 연기한 배우인 윌리엄 질렛(William Gillette)과 함께 연기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채플린 본인은 "하늘에서 내려온 소식 같았다"라고 표현했다. 이후 형 시드니와 이런저런 촌극에 출연하기도 했고, 시드니는 1906년 당대 거물급 희극단 중 하나였던 프레드 카노(Fred Karno)의 희극단에 입단했다. 채플린도 2년 뒤인 1908년에 같은 극단에 들어갔는데, 처음에 카노는 채플린을 '너무 소심해 보여서 연기를 못 할 것 같은 청년'이라고 별로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채플린은 카노 극단에서 주정뱅이나 건달 등 뒷골목 인물들을 실감나고 코믹하게 묘사하면서 단시간에 큰 호응을 얻기 시작했고, 1910년에 극단이 미국 순회공연을 할 때도 주역으로 발탁되었다. 이 때의 성공으로 영국보다는 미국의 활동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1912년에 2번째로 미국 공연을 갔을 때 맥 세닛(Mack Sennett)이 속한 키스턴 영화사의 전속 계약 제의를 받고 희극 영화배우로 진로를 바꾸게 되었다.[8]

1.2 키스턴~뮤추얼 시기


"생활비 벌기(Making a Living, 1914년작)"에서. 왼쪽이 채플린.

그러나 고액의 봉급에 끌려서 들어간 키스턴의 촬영과 연출 방식은 대단히 원시적이고 조잡했다. 너무 웃기는 것에만 집착해 줄거리가 미칠듯이 허접한 건 예삿일이었고,[9] 심지어 어떤 행사에 가서 몇 가지 웃긴 동작을 한 걸로 영화를 하나 만드는 등의 작업까지 했다. 당시 키스턴 사의 최대 인기 배우는 포드 스털링(Ford Sterling)이라는 사람이었는데, 기껏해야 와당탕 넘어지거나 파이 몇 번 맞는 게 전부였다. 그에 비해 채플린은 24살치곤 너무 어려 보여서 계약을 파기할 위험에 처해 있었다. 몸개그 전문인 키스턴 영화사는 웃기게 생기든지 해야 인기가 생긴다고 생각했던 것. 1914년에 헨리 레만(Henry Lehrman)이 감독한 '생활비 벌기(Making a Living)'라는 영화에 콧수염+외알 안경+중절모+프록코트라는 고전적인 사기꾼 분장을 하고 공식 데뷔하긴 했지만 정작 채플린 본인은 이 영화를 무진장 싫어했다. 그나마 비평가 중 한 사람이 '1급 코미디언'이라고 언급해 주긴 했다. 그러자 채플린은 제대로 웃겨보기 위해 그 유명한 떠돌이(The tramp)란 캐릭터를 만드는 신의 한 수를 둔다.


"베니스에서의 어린이 자동차 경주(Kid Auto Races at Venice, 1914년작)"[10] 에서. 채플린의 떠돌이 캐릭터 분장을 하고 찍은 2번쨰 영화로, 대외적으로는 여기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사진에서 느껴지는 사고뭉치의 기운

이 캐릭터는 통 크고 지나치게 헐렁한 바지, 짧고 꽉 끼는 웃도리, 대나무 지팡이, 너무 작은 모자, 칫솔 모양 콧수염이라는 괴상한 조합으로 만들어졌는데, 항상 아이디어가 넘쳤던 채플린이 전부 자기 주변 및 동료들에게서 빌린 도구들로 완성한 것이다. 바지는 스승이었던 뚱보 희극배우 로스코 아버클에게서 빌려 입었고, 초기에는 골판지를 이용했다가, 후에 가발을 다듬어 콧수염을 만드는 등의 노력을 했다. 그의 도구들 중 채플린 자신의 것은 대나무 지팡이밖에 없었으며, 대나무 우산살을 이용했다. 이렇게 탄생한 떠돌이는 채플린만의 전매 특허로 수십년간 자리잡게 되었고 현재도 채플린은 이 이미지로 기억된다. 참고로 사실 이 전설의 떠돌이 기믹은 원래 키스턴의 최고 스타이자 당대 인기 여배우였던 메이블 노먼드(Mabel Normand)와 함께 한 '메이블의 이상한 곤경(Mabel's Strange Predicament)' 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기믹이지만, 대형 영화를 개봉하기 직전 조그마한 소품을 제작하여 간을 보는 키스턴 사의 관례로 메이블의 이상한 곤경이 개봉되기 이틀전, 실제 자동차 경주장에서 단 하룻동안 촬영한 '베니스에서의 어린이 자동차 경주(Kid Auto Races at Venice)'라는, 정말 경주장에서 민폐만 끼치는 7분 남짓한 작품에서 먼저 공개되었다.

이처럼 키스턴의 감독들은 한국 드라마쪽대본보다 심할 정도로 대충대충 영화를 제작했고 채플린은 이런 제작방식에 대해서 계속 불만을 표했다. 특히 채플린의 11번째 영화인 '메이블의 운전(Mabel at the Wheel, 1914년작)' 분명 채플린의 데뷔작이 1914년작이었던 것 같은데 벌써 11번째라는 건 넘어가자 에서는 영화의 감독도 맡고 있던 메이블 노먼드와 싸우는 바람에 계약이 해지될 뻔하기도 했다. 맥 세닛은 어떻게든 채플린을 억눌러두려고 했지만, 영화 상영업자들이 채플린의 작품을 계속 원했기에 어쩔수없이 채플린으로부터 영화가 망했을시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1500달러를 받은 뒤에야 채플린에게 직접 감독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이렇게 해서 나온 영화가 바로 사랑의 20분 (Twenty Minutes of Love, 1914). 이후 채플린은 거의 1주일에 한 작품 꼴로 영화를 찍기 시작했고 점차 영화를 감독하는 노하우를 얻게된다. 한편 채플린은 1914년 11월 개봉한 키스턴 최초의 장편 코미디 영화인 '틸리의 무너진 로맨스(Tillie's Punctured Romance)'에도 주연으로 출연하였는데[11] 이 영화들이 모두 초대박을 치자 채플린은 키스턴에서 가장 유명한 스타가 되었다. 채플린은 훗날 이 시기가 자신의 영화 인생에서 가장 재밌던 때였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키스턴의 하드코어한 스케줄에 지친 채플린은 1915년, 키스턴에서 독립하여 에세네이, 뮤추얼 등 상대적으로 나은 조건을 제공하는 영화사들을 차례로 전전하면서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다. 키스턴에서 독립하여 시간의 여유가 생긴 채플린은 당시 그리 보편적이지 않았던 재촬영을 적극적으로 실시, 자신이 만족할 장면이 나올 때까지 계속 작업에 몰두하는 근성을 발휘하였고 당시 코미디 영화의 관객들이 주로 가난한 사람들[12]이었다는 점을 노려서, 영화에서 당하는 사람들을 부잣집 신사, 콧대높은 여성, 차별적인 경찰관 등 으로 설정했다.

이러한 그의 전략은 먹혀 들어가서 체플린은 인형, 담배, 보드게임, 만화 등 자신을 모델로 한 각종 상품들이 만들어지는 것은 기본이고, 자신을 흉내내는 대회[13] 등이 수시로 열릴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얻게된다. 심지어 다른 배우들이 채플린의 연기를 무단 카피하거나 짝퉁 채플린 영화를 만드는 등의 문제까지 생겨서 골치를 썩이기도 했다. 결국 채플린은 법률 고문으로 형 시드니를 고용하였고 그는 동생을 도와서 복잡한 계약이나 법률 문제 해결에 관여했다. 이후 채플린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는 해럴드 로이드도 영화 인생 초반에 외톨이 루크(Lonesome Luke)라는 캐릭터를 만들어 출연했지만, 채플린 측에서 자신의 떠돌이 캐릭터를 카피한 것이라며 소송을 거는 바람에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해야 했다.

1.3 퍼스트 내셔널~유나이티드 아티스츠 시기

1917년 뮤추얼 영화사와 우호적으로 계약을 끝낸 채플린은 퍼스트 내셔널 영화사로 이적했는데, 이 때부터는 감독과 각본을 담당한 것도 모자라서 아예 자기가 마음대로 돌릴 수 있는 스튜디오까지 지어놓고 작업하기 시작했다.[14] 또한 퍼스트 네셔널 시절부터 그는 당시로서는 꽤 참신한 특수 효과 등을 동원해서 더 짜임새 있는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어깨총(Shoulder Arms)'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현시창 참호전을 소재로 쓰기도 했다[15]. 다만 채플린 본인은 군인들의 참담한 실상을 자세히 묘사하지 못했다며 영화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고 한다. 실제로 이 시기 채플린은 첫 번째 부인인 밀드레드 해리스가 아이를 유산하자 밀드레드에 대한 애정이 식어서 그녀와 늘상 다투는 등 불안정한 사생활 때문에 슬럼프에 빠져서 다소 매너리즘에 빠진 범작들을 내놓았다.

1919년. 채플린은 기존 거대 영화사들의 꼬장 대병합에 대항하기 위해 메리 픽퍼드,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데이비드 워크 그리피스 등 동료 영화인들과 함께 '유나이티드 아티스츠'라는 신흥 영화사를 창립하였고 1921년에는 밀드레드와 이혼 소송을 마무리하고 아역배우 재키 쿠건을 공동 주연[16]으로 발탁, 희극과 비극을 섞은 참신한 구성의 영화 '키드'를 발표하며 성공적으로 재기하였다. 이듬해인 1922년에 개봉된 '순례자'는 개신교의 맹목적인 전도 행위를 풍자하여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았다.

