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훈병원

報勳病院

1 개요

국가를 위해 희생한 국가유공자들과 그 가족의 진료와 재활을 위해 설립된 병원이다. 국가보훈처 산하 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에서 5개 보훈병원을 운영한다. 중앙보훈병원은 1953년 전쟁 시기 대구에서 처음 문을열었다. 1961년 국립원호병원이 구로구 오류동에 들어선 뒤 1974년 종합병원이 되고 1981년 원호복지공단 설립, 1983년 둔촌동 이전, 1985년 한국보훈병원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몇차려 운영 공단의 이름과 병원명이 바뀌었다. 부산광역시, 대구광역시, 대전광역시, 광주광역시에도 보훈병원이 있다. 인천광역시에도 들어설 예정이다.

현재 강동구 둔촌동에 있는 중앙보훈병원까지 서울 지하철 9호선연장될 예정이다. 그 전까지는 잠실역, 천호역발 무료셔틀버스나 서울 버스 351, 서울 버스 강동01을 이용하자.

예약의 경우 방문 예약이나 전화 예약을 해야 되며물론 예약하는데 2달이나 걸리고 MRI 찍는데 3달 걸린다는게 함정 국가유공자와 보훈보상대상자 등은 상이처의 경우 무료로 진료받을 수 있다. 국가유공자 직계가족의 경우에는 무료는 아니지만 큰 폭의 할인 혜택이 주어진다. 이 혜택은 보험 비보험을 가리지 않으므로 일반 병원에서 비보험으로 분류되는 치료(대표적으로 치과 충치 치료)를 받을 경우 대단히 유리하다. 단점은, 사람이 무지막지하게 많기 때문에 몇 달씩 기다려야 하는 일이 부지기수다.

국가유공자 대상 병원이다 보니 아무래도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 많다. 젊은 사람들은 국가유공자의 직계 자녀들이나 아니면 보호자 정도.

최초 시설은 1983년에 지은 것을 별다른 개수 없이 20년 넘게 사용하다 보니 노후화가 많이 되어 있었고, 건물도 협소했기 때문에 병상 및 진료공간, 주차공간도 많이 부족했다. 그러나 2011년 병원 옆 운동장 부지에 높다란 새 건물을 올리고 그곳으로 본관을 옮기고, 기존 건물도 싹 리모델링을 했기 때문에 병상과 진료공간도 많이 늘어났고 시설도 현대적이 되었다. 그래도 사람이 많다...

여담으로 배창호 감독의 1987년작 영화 <기쁜 우리 젊은 날>에서 안성기가 보훈병원 1층부터 3층까지 구석구석 헤매며 사람을 찾아 다니는 장면이 롱테이크로 나온다. 그 당시의 병원풍경을 볼 수 있다.

2 사건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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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훈병원은 의약분업 전부터 관치행정과 뿌리깊은 부정사건으로 구설수에 오른 적이 많았다. 수련의 전공의들은 원하는 과에 떨어지다 떨어지다 갈 데가 없으면 이 병원을 지원한다 했으며, 4년제 간호