1923년 본인은 영화에 출연하지 않고 희극적인 요소도 완전히 배제된 《파리의 여인》을 발표하면서 채플린은 유나이티드 아티스츠에 본격적으로 둥지를 틀었다. 파리의 여인은 비평가들로부터는 대단한 호응을 얻었지만, 코미디 스타가 아닌 영화 감독 찰리 채플린이라는 포지션을 받아들이지 못한 관객들로부터 흑역사 취급당하면서 그때까지의 채플린 영화 중 최악의 흥행 성적을 냈고[17] 채플린은 다시 코미디언으로 복귀한다.

코미디언으로 복귀한 채플린은 《황금광 시대》(1925), 《서커스》(1928), 《시티 라이트》(1931), 《모던 타임즈》(1936) 등의 걸작들을 차례로 선보이면서 제 2의 전성기를 누리게 되지만 1920년대 후반부터, 채플린의 멘탈이 파탄 지경에 이르러도 이상할 것이 없는 큰 사건이 계속 되었다.

우선 1926년 1월 11일 크랭크인을 한 《서커스》는 1달 동안 촬영한 분량이 현상실의 실수로 스크래치가 생겨서 전부 날리고 재촬영을 해야했고[18] 같은 해, 9월에는 스튜디오에 원인모를 화재가 발생하여 촬영이 1달간 전면 중단되었다[19]. 1926년 12월에는 채플린의 두번째 부인 리타 그레이가 채플린에게 이혼 소송을 걸어서 막대한 위자료를 요구하였고, 이혼 소송이 진행되는 중인 1927년에는 갑자기 미정부가 100만 달러 이상의 탈세 혐의로 채플린을 기소했다. 설상가상으로 1927년 10월, 《재즈 싱어》가 개봉되면서 본격적으로 유성영화의 시대가 개막되었다.[20]

1928년 1월 개봉한 《서커스》의 흥행은 성공적이었지만 영화계의 판도가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바뀌는 것을 보고 무성영화 시대의 다소 과장됐지만 그만큼 풍부하고 감수성 있는 몸짓연기를 몹시 사랑했던 채플린은 영화는 끝났다. 더 이상 사람들은 상상하지 않을 것이다.라며 영화계 은퇴 선언을 한다[21]. 하지만 1931년 은퇴 선언을 번복하고 자신의 다음 영화 《시티 라이트》를 무성영화로 만들어 개봉하면서 무성영화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동시에 초반부의 조각상 장면에서 등장인물들의 목소리를 지직거리는 백색소음으로 처리함으로서 당시의 조악한 녹음 기술을 조롱하였다. 《시티 라이트》의 첫 시사회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까지 참석했고 찰리 채플린은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 받았다.

하지만 이미 무성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들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고, 시대의 변화를 수용한 채플린은 1936년 개봉한 《모던 타임즈》에서부터 조금씩 유성영화의 가능성을 시험하면서 동시에 기계화/자동화로 인한 실업 문제라는 사회 현실을 적극적으로 풍자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채플린의 모습은 나치스로 인한 제2차 세계대전의 징조, 소련의 대두 등의 외부적 문제와 결부되어 채플린이 '공산주의자'라는 오명을 쓰게 되는 발판이 되었다.

이후 채플린은 자신과 히틀러의 외모가 비슷하다는 것을 이용하여 '아데노이드 힝켈'이라는 독재자와 유대인 이발사라는 1인 2역으로 나치를 풍자한 《위대한 독재자》를 1940년에 완전 발성영화로 선보이는데 영화의 마지막의 연설 장면으로 인해 당시 제2차 세계대전에 관여하지 않으려고 하던 미국 정부로부터 찍히게 되었으며 위대한 독재자 개봉 직후, 미국에서 열린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군을 위한 원조를 부탁하는 연설회'에서 채플린이 후두염에 걸린 소련 대사 대신 연설을 하여 "동무(Comrade) 여러분!"이라는 명대사와 함께 소련을 도와주자는 발언을 하자 미국인들 또한 채플린을 '국민을 선동하는 공산주의자'로 인식하게 된다. 그래도 이 때까지만 해도 미국인들은 공산주의에 대해 딱히 관심도 없고 적대감 또한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그렇게 큰 논란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냉전이 새로운 떡밥으로 등장함에 따라 매카시즘으로 대표되는 빨갱이 사냥의 열풍이 미전역을 휩쓸게 되면서 당대 미국인들 사이에 "공산주의자들이 미국의 자유주의를 위협한다"라는 여론이 강해지기 시작한다[22]. 특히 부하들을 시켜 불법적으로 연예인들의 사생활을 캐서 그들을 조종하는 것으로 유명한 FBI 국장 존 에드거 후버가 채플린에게 이상할 정도의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후 FBI는 영국의 MI-5에 채플린의 과거에 대한 뒷조사를 의뢰하는가 하면,[23] 조앤 배리라는 여자와 접촉하여 채플린이 자신을 강간해 임신했다며 소송드립(처음엔 그냥 차비만 받고 돌아갔지만 이후 소송을 걸었다. 전기 작가 데이비드 로빈슨의 말을 빌리자면 그녀에게는 "장총을 든 어머니와 변호사 삼촌"이 있었다고.)을 펼치게 하는 등 사방팔방으로 압박을 가했다. 2012년에 비밀해제된 MI-5 자료에 의하면, FBI의 채플린 파일(Charlie's FBI file)은 무려 1,900페이지에 달했고, 그를 공산주의자와 연관시킨답시고 그의 본명이 이즈리얼 손스타인[24]이라거나 프랑스 퐁텐블로에서 태어났다거나 사회주의자 계열의 유대계 부모님 밑에서 났다는 의심까지 했다.[25]

조앤 배리와의 소송을 끝낸 채플린은 오슨 웰스프랑스의 연쇄 살인범 앙리 데지레 랑드뤼의 범행을 소재로 집필한 각본을 사들여서 당시 미국의 높으신 분들을 풍자하는 블랙 코미디 영화 《살인광시대》(1946)[26]를 완성하고 개봉했는데 주인공 베르두가 돈 많은 여성들과 결혼, 살해하여 재산을 빼앗는다는 내용을 문제삼아서 영화 검열 위원회와 가톨릭 풍기 위원회 등은 물론 조앤 배리 사건과 영화를 연관시킨 관객들마저 채플린을 비난하며 채플린의 인기는 급락하게 된다.

결국 채플린은 미국 활동에 염증을 느끼게 되었고, 일종의 회고 영화인 《라임라이트》(1952)를 완성한 뒤 가족들과 영국을 방문했다. 하지만 여객선이 아직 대서양을 항해하고 있을 때 미국 정부가 채플린의 시민권을 박탈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채플린은 주저하지 않고 유럽으로 활동 거점을 옮겼다.

1.4 활동 후기와 사망

이후 채플린은 주로 스위스에서 거주하면서 영국에서 영화를 촬영하는 식으로 생활했는데, 그가 영국에서 제작한 첫번째 영화인 《뉴욕의 왕》(1957)에서 초반에는 로큰롤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면서 미국 대중문화의 방종과 퇴폐를 비판하였고 후반부에는 자신의 부모님을 위해 동료들의 이름을 밀고하는 소년을 통해 매카시즘을 비판하는 등 대놓고 미국까의 기질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할리우드에서처럼 자신이 영화 제작에 관한 전권을 위임받는 시스템이 아니어서 특유의 개그 센스도 위축되었고 너무 미국을 편협하게 묘사하였다는 평론가들의 비판을 받았다.

1959년부터 1964년까지는 방대한 분량의 자서전을 집필했고, 마지막 영화이자 유일한 컬러 작품인 《홍콩에서 온 백작부인》(1967)을 제작했다. 그러나 말런 브랜도소피아 로렌이라는 ㅎㄷㄷ한 주연에 유니버설 픽쳐스라는 거대 영화사의 제작이라는 이점을 살리지 못하고 구식 로맨틱 코미디 취급을 받으며 망했어요 신세가 되었다. 특히 메소드 연기로 각광받았던 브랜도의 경우 채플린이 시범을 보이고 배우가 그것을 따라하도록 하는 구식 연기 지도 방식을 매우 못마땅해했고, 촬영 후반에 가서는 제작자였던 제롬 엡스타인이 채플린과 브란도 사이의 중개 역할을 해서 겨우 제작을 마쳤을 정도로 제작 과정도 막장이었다.

1970년대에는 다리 부상 등으로 인해 점차 건강이 쇠약해지기 시작했고, 신작을 만드는 대신 그 동안 감독했던 영화들에 음악을 입혀 재개봉하는 작업을 하였다. 이 때 채플린은 그동안의 영화계에 공헌한 업적에 대한 각종 상과 직위를 수여받았고, 1972년에는 영화 예술 아카데미가 바치는 명예상 시상식을 위하여 약 20년 만에 미국을 다시 방문하여 아카데미 시상식 참석자 전원의 기립 박수를 받으며 명예상을 수상하였다. 이때 너무나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며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이 나온다.

1977년 크리스마스에 스위스브베에 있는 자택에서 잠을 자던 중 숙환으로 타계했고, 유해는 자택 근처의 묘지에 안장되었다.

하지만 장례 후 약 두 달 뒤 돈을 노린 두 명의 엔지니어가 무덤을 도굴했고, 채플린의 가족들에게 유해를 되찾고 싶으면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 전화를 걸어왔다. 하지만 이 어설픈 시도는 결국 실패로 끝났고, 채플린의 유해는 주네브 호숫가에 있던 한 농부의 옥수수밭에서 발견되었다. 이후 같은 묘지에 재매장되었는데, 도굴 시도를 막기 위해 관 위에 방공호 수준의 두꺼운 콘크리트가 씌워졌다.

2 작품 목록

아래 작품들 중 재개봉 기록이 있는 것들은 채플린이 개봉 후 영상을 일부 재편집하고 자신이 작곡한 OST를 덧붙여 개정한 것이다.

키스턴 시절 작품들

01. 생활비 벌기 (Making a Living, 1914)
02. 베니스의 어린이 자동차 경주 (Kid Auto Races at Venice, 1914) - 채플린이 '떠돌이 기믹'을 관객들에게 처음 선보인 영화.
03. 메이블의 이상한 곤경 (Mabel's Strange Predicament, 1914) - 채플린이 '떠돌이 기믹' 을 처음 만든 영화.
04. 도둑잡기 (A Thief Catcher, 1914) - 오랫동안 필름이 분실되었다고 여겨졌지만, 2010년에 미시건 주의 한 골동품 상점에서 발견되어 공개되었다. 그러나 사실상 포드 스털링의 주연작이고, 6분 남짓한 영화 동안 채플린의 출연 시간은 15초 정도다.
05. 소나기 사이에서 (Between Showers, 1914)
06. 필름 자니 (A Film Johnnie, 1914)
07. 탱고 탱글스 (Tango-Tangles, 1914)
08. 그의 기분전환 (His Favorite Pastime, 1914)
09. 잔인한 사랑 (Cruel Cruel Love, 1914)
10. 스타 보더 (The Star Boarder, 1914)
11. 메이블의 운전 (Mabel at the Wheel, 1914)
12. 20분 동안의 사랑 (Twenty Minutes of Love, 1914) - 채플린이 처음으로 감독/연출을 시도한 영화.
13. 카바레에서 (Caught in a Cabaret, 1914)
14. 비 오는 날에 (Caught in the Rain, 1914)
15. 바쁜 날 (A Busy Day, 1914)
16. 운명의 폴로 방망이 (The Fatal Mallet, 1914)
17. 그녀의 강도 친구 (Her Friend the Bandit, 1914) - 개봉 기록과 비평이 있어서 분명히 존재한 작품이지만, 네거티브 필름과 카피본 모두 존재하지 않아 소실 작품으로 분류된다.
18. 녹아웃 (The Knockout, 1914)
19. 메이블의 바쁜 날 (Mabel's Busy Day, 1914)
20. 메이블의 결혼 생활 (Mabel's Married Life, 1914)
21. 웃음 가스 (Laughing gas, 1914)
22. 소도구 담당자 (The Propetty Man, 1914)
23. 바 플로어 위의 얼굴 (The Face on the Bar Room Floor, 1914)
24. 레크리에이션 (Recreation, 1914)
25. 가장 무도회 참석자 (The Masquerader, 1914) - 채플린이 처음 여장 연기를 선보인 영화. 그런데 굉장히 어울린다.
26. 그의 새 직업 (His New Profession, 1914)
27. 라운더스 (The Rounders, 1914)
28. 새 관리인 (The New Janitor, 1914)
29. 사랑의 고통 (Those Love Pangs, 1914)
30. 반죽과 다어너마이트 (Dough and Dynamite, 1914)
31. 담대한 신사들 (The Gentlemen of Nerve, 1914)
32. 그의 음악 경력 (His Musical Career, 1914)
33. 그의 회합 약속 장소 (His Trysting Place, 1914)
34. 틸리의 무너진 사랑 (Tillie's Punctured Romance, 1914)
35. 첫 만남 (Getting Acquainted, 1914)
36. 그의 선사시대 (His Prehistoric Past, 1914)

에사네이 시절 작품들

37. 그의 새 직장 (His New Job, 1915)
38. 밤 외출 (A Night Out, 1915)
39. 챔피언 (The Champion, 1915)
40. 공원에서 (In The Park, 1915)
41. 값싼 도주 (A Jitney Elopement, 1915)
42. 떠돌이 (The Tramp, 1915)
43. 해변에서 (By the Sea, 1915)
44. 작업 (Work, 1915)
45. 여자 (A Woman, 1915) - 채플린이 여장 연기를 선보인 영화. 이것 또한 전편과 같은정도의 미모가 있다.
46. 은행 (The Bank, 1915)
47. 납치된 선원 (Shanghaied, 1915)
48. 쇼의 하룻밤 (A Night In The Show, 1915)
49. 찰리 채플린의 희화한 카르멘 (Charlie Chaplin's Burlesque on Carmen, 1916) - 에사네이가 채플린과의 계약이 해지된 뒤, 미완성으로 남아 있던 필름을 멋대로 짜깁기해 만든 영화. 채플린은 이에 빡쳐서 소송을 걸었지만 패소하고 말았다.
50. 경찰 (Police, 1916)
51. 3중 트러블 (Triple Trouble, 1916)

뮤추얼 시절 작품들

52. 매장 감독 (The Floorwalker, 1916)
53. 소방수 (The Fireman, 1916)
54. 방랑자 (The Vagabond, 1916)
55. 새벽 1시 (One A.M., 1916) - 초반에 등장하는 택시 운전수 빼면 오로지 채플린만 혼자 연기하는 ㅎㄷㄷ한 영화.
56. 백작 (The Count, 1916)
57. 전당포 (The Pawnshop, 1916)
58. 스크린 뒤에서 (Behind The Screen, 1916)
59. 링크 (The Rink, 1916) - 채플린의 달인급 롤러스케이팅 실력을 볼 수 있는 영화. 달인은 여기서 피겨 스케이트를 배운 건가?
60. 이지 스트리트 (Easy Street, 1917)
61. 요양 (The Cure, 1917)
62. 이민 (The Immigrant, 1917)
63. 모험가 (The Adventurer, 1917) - 초반부에서 아시아계로 보이는 운전수가 엑스트라로 출연하는데, 채플린의 개인 비서이자 집사, 운전사였던 일본인 코노 토라이치다.

퍼스트 내셔널 시절 작품들

아래 작품들 중 '개의 일생'과 '어깨총', '순례자' 세 편은 1958년에 채플린 자신의 재편집과 해설, 음악을 곁들여 '채플린 레뷰(Chaplin Revue)'라는 제목으로 재개봉되었다.

64. 개의 일생 (A Dog's Life, 1918)
65. 채권 (The Bond, 1918) - 1차대전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채권 매입 홍보 영화. 형 시드니가 빌헬름 2세로 분장하고 나오는데, 이 배역은 후속작인 '어깨 총' 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었다.
66. 어깨 총 (Shoulder Arms, 1918)
67. 서니사이드 (Sunnyside, 1919) - 1974년 재개봉.
68. 즐거운 하루 (A Day's Pleasure, 1919) - 1973년 재개봉.
69. 키드 (The Kid, 1921) - 어떤 여자가 가난 때문에 내다버린 아이를 떠돌이 채플린이 발견하여 키우게 된다는 이야기. 여기에 나오는 그 '아이'는 채플린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을 투영했다는 얘기가 있다. 상영 시간이 약 1시간 10분에 달해 중편영화로도 분류된다. 1971년 재개봉.
70. 유한 계급 (The Idle Class, 1921) - 1971년 재개봉.
71. 봉급날 (Pay Day, 1922) - 1971년 재개봉.
72. 순례자 (The Pilgrim, 1922)

유나이티드 아티스츠 시절 작품들

73. 파리의 여인 (A Woman of Paris, 1923) - 채플린의 첫 비극 영화. 하지만 채플린은 감독과 각본, 제작만 맡았고 영화에는 아주 잠깐 짐꾼으로 나온다. 1976년 재개봉.
74. 황금광 시대 (The Gold Rush, 1925) - 본격 금광 찾으러 갔다가 온갖 수난 당하는 영화. 굶주림을 못 이겨 구두끈을 스파게티처럼 먹기도 했다.[27] 친구인 더글러스 페어뱅크스가 개척자들에 대한 슬라이드를 보여줬는데, 거기에 자신이 읽은 서부 개척사를 덧붙여 구상했다고 한다. 1942년 채플린 본인이 음악과 나레이션을 입혀서 유성 영화로 재개봉.
75. 서커스 (The Circus, 1928) - 채플린의 장편 희극 영화 중 가장 쓸쓸하고 처연한 분위기의 결말을 보여주는데, 당시 채플린의 멘탈도 영 좋지 않았거니와 유성영화의 시대가 다가오면서 자신의 몰락이 머지 않음을 예상하고 표현했다는 식의 해석이 많다. 그런데 본작 개봉 이후 10여년간이 진정한 채플린의 리즈 시절이었다는 게 함정.[28] 1970년 재개봉.
76. 시티 라이트[29] (City Lights, 1931) - 처음으로 채플린이 직접 OST를 작곡한 영화. 아인슈타인도 첫 개봉 때 왔다. 평화와 번영의 기념비 위에서 떠돌이 채플린이 자는 등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들어가 있다.
77. 모던 타임즈 (Modern Times, 1936) - 기계 문명에 망가져 가는 채플린의 이야기를 그렸다. 거대한 톱니바퀴 위에 누워 너트를 조이는 대목은 명장면.
78. 위대한 독재자 (The Great Dictator, 1940) - 채플린이 토키(유성영화)로 전환한 첫 작품. 파시즘나치즘 비판으로 유명하다. 이 영화에서 채플린은 유대인 이발사와 아돌프 히틀러의 패러디 캐릭터 아데노이드 힌켈이라는 1인 다역을 맡았다.
79. 살인광시대 (Monsieur Verdoux, 1946)
80. 라임라이트 (Limelight, 1952)

영국에서 제작한 후기 작품들

81. 뉴욕의 왕 (A King in New York, 1957 아티카-아치웨이 필름 컴퍼니) - 혁명으로 인해 쫒겨난 왕으로 등장하는데 나중에 공산주의자(...)로 몰려서 고역을 당한다는 작품.[30] 채플린 본인이 이런식으로 미국에서 고역을 당했다.
82. 홍콩에서 온 백작부인 (A Countess From Hong Kong, 1967 유니버설 픽쳐스) - 마지막으로 완성한 영화. '파리의 여인'에서처럼 채플린은 연기자로서는 단역으로만 등장한다. 여객선 승무원임에도 배멀미를 하는 노인(...)이라는 기믹.

그리고 그의 장편 모두와 디지털 리마스터링된 단편 7편이 2015년 엣나인필름을 통해 극장 개봉된다고 한다. 야 신난다

3 한국에서 채플린

매카시즘 여파로 한국에서는 빨갱이라며 1989년에서야 그의 영화가 개봉하게 된다. 정진우가 운영하던 우진필름에서 1989년 채플린 영화를 여럿 개봉했는데 《모던 타임즈》는 서울관객 26만을 기록하며 흥행에도 성공했다.

4 수상 경력

제1회 아카데미 시상식 특별상 (1929)
네덜란드 에라스뮈스상 (1965. 잉마르 베리만과 공동 수상)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헌액 (1970)
프랑스 레종 도뇌르 훈장 코망되르 (3급. 1971)
칸 영화제 특별상 (1971. 모든 영화 작품)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 황금사자상 특별상 (1972)
미국 링컨센터 영화협회 평생공로상 (1972)
제44회 아카데미 시상식 명예상 (1972)
제44회 아카데미 시상식 최우수 영화음악상 (1972. 라임라이트가 20년 만에 미국에 정식 개봉된 뒤 받음)
대영제국 훈장 2등급 (KBE. 1975. 2등급 이상의 훈장이기 때문에 동시에 '경(Sir)' 호칭도 부여받음) 등

5 여자 관계

영화인 채플린의 눈부신 업적에 비해, 사생활 면에서는 상당한 스캔들을 낸 것으로 유명하다. 검열삭제의 사이즈가 굉장히 컸다는 루머가 있다. 특히나 여자 관계가 호사가들의 떡밥으로 자주 등장했는데, 그가 결혼을 했건 아니면 연애만으로 끝났던 간에 대부분 관계를 맺은 여자들이 10대들이라는 점에서 '병아리 잡는 매(Chicken Hawk)'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지금 관점으로 보면 진성 로리콘. 농담이 아니라 진짜 로리콘이 맞는 게 소설 《롤리타》도 채플린이 19살 연하의 리타 그레이와 결혼한 것을 바탕으로 쓰여졌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당연히 채플린은 자신의 아들들, 딸들과 안드로메다급의 나이차를 보이고 있다. 채플린과 70살이나 차이나는 딸도 있다. 이렇게 후손을 많이 남긴 것은 채플린 본인의 무분별한 성생활도 문제였지만 평생 고무로 된 카메라지지대도 사용하지 않을 정도로 고무 알레르기가 있어서 콘돔 사용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31]

채플린의 생애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여자들을 보면..

  • 헤티 켈리
채플린이 카노 극단의 스타 코미디언으로 활동하던 1910년에 만난 첫사랑. 당시 런던의 한 연극단에서 무용수로 일하던 15세 소녀였지만, 헤티의 부모가 채플린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 불과 다섯 번의 데이트만 하고 헤어졌다. 켈리와의 비극적인 첫사랑이 훗날 채플린의 여자 관계에 많은 영향을 미친 걸로 알려져있다. (10대 중반의 젊은 소녀들만을 사귀던 그의 로리콘적 취향, 어떤 여성과 사귈 때 헤어질 때를 대비한 보험책으로 항상 다른 여자와 양다리를 걸쳤다는 점.)
1917년 스타가 된 채플린은 어느 날 켈리의 편지를 받게 되었고, 바로 다음날 그녀를 만나기 위해 영국행을 준비하지만 스케줄이 너무 바빠서 내년으로 미루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1918년 켈리가 당시 유럽에서 대유행하던 스페인 독감에 걸려 사망하면서 이들은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
  • 에드나 퍼비언스
1916년부터 사귀기 시작해서 1918년 채플린이 밀드레드 해리스와 결혼하기 전까지 애인 관계를 유지했다. 원래 에사네이 영화사의 비서였으나 채플린의 추천으로 1915년 여배우로 데뷔했으며 에사네이~퍼스트 내셔널 시기의 거의 모든 채플린 영화에서 상대역으로 출연했다. 유나이티드 아티스츠에서 만든 첫 영화인 '파리의 여인'에서는 여주인공을 맡았다.
그러나 파리의 여인이 흥행에 실패하고 직후, 유성영화의 발달 등으로 영화계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사실상 은퇴했다. 채플린은 그 후에도 꾸준히 에드나에게 연금을 보내주었고, 비록 미개봉된 채 파기되었지만 《바다의 여인》이라는 영화의 주연으로도 추천해주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 밀드레드 해리스
채플린이 29세이던 1918년에 처음 아내로 맞은 아역배우(당시 16세).[32] 채플린의 첫 아이였던 노먼을 낳았지만 3일 후에 사망했고, 그 뒤로 계속된 불화 끝에 1920년에 이혼했다. 이후 싸구려 나이트 클럽을 전전하다가 알코올 중독으로 43세에 사망했다.
  • 리타 그레이
1924년에 두 번째로 결혼한 상대. 밀드레드 해리스와 마찬가지로 결혼 당시 16세. 1920년 촬영된 《키드》에서 단역 천사들 중 한명으로 출연한 것을 계기로 채플린과 사귀기 시작하였다. 《황금광 시대》에서 여주인공으로 출연할 예정이었지만, 채플린의 아이를 임신하면서 조지아 헤일로 교체되었다. 리타가 임신 사실을 빌미로 채플린에게 '결혼하지 않으면 낙태하고 언론에 소문내겠다'고 해서 결혼했다는 소문이 있다. 실제로 그 두꺼운 채플린의 자서전에 리타 그레이는 단 한 문장으로 설명되어있다.
1925년과 1926년에 각각 시드니와 찰스 두 아들을 낳았지만, 1927년에 이혼했다. 이혼 소송 결과 채플린은 리타에게 60만 달러, 아들들인 시드니와 찰스에게 각각 10만 달러 씩 총 80만 달러의 위자료를 지불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이혼 소송은 미국 연방 정부에서 채플린을 탈세 혐의로 제기한 소송도 병행되었고, 덕분에 당시 작업하던 '서커스'의 개봉이 늦춰지는 원인이 되었다.
뉴욕 출신의 배우. 《모던 타임즈》와 《위대한 독재자》에 여주인공으로 출연했다. 《모던 타임즈》에서 바나나를 훔치는 "집 없는 소녀"로 나오는 배우다. 1932년부터 사귀기 시작해서 《모던 타임즈》가 개봉한 연도인 1936년에 비밀리에 결혼했는데, 찰스에게는 폴렛이 3번째 부인이자, 폴렛에게는 찰스가 2번째 남편이었다. 또한 채플린이 결혼한 상대 중 유일하게 10대가 아닌 여성이었다. 결혼 생활은 밀드레드나 리타보다 길었지만 그래도 짧게 끝나서 《위대한 독재자》가 개봉한 1940년에 이혼했는데, 다만 위의 두 여인들과 달리 매우 평화롭고 우호적으로 관계를 정리했다고 한다.
1958년 영화계 은퇴를 선언한 후 독일의 소설가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와 재혼했으며, 파라마운트 영화사 등에서 계속 영화배우로 활동했다. 영화계 은퇴 후에는 스위스로 거처를 옮겼고, 채플린 부부와 가까운 곳에서 살며 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찰스와 폴렛 사이에 낳은 자식은 없다.
  • 조앤 배리
1942년에 잠시 사귄 여성. 채플린은 이 여성을 배우로 키우려고 했는데, 배리가 정신병 증세를 보여 얼마 못가 결별했다. 배리는 이후 채플린의 아이를 낳았다며 소송을 제기했는데, 혈액형 검사 결과 친자식이 아닌 것으로 판명(유전법칙에 따라 혈액형부터 성립이 불가능한 상태[33])되었다. 하지만 법원은 배심제의 폐해인 비논리적 판단에 따라 채플린을 아이의 아버지로 인정했고, 채플린은 판결에 따라 그 아이가 21세가 될 때까지 부양해야 했다.
채플린은 이 재판에서 완전히 이미지를 구겨버렸고, 이후 비미활동위원회 조사 등과 더불어 미국에 급짜식하게되는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 배리도 소송에서 이기기는 했지만, 결국 정신병 증세의 악화로 1953년에 강제 격리되었고, 1996년에 완전히 잊혀진 채로 사망했다.
  • 우나 오닐
유명 극작가 유진 오닐[34]의 딸로 채플린의 마지막 아내이자 평생의 동반자였다. 결혼 당시 18세로 채플린과는 무려 36살 차이에다 그녀의 아버지 유진 오닐은 채플린보다 겨우 1살 많다. 결국 채플린과 결혼하면서 아버지에게 의절당했다

장녀 제럴딘(1944)[35], 장남 마이클(1946)57, 차녀 조지핀(1949)60, 삼녀 빅토리아(1951)62, 차남 유진(1953)64, 사녀 제인(1957)68, 오녀 아넷(1959)70(...), 삼남 크리스토퍼(1962)73까지 채플린의 부인들 중 가장 많은 여덟 명의 아이를 낳았고, 채플린이 미국에서 추방당하자 우나도 찰스와 함께 미국 시민권을 포기했다. 채플린보다 14년 더 살았고, 1991년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남편의 죽음을 슬퍼했다.

...이 외에 중요성이 별로 없어서 생략했을 뿐이지, 채플린과 연인 관계였던 여성은 5명(!) 정도 더 있다. 아래에 나올 마리온 데이비스도 이 숨겨진 다섯 명 중 한 사람이다.

6 가족과 자녀들

아내들은 제외했다. 위의 여자관계를 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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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찰스 채플린 시니어(Charles Chaplin, Sr., 1863-1901). 뮤직홀에서 배우 겸 코미디언으로 일했다. 1885년에 해나 힐과 결혼했다. 당시 해나에겐 시드니 존(시드니 채플린으로 바뀌어 불린다.)이라는 다른 아들이 있었다. 1889년에 부부는 찰스 스펜서 채플린을 낳았는데 바로 찰리 채플린이다. 1891년부터 별거에 들어가 찰리 채플린은 어머니가 키웠다. 그 후 다른 여자를 만나 살았지만 자식을 더 두지는 않았고 1901년에 간경변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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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해나 채플린(결혼 전 이름은 Hannah Harriet Pedlingham Hil, 1865-1928). 1885년에 첫아들 시드니를 낳았는데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1889년에는 찰리를 낳았으며 1891년에 찰스 채플린과 헤어진 뒤 뮤직홀 배우인 리오 드라이든을 만나 셋째 아들 조지 휠러 드라이든(George Wheeler Dryden)을 낳았다. 1898년부터 정신병 증세가 나타났다. 그때문에 시드니와 찰리는 어머니의 전 남편이었던 찰스 채플린을 찾아가야 했다. 그 후 해너는 요양 등을 하다가 1921년에 찰리와 시드니가 캘리포니아로 모셨고 거기에서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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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형: 시드니 채플린(Sydney Chaplin, 1885-1965). 채플린과 어머니가 같지만 아버지가 다른 형으로 찰리와 함께 자랐다. 같이 미국으로 건너갔고 채플린의 매니저 역할을 했다. 찰리는 자신의 아들 중 하나를 그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본인도 영화배우로 활약했다. 시드니는 두 번 결혼했지만 자식을 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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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동생: 휠러 드라이든(George Wheeler Dryden, 1892-1957). 영국의 배우이다. 리오 드라이든과 해너 채플린의 아들로 시드니나 찰리와는 달리 리오가 키웠다. 1915년이 돼서야 찰리와 시드니가 자신의 형이란 걸 알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 두 이부형들에게 편지를 썼지만 무시당했고 1917년에 채플린의 애인이었던 에드나 퍼비언스를 만났다. 에드나는 그를 채플린의 친척으로 생각했다고. 1918년에는 두 형들과 만나고 어머니를 만났다. 1936년에 미국으로 귀화했다. 아들인 스펜서 드라이든(Spencer Dryden, 1938-2005)은 미국의 유명 뮤지션이었다. 미국으로 건너온 뒤에 형의 일을 도왔고 라임라이트 후 채플린이 미국을 떠나자 미국에 남아 그의 사업 등을 정리했다. 말년에 FBI가 그의 형을 두고 그에게 정신적 압박을 가하는 바람에 꽤 고생하다 세상을 떠났다고. 휠러의 아들인 스펜서 드라이든은 3명의 아들을 두었고 휠러 역시 스펜서 외에 제프리 드라이든, 제시 드라이든, 잭슨 드라이든의 세 자식을 더 두었다.
  • 장남: 노먼 스펜서 채플린(Norman Spencer Chaplin, 1919-1919). 밀드레드 해리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출생 후 3일만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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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남: 찰스 스펜서 채플린 주니어(Charles Spencer Chaplin Jr., 1925-1968). 찰리가 자신과 자신의 아버지 이름을 따서 지은 아들. 리타 그레이에게서 낳은 아들로 사실상 장남이었다. 미국인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도 했다. 배우로 활동했다. 1958년에 배우 수잔 매그너스와 결혼하여 1959년 딸 수전 머리 채플린(Susan Maree Chaplin, 1959-)을 낳았으나 이혼했다. 1968년 폐색전증으로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미국 국적인지라 아버지와 달리 스위스에 가지 않고 미국에서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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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남: 시드니 얼 채플린(Sydney Earl Chaplin, 1926-2009). 형인 찰스 채플린과 마찬가지로 리타 그레이가 어머니이다. 삼촌인 시드니의 이름을 땄다. 영화와 드라마 등에서 활동했다. 《라임라이트》에서 클레어 블룸에게 관심을 보이는 젊은 군인이 바로 시드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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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보고 있는 시드니. 소파에 앉은 군인이 시드니 채플린이다. 프랑스의 배우 노엘 아담과 결혼하여 아들 스테판 채플린(Stephan Chaplin)을 낳았고 손녀인 타마라 채플린(Tamara Chaplin)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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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녀: 제럴딘 채플린(Geraldine Chaplin, 1944-). 채플린이 우나 오닐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로 오빠들과 상당히 터울이 있다. 거의 오빠들한테 조카나 딸뻘. 찰리의 자식들 중에서는 가장 유명한 편이다. 스페인 남자들과 결혼해서 딸들은 스페인 국적이다. 때문에 미국 출생임에도 프랑스/스페인 영화에 굉장히 많이 나왔다. 본인도 프랑스어와 스페인어에 능통한 편. 첫째딸인 셰인 사우라(Shane Saura)는 스페인의 영화감독인 카를로스 사우라(Carlos Saura Atarés, 1943-) 사이에서 낳았다. 제럴딘은 배우로 안나 카레니나 등에 출연했으며 스페인의 영화제작자인 파트리시오 카스티야(Patricio Castilla) 사이에서 낳은 둘째딸인 우나 채플린(Oona Castilla Chaplin, 1986-)도 스페인의 배우이다. 라임라이트에 동생 마이클과 거리의 아이들로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찰리 채플린을 분한 영화 채플린에서는 찰리 채플린의 어머니, 즉 자신의 할머니 역할을 맡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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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럴딘 채플린의 딸, 그러니까 찰리 채플린에게는 외손녀에 해당되는 우나 채플린(1986-). 스페인의 배우이다. 왕좌의 게임에 출연했다. 키 170cm로 상당히 큰 편이며 늘씬한 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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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남: 마이클 채플린(Michael John Chaplin, 1946-). 마찬가지로 우나 오닐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1960년대까지 아역배우로 활동했고 그 이후엔 배우로는 은퇴했다. 그 후엔 작가로 활동하는 듯. 딸인 카먼 채플린(Carmen Chaplin, 1977-)과 덜로리스 채플린(Dolores Chaplin, 1979-)은 영국의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2013년 현재 마이클은 채플린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고 있다. 페이스북을 하기도 한다. 그의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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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덜로리스 채플린과 카먼 채플린. 마이클은 두 번 결혼했는데 첫 아내인 패트리스와 크리스천 채플린(Christian Chaplin, 1964-), 팀 채플린(Tim Chaplin, 1966-)을 낳았고 둘째 아내인 퍼트리샤 브토디에(Patricia Betaudier)[36] 사이에 캐슬린 채플린(Kathleen Chaplin, 1975-)과 덜로리스, 카먼, 조지 채플린(George Chaplin), 트레이시 채플린(Tracy Chaplin, 1980-)을 낳았다. 아버지의 왕성한 번식욕을 빼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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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녀: 조지핀 채플린(Josephine Hannah Chaplin, 1949-). 미국에서 배우로 일하다가 1980년에 프랑스의 영화 제작자인 모리스 로네(Maurice Ronet, 1927-1983)를 만나 아들 쥘리앵 로네(Julien Ronet, 1980-)를 낳았다. 그 외에도 첫 아들 찰리 시스토바리스(Charlie Sistovaris, 1971-)가 있는데 그리스 모피상인 니콜라스 시스토바리우스(Nicholas Sistovaris)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며 막내아들 아서 가딘(Arthur Gardin)이 있다. 할머니가 이부삼촌들을 낳은 것처럼 본인도 이부형제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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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녀: 빅토리아 채플린(Victoria Chaplin, 1951-). 초기에는 영화 배우로 활동하다가 서커스에 들어갔다고 한다. 위의 사진의 남자는 남편인 장바티스트 티에레(Jean-Baptiste Thiérrée)이다. 티에르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제임스 티에레(James Spencer Henry Edmond Marcel Thiérrée, 1974-)도 서커스 연출자이다. 첫딸인 오렐리아 티에레(Aurélia Thiérrée, 1971-)는 영화 배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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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그 이탈리아 판에 나왔던 딸 오렐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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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제임스 티에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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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남: 유진 채플린(Eugene Anthony Chaplin, 1953-). 스위스에서 레코딩 엔지니어와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일하고 있다. 레코딩 엔지니어로 롤링스톤즈데이비드 보위, 등과 협업했다. 스위스의 국제코메디영화페스티벌 기획자이기도 하다. 자식을 여럿 뒀는데 딸인 키라 채플린(Kiera Chaplin, 1982-)은 영국의 배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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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키에라 채플린. 그 외에도 로라 채플린(Laura Chaplin, 1987-), 케빈 채플린(Kevin Chaplin), 섀넌 채플린(Shannon Chaplin), 스카이 채플린(Skye Chaplin), 우나 채플린(Oona Chaplin)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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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녀: 제인 채플린(Jane Cecil Chaplin, 1957-). 멕시코의 영화 제작자인 일리야 살킨드(Ilya Juan Salkind Dominguez, 1947-)와 결혼하여 오슨 살킨드(Orson Salkind, 1986-)와 오세올라 살킨드(Osceola Salkind, 1994-)를 낳았다.
  • 오녀: 애넷 채플린(Annette Emily Chaplin). 행적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육남: 크리스토퍼 채플린(Christopher James Chaplin, 1962-). 막내아들로 작곡가배우이다.

자녀들 사진을 모아놓은 곳

찰리 채플린은 영화계에도 많은 후계자를 남겼지만 생물학적으로도 굉장히 많은 후계자를 남겼다.

7 정치/사회적 논쟁거리

여자 관계와 함께 채플린과 관련해 가장 격한 논쟁이 오간 부분이 '정치적 성향'이었다. 《모던 타임즈》를 비롯한 여러 영화들에서 보여준 좌파적인 측면 때문에 종종 '공산주의자' 의혹을 받았으며, 제1차 세계대전에서 개발살났던 독일을 되살려낸 훌륭한 정치인(으로 그 당시에는 여겨진)인 힛총통을 까는 위대한 독재자가 결정적인 떡밥이 되었다.

이 때문에 미국의 우익(혹은 극우) 세력들은 채플린을 탐탁치 않게 여기기 시작했고, 모던 타임즈에서 트럭에서 떨어뜨린 붉은 깃발을 들고 휘두르며 가져가라고 소리치다가 (엉뚱하게) 파업 시위를 주도하는 장면이나[37] '순례자'를 소련 대표 신문인 프라브다에서 칭찬한 기사같은 별의별 잡다한 사례를 마구 끌어다가 빨갱이라는 증거로 만들기 위해 기를 썼다.

2차대전 종전 후에는 매카시즘으로 촉발된 '비미활동위원회'라는 병크성 심사에도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는데,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고 실형을 선고받던 다른 '피고'들과 달리 끝까지 개기는 용자 기질을 보여주었다. 심지어 같이 기소되었던 독일 망명 작곡가 한스 아이슬러를 지원해주고, 프랑스에 체류 중이었던 파블로 피카소에게 미국의 광신적 반공주의에 대한 비판과 우려를 담은 편지를 보내는 등 무고 주장 이상의 대담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순례자'나 '살인광 시대'에서 보이는 종교에 대한 신랄한 비판도 미국과 영국의 종교 관련 단체들을 자극했고, 1차대전에 참전하지 않아 '복무 기피자'로 영국 언론에서 까이기도 했다. 사실 채플린은 1차대전이 발발하자 현역을 자원했지만, 신장과 체중 미달로 탈락했다. 그리고 전쟁 자금을 대기 위한 채권 구입을 호소하는 집회에서도 자주 연설했고, 작품 목록에 나온 것처럼 아예 '채권'이라는 선전 영화를 형 시드니와 같이 만들기도 했다. 거기다 2차대전 당시에는 아들들이 현역으로 복무하기도 했다고 한다.

정치적인 문젯거리 외에 키스턴의 맥 세넷과 동료였던 트라이앵글 영화사의 토머스 인스의 죽음과 관련된 음모론에도 얽힌 적이 있었다. 1924년 11월에 미국 신문왕인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가 자신의 거대한 요트에서 주최한 선상 파티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는데, 언론에서는 인스가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보도했지만 몇몇 사람들이 '인스의 머리에 총알 구멍이 나 있었고 혈흔도 있었다'고 증언해 파문이 일었다.

요트에 승선한 이들로는 인스 외에 허스트와 그의 정부 마리온 데이비스, 채플린, 그 외 여러 저명 칼럼니스트들과 시나리오 작가, 배우들이 있는데, 이들은 하나같이 인스가 요트의 허스트에 의해 사고로 누군가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이러한 주장을 부인했다. 사건을 맡은 샌디에이고 경찰서도 인스의 사인을 심장마비로 결론짓고 수사를 종결했지만, 사건 뒤에도 허스트가 보여준 미심쩍은 행동 등이 겹쳐 잠시 떡밥이 되기도 했다.

헐리우드의 카더라 통신에 의하면 채플린이 허스트의 정부 매리언 데이비스와 불륜 관계였고, 한창 검열삭제(혹은 키스)중에 허스트와 사람들이 들어오는 바람에 들켰다고 한다. 격분한 허스트가 두 사람에게 총을 쐈는데, 그만 총알이 빗나가서(!) 엄하게 옆에 있던 토머스 인스가 맞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왜 그런 명백한 살인을 과실치사나 자살이 아닌 심장마비에 의한 돌연사로 은폐하려 했냐는 데 있다.

아무리 천하의 허스트라 할지라도 이런 은폐 전략을 실행하기는 대단히 어려웠고, 실제로 그 소문 때문에 여러 차례 조사가 진행되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인스의 심장마비사라는 결론을 뒤집을 만한 단서는 어디에도 없었고, 허스트나 기타 요트에 있던 사람들 중 누군가가 인스를 죽였다는 설은 거의 도시전설 수준의 이야기로 남아있다.

(허스트는 자신의 가문을 노골적으로 조롱했다고 생각한 오슨 웰스의 영화 '시민 케인'의 상영도 막으려고 했지만, 무위로 돌아갔다. 영화 한 편의 상영도 막지 못했는데 소문대로 살인을 은폐할 수 있었을까? 그것도 심장마비로 위장해서? 단, 허스트의 방해공작으로 인해 시민 케인이 망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사건이었으므로 그걸 저렇게 묻어버리기는 힘들었을 듯.)

어쨌든 대한민국에서는 빨갱이로 몰려서 그의 영화는 전면 상영이 금지되었다가 금지가 풀린, 공교롭게도 그의 탄생 100주년에 딱 맞춘 1989년이 되어서야 한꺼번에 여러 편이 개봉하게 된다. 당시 채플린 영화들을 단독으로 수입, 개봉하던 곳이 우진필름과 그 계열이던 씨네하우스 극장. VHS 비디오판조차도 계열인 우진비디오에서 냈는데 수입사 대표가 영화감독이자 제작자이던 정진우였다.

8 대인 관계

원체 각광받던 영화 스타였던 만큼, 주변인들도 ㅎㄷㄷ한 인물들이 많았다. 《시티라이트》의 개봉 때도 초청받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비롯해 스튜디오에 찾아와 촬영을 참관하기도 했던 윈스턴 처칠, 세계 여행 중 만난 마하트마 간디, 유럽 여행과 정주 시절 사귄 장 폴 사르트르파블로 피카소 등 몇 사람만 언급해도 장난아니다. 심지어 훗날 중국의 총리가 되는 저우언라이도 제네바에 회담하러 왔을 때 한 차례 만났다고. 히틀러를 희화한 작품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의 영화는 나치 독일 치하에서 개봉되지 못 했지만, 아돌프 히틀러는 포르투갈을 통해 밀반입된 《위대한 독재자》를 관저에서 두 번이나 보았다고 전해진다. 개인적으로 히틀러의 감상평을 듣고자 하였으나 히틀러는 이미 사망한 후여서 만나볼 기회를 얻지 못 했다.

이외에도 위의 항목에서 '인스 사건'에 언급된 신문왕 허스트도 채플린과 막역한 관계였고, 영화인들로는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던 버스터 키튼이나 막스 랭데르[38] 등과도 교우 관계를 가졌다. 특히 키튼의 경우 《라임라이트》 후반부에서 채플린과 함께 공연을 하는 피아니스트로 특별 출연하기도 했다.[39] 그리고 밑에 쓸 '음악' 항목과 관련해서 음악과 관련된 친분 관계도 있었고, 피아니스트 클라라 하스킬 등이 자서전에 언급되고 있다.

9 음악

배우 활동 초기에는 음악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하는데, 노래 외에도 바이올린첼로, 피아노를 독학 혹은 몇 차례의 레슨 등으로 익혔다고 한다. 단, 바이올린과 첼로의 경우 왼손잡이였던 관계로 줄을 역순으로 감고 왼손으로 활을 켰다. 이외에도 몇몇 자선 음악회나 가수들의 녹음 때 지휘자로 등장하기도 했고, 《뉴욕의 왕》이나 《홍콩에서 온 백작부인》의 OST 녹음을 위한 리허설이나 시연회에서도 관현악단을 지휘하는 모습을 보여준 바 있다.

자신의 영화에 음악을 직접 붙인 만큼 작곡에도 관심이 있었던 것도 분명한데, 특히 《모던 타임즈》에 나오는 '스마일(Smile)'은 원래 그냥 OST의 일부로 삽입된 연주곡이었지만, 상당한 인기를 얻어 존 터너와 제프리 파슨스가 가사를 붙여 대중가요로 만들었다. 이 가요판은 냇 킹 콜 같은 재즈 음악인들부터 팝 스타 마이클 잭슨, 클래식 테너 가수 플라시도 도밍고까지 불렀고, 지금도 계속 리메이크되고 있다. 이외에도 홍콩에서 온 백작부인의 '이것이 나의 노래(This is My Song)'도 나름대로 히트한 주제가다.

노쇠해지면서 만년에 자신의 구작 무성영화들을 재편집해 내놓을 때도 OST를 직접 작곡해 삽입했는데, 가장 마지막으로 한 작업도 《파리의 여인》에 음악을 붙이는 것이었다. 다만 채플린의 영화음악 작업은 엄밀히 말하면 초보적인 작곡 수준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이었다. 실제로 OST 작업의 기초는 채플린 자신이 어떤 곡조를 흥얼거리거나 악기로 연주해 보이는 것이었고, 이 때문에 실제로 OST를 관현악용으로 정서하기 위해서는 전문 편곡자를 필요로 했다. 가령 첫 OST인 시티 라이트의 경우 아서 존스턴이, 나머지 영화들의 OST도 막스 테르(황금광시대), 에드워드 파월과 데이비드 랙신(모던 타임즈), 메러디스 윌슨(위대한 독재자), 루디 슈래거(살인광시대), 레이 래시(라임라이트), 보리스 사르벡(뉴욕의 왕), 램버트 윌리엄슨(홍콩에서 온 백작부인) 등의 영화음악 전문 편곡자들이 따라붙어 완성시켰다.

물론 채플린 자신은 자서전에서 이런 작업을 하면서 지휘자용 총보를 보는 법이라든가 하는 전문 지식을 익혔다고 쓰고 있지만, 아무래도 작곡과 지휘, 영상과 음악의 싱크 작업 등을 혼자 할 만한 수준은 되지 못했기 때문에 늘 편곡자를 필요로 했다. 이 작업 방식은 대개 전문 작곡가들과 함께 작업하는 데 익숙했던 편곡자들에게는 상당히 고역이었는데, 각각 모던 타임즈의 편곡과 지휘를 맡았던 에드워드 파월과 앨프리드 뉴먼이 이 때문에 채플린과 대판 싸우고 때려치면서 뉴비였던 랙신이 대신 작업을 맡아 마무리지어야 했다. 하지만 랙신도 채플린이 언제고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악기를 연주하면서 받아적으라고 할 지 몰라 며칠 밤을 새우며 수면 부족 상태로 대기타고 있어야 했다고 회고했다(...).

어쨌던 OST에 들어간 음악 자체는 채플린 자신의 착상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작곡자는 채플린으로 등록되어 있고, 채플린이 아직 생존 중이던 1972년에는 영국의 팝스 오케스트라 지휘자인 스탠리 블랙이 여러 영화의 OST에서 가려뽑은 곡들을 편곡해 녹음한 헌정 앨범을 데카에서 제작하기도 했다. 채플린 사후에도 OST의 히트 넘버들이 계속 여러 형태로 편곡되어 음반으로 발매되고 있고, 영국의 작곡가 겸 지휘자인 칼 데이비스와 티머시 브록은 채플린의 OST 악보를 복원해 영화 상영과 동시에 현장에서 생음악으로 연주하는 라이브 오케스트라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10 트리비아

  • 뮤추얼 전속 시절, 요양 겸 휴가차 한 시골에 내려갔다가 거기서 '찰리 채플린 따라하기 대회'를 하길래 신분을 감추고 참가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과는 2등[40]. 1등은 누구였을까나.
  • 채플린과 히틀러는 정말 우연의 일치가 아닐 수 없는 공통점이 있다. 동갑에 생일은 채플린이 4일 일찍 태어났으며 얼굴도 비슷하게 생겼다. 이 때문에 위대한 독재자에서 채플린이 열연한 독재자의 모습은 히틀러를 빼다 박았다.
  • 그렇게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지만, 1938년에는 스페인 내전을 소재로 한 심각한 소설 '리듬'을 발표하기도 했다. 영화도 모자라 소설까지 평정하려고 한건가... 국내 시공사에서 출판한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시리즈의 80번째 권 《찰리 채플린, 희극이라는 이름의 애수》라는 책 후반부에 번역본이 실려있다. 꽤나 재미있다(!).
  • 자서전을 보면 젊은 시절 싸움 이야기가 종종나오는데, 싸움을 잘한듯 하다. 신참이라지만 프로복서랑 연습을 하는데 가지고 놀았다거나, 복싱선수하고 여자문제로 호텔방에서 싸웠는데 비겼다거나, 여하튼(자서전 내용이라 완전히 믿는데는 무리가 있지만) 주먹질에도 일가견이 있었는 듯... 권투 관련 코미디 영화도 만들었으니.
  • 워낙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업청난 업적을 쌓아 채플린에게 열폭한 영화인들이 한둘이 아니다. 심지어 스탠리 큐브릭도 "채플린 그 양반은 엄청 간단한 세트에서 간단한 카메라워크만으로 영화를 찍어댔는데 결과물이 ㅎㄷㄷ하단 말이지. 그건 마술이여" 라고 은근히 열폭했을 정도(...) 물론 이 말 한 큐브릭도 다른 영화인들을 무진장 열폭시켰다. 그런데 채플린은 영화 제작에 참여한 스탭들이 너무 꼼꼼하게 영화를 찍는다고 비난할 정도로 상당히 정교하고 치밀하게 영화를 찍었다.
  • tumblr_m3744bIjWH1qkdy8to1_1280.jpg 채플린에 대한 전기영화로 1992년작인 《채플린》이 있다. 채플린 역으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맡았는데, 당시 그는 예술적으로 유명한 대표작도 없었고, 채플린의 19~83세라는 장대한 기간을 연기하기에는 너무도 경험도 없고, 나이도 어린 20대 중반의 청년이었다. 하지만 로버트는 채플린을 완벽하게 재현하기 위한 혹독한 노력으로 열연을 펼쳐,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으며, 그 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되었다.
  • 어린 시절 찢어지는 가난을 겪은 탓인지 돈 문제에 인색한 면모를 보였다고 한다. 친구이자 유나이티드 아티스트 사의 공동 창립자였던 데이비드 워크 그리피스[41]가 잇단 흥행 실패로 빚더미에 올랐을 때 채플린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거절했다고. 현장의 스탭들과도 격의 없이 잘 어울리는 성격이었지만 일단 동업자로서의 관계가 끝나고 나면 사실상 인연을 끊는 차가운 면이 있었다고도 한다.[42]
  • 1932년 일본을 방문했다가 암살당할뻔 했다.(!) 5월 14일 고베항에 도착했고, 다음날 도쿄에서 이누카이 쓰요시 수상의 초청을 받았는데, 덴뿌라를 먹고 스모 구경을 해야한다고 약속을 미뤘다고 한다. 드디어 마중나온 아들 이누카이 다케루와 함께 스모 구경을 마치고 덴푸라를 먹으러 가는데... 그 사이 5.15 사건으로 이누카이 총리가 암살당해 버렸다! 채플린이 운이 나빴던 게 아니라 쿠데타 작당자들이 채플린의 방일을 노렸다고. 그들의 계획대로라면 이누카이는 물론이고 채플린도 문답무용으로 끔살당할 뻔했다.(...)# 하지만 채플린은 당일 저녁 영문도 모른채 새우 덴푸라 튀김을 매우 즐겼다고 한다. 자서전에 따르면 범인들은 채플린이 미국인인 줄 알고 그랬다고 한다. 상기한대로 채플린은 미국에서 활동한 건 맞으나, 엄연한 영국인이다.
  • 무신론자였다. 그런데 일설에 의하면 예수를 연기하고 싶어 했다고 한다. #[43] 물론 어느 영화에서도 예수 역을 맡지는 못했다. 사실 21세기에서도 스스로 무신론자라고 공언한 유명 배우가 예수를 연기하면 그야말로 난리가 날 것인데, 하물며 20세기 초에는...

11 어록

왜 굳이 의미를 찾으려 하는가? 인생은 욕망이지, 의미가 아니다.
하늘을 올려다보세요. 내려다보고만 있다면 절대 무지개를 찾지 못할 겁니다.

- 1928년작 "서커스"를 1969년에 다시 재상영할 때, 채플린이 작사/노래한 오프닝 곡인 "꼬마 아가씨를 높이 그네태우다(Swing High Little Girl)"[44]에서.

전쟁, 분쟁, 모조리 사업이다. "살인을 한 번 하면 악당이 되지만, 수백만번을 하면 영웅이 된다." 숫자가 정당화한다.

- 1947년작 살인광시대에서. 하지만 쌍따옴표 안의 말은 아주 예전에 베일비 포투스(Beilby Porteus) 주교에게 한 바 있다고.

난 정치인이 아니요, 정치적 신념도 없습니다. 난 자유를 믿는 사람입니다. 그게 제 유일한 정치적 이념입니다. 한편 전 최고의 애국자도 아닙니다. 우리는 극단적인 애국주의가 파시즘으로 빠질 뿐이라는 것을 히틀러에게서 배운 바 있습니다. 전 혁명을 일으키고 싶지 않습니다. 그저 영화를 더 만들고 싶을 뿐입니다.

- 1952년 12월 23일, 가디언지에 실린 "채플린 씨의 답변(Mr. Chaplin's Defense)"에서 채플린이 자신의 재입국 허가가 무효화되었다는 선언을 듣고 저널리스트에게 한 답변. 당시 매카시즘이 얼마나 지독했는지 볼 수 있었다. 이 재입국 허가의 무효화는 말 그대로 국외추방를 다르게 표현한 것이었다.

해파리[45]에게도 삶은 아름답고 멋진 것이란다. (중략) 문제는 네가 싸우지 않는다는 거야. 포기해 버렸지. 하지만 죽음과 마찬가지로 피할 수 없는 게 있단다. 그게 삶이야. 지구가 돌게 하고 나무가 자라게 하는 우주의 힘을 생각해 보렴. 네가 용기와 그것을 사용할 의지만 있다면, 같은 힘이 너에게 깃들일 거야.

- 1952년작 《라임라이트》에서, 테리(클레어 블룸 분)의 "무엇을 위해 싸우란 거죠?"란 질문에 칼베로(채플린)가 한 대답.

나에겐 딱 하나, 그것만이 남아 있는데 바로 '광대'이다. 덕분에 어느 정치인보다 더 높은 비행기를 타게 된다.

- 1960년 6월 17일, 런던의 "옵저버(The Observer)"지에서 인용된 말.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 1977년 12월 28일, 가디언(The Guardian) 지에서 그의 사망 소식을 전할 때 인용한 말.

과거? 지나고 나면 결국 전부 웃어서 넘길 수 있는 것들 뿐이지!
거울은 내 가장 친한 친구다. 내가 눈물 흘릴 때 절대 웃지 않기 때문이다.
  1. 영화사 최초로 정식 2등급 기사 대영제국 훈장인 KBE를 받은 영화인.
  2. 동시대 영화감독인 하워드 혹스와 하루 차이로 타계했다.
  3. 메리 픽포드같이 무성 영화시절 톱스타들은 흔히 은막의 세대(Generation of silent) 라고 부른다.
  4. 찰리의 자서전에 의하면 아버지라는 자각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어머니 한나와 이혼한 이후 법정으로부터 자식을 양육하라는 책임을 졌음에도 찰리와 시드니에게 땡전 한 푼 주지 않았다. 한나가 정신병원에서 나와 찰리&시드니와 재회한 후에서야 약간씩 돈을 보내줬다고 한다. 또한 찰리는 아버지가 죽기 몇 주 전에 술집에서 아버지와 만났는데 아버지가 (아마도 술김에) 일평생 유일하게 아들을 껴안고 키스했다고 회고했다.
  5. 처녀적 이름은 해나 해리엇 페들링엄 힐(Hanna Harriet Pedlingham Hill)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정신병원 이야기밖에 없지만 이래뵈도 채플린 배우 가문을 세우신 분이시다. 본문 아래를 보면 채플린의 수많은 자식들을 볼 수 있다. 참고로 일찍 죽은 아버지 찰스와 달리 찰리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기에 그녀의 장례식은 할리우드에서 치러졌고, 무덤은 호숫가에 있다.
  6. 채플린의 자사전에서 자신은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다니며 극단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보았는데, 어느 날은 어머니가 상한 목으로 노래하다 삑사리가 나서 욕을 먹어서 어머니를 대신하여 무대에 오르게 되었고 이 때 채플린은 어머니의 쉰 목소리를 흉내낸 연기를 하여 주점의 군인들한테 돈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다만 채플린은 이런 연기를 한 것에 대해 어머니에게 죄송스러운 마음을 가졌다고. 이 일화는 채플린의 자서전을 토대로 만든 1992년작 영화 "채플린"에서도 묘사되었다. 거기서 해나의 손녀인 제럴딘 채플린이 자신의 할머니인 해나를 연기했다.
  7. 이 시절의 구빈원이나 정신병원은 문자 그대로 개판이었다(수정바람). 전두엽 절제술이 나타는 것도 이 무렵. 자세한 것은 정신병원 항목을 참고.
  8. 이 때 채플린은 세넷의 태도가 실망한 듯 보여서 소심한 성격에 "난 안 될거야 아마"라며 가기를 주저했는데, 3일째 되는 날에 "왜 안 와!"라는 전화가 걸려와서 당장 갔다는 루머(확인바람)가 있다.
  9. 즉 슬랩스틱, 몸개그에만 치중했다. 어째 모 감독과 묘하게 비슷해 보인다.
  10. 베니스는 이탈리아의 도시 베네치아가 아니고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지역 이름이다.
  11. 여기에서 채플린은 떠돌이 캐릭터가 아닌 고전적인 사기꾼 캐릭터로 나온다.
  12. 영화표 값이 싸지면서 노동자들도 자주 극장에 갈 수 있게 되었다.
  13. 이 대회에 본인이 출연해서 1등을 못 했다는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심심하면 나오는 이야기. 히든싱어2에서 신승훈이 우승을 못할 때도 이 이야기가 잠깐 나왔다.
  14. 나중에 채플린은 유나이티드 아티스츠로 이적한 뒤 또 새로운 스튜디오를 만들었고, 퍼스트 내셔널 시절 건립한 스튜디오는 무성영화 코미디계의 또 다른 전설 중 한명인 버스터 키튼의 전용 스튜디오로 쓰였다.
  15. 여담이지만 영화 도중 나무로 분장한 채플린과 뚱뚱한 독일군 병사의 추격전은 스튜디오가 아니라 야외(미국의 어느 황무지)에서 찍었는데, 독일군 병사가 파이프에 끼여버리자 도끼로 파이프를 부수고 빼낸다. 문제는 이 파이프가 채플린 것이 아니라 미국 정부의 소유였다는 것. 말 그대로 빼도 박도 못할 공공기물파손죄. 웃긴 건 미국 정부는 채플린이 죽을 때까지 파이프가 파손된 걸 몰랐다고 한다.
  16. 채플린은 친구 페어뱅크스의 제안으로 다른 극장에 연극을 보러 갔는데, 어른과 아이(재키 쿠건 부자(父子))가 나와서 연극을 하는 걸 보고 감명을 받아 '키드'를 구상했다. 그런데 '재키 쿠건'은 이미 다른 극장과 계약을 한 상태. 좌절하는 채플린에게 다음 날 캐스팅 매니저가 달려와서는 이렇게 말했다. "그 재키 쿠건, 아버지 쪽이랍니다." 그래서 당장 아들 재키 쿠건과 계약에 들어갔다고. 즉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이름을 쓰는 경우 때문에 생긴 해프닝. 그러나 이름이 같은 것과 달리 정작 쿠건은 쿠건 시니어의 친자가 아니었다고 한다. 참고로 이 재키 쿠건이 '쿠건 법'의 주인공으로, 키드의 유명세로 얻은 막대한 돈을 쿠건의 부모가 싹 날려 버려서 사회적 이슈가 되고 이로 인해 쿠건 법이 제정되어 아역 배우의 수입을 부모가 전부 낭비하지 못하게 되었다.
  17. 후에 다시 발성 영화로 재개봉했으나 역시 망했어요.
  18. 그것도 가장 힘들었던 밧줄타기 장면이었다!
  19. 채플린 영화의 전속 카메라맨이었던 롤란드 토테로는 이 불타는 장면을 필름에 담았는데, 불타는 스튜디오와 낙담해 주저앉아 있는 채플린의 모습은 이후 예고편에서 잠시 활용되었다.
  20. 다만 재즈 싱어는 부분 유성 영화였고, 최초의 완전 유성 영화는 "Lights of New York"라는 폭력물이었다.
  21. 여담이지만 실제로 유성 영화의 도입으로 인해 불가피한 은퇴를 한 배우들이 정말 많았다. 이미지와 목소리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예를 들어 채플린의 <황금광 시대>의 여주인공 조지아 헤일 등이 있다.
  22. 당시 FBI는 채플린의 옛 직원들부터 시작해서 전처 밀드레드 해리스까지 심문했는데, 무려 20시간 이상 걸친 조사에도 불구하고 해리스는 끝까지 채플린을 옹호했다고 한다.
  23. MI-5는 그가 런던 출신인지 그의 본명이 무엇인지를 판명하는 데 실패했다고 한다. 그는 영국에서 태어나지 않았거나, 태어날 당시의 이름이 제시된 것 중에 없다.'라고 결론내리고 조사를 종결했다. 결국 그의 출신은 오늘날까지도 미스터리인 셈이다. # 사실 그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빈민가 출신의 소년에 대한 출생 기록등이 부실해도 딱히 이상할 것도 없다.
  24. Israel Thornstein. 전형적 유태인식 이름이다. 여담으로 당시 채플린의 가짜 전기들이 무수히 많이 돌아다녔는데 그 중 와일더 부인의 작품으로 알려진 채플린의 가짜 전기가 가장 유명했다. 퐁텐블로 출신설이나 유태인설은 이 전기에서 나온 내용이다.
  25. 180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 초반까지 상당히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사회주의 활동을 했다. 그들 대다수는 나름대로 교육도 잘 받은 재원이었으며, 사회주의를 이상적인 이념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많았다.
  26. 원제는 그냥 '베르두 씨 Monsieur Verdoux'였다. 국내 번역 당시 황금광 시대의 영향을 받은 듯 싶다.
  27. 물론 실제로 구두끈을 먹은 건 아니고, 영화에서 나온 구두는 감초로 만든 가짜 구두와 구두끈이다. 이걸 먹고 찰리 채플린과 동료 배우 맥 스웨인이 3일간 복통에 시달렸고 한다.(...)
  28. 채플린 최고 걸작 하면 보통 꼽히는 작품이 시티라이트, 모던타임즈, 위대한 독재자다. 채플린 최고의 흥행을 거둔 작품도 1940년작인 유성영화 위대한 독재자. 게다가 비평으로는 살인광시대와 라임라이트까지도 걸작 소리를 듣는다. 뉴욕의 왕과 홍콩에서 온 백작부인은 다소 평가가 낮은 편.
  29. 미국 영화 연구소(AFI) 10대 로맨틱 코미디 영화 선정 1위.
  30. 작중에서도 공산주의자 왕이라니! 하면서 어이없어 한다.
  31. 위대한 영화감독들의 기상천외한 인생이야기 중 발췌
  32. 채플린과 밀회를 시작한 때는.. 무려 12살이었다(...)
  33. 추정父인 채플린은 O형, 베리는 A형...애는 B형. 친자라면 A형과 O형만 나올 수 있다.
  34. '느릅나무 밑의 욕망'이 가장 유명하다.
  35.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영화배우의 길을 걸었다. 《닥터 지바고》의 영화판에서 주인공인 유리 지바고(오마 샤리프)의 아내 역할을 맡았고,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주연으로 출연한 아버지의 전기 영화에서는 채플린의 어머니 해나 역을 맡았다. 딸인 우나 채플린도 배우로 활동하면서 왕좌의 게임 등에 출연하고 있다.
  36. 프랑스인으로 보인다. 카르멘과 돌로레스는 프랑스 영화에 나오기도 한다.
  37. 덧붙이자면 《모던 타임즈》의 공장 장면이 영화 "우리에게 자유를"의 장면을 도용했다는 얘기도 있었다.
  38. Max Linder 1883~1925 프랑스영화 초창기 최고의 인기 코미디언. 채플린보다 몇년 일찍 데뷔해서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의상이나 연기스타일 면에서 채플린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프랑스 사회 분위기가 비관적으로 바뀌면서 랭데르의 인기도 추락. 미국 진출등을 시도했으나 전부 실패하고 실의에 빠져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39. 키튼은 채플린이 영화를 만들 때 시계공 마냥 정교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40. 3등이었단 얘기도 있다. 매체마다 결과가 다르다.
  41. <국가의 탄생>, <인톨러런스> 등을 감독한 미국영화 초창기의 거장.
  42. 위대한 독재자까지 25년을 함께 일했던 촬영감독 롤리 토더로의 증언. 독재자 완성 이후 새 촬영감독과 계약한 뒤로는 거의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43. 그런데 본 출처의 내용은 상당히 의심스럽다. 일단 채플린은 유대인이 아니다.
  44. 구글링 결과 High는 들어가기도 하고 안 들어가기도 한다.
  45. "의지가 약한 사람"이라는 뜻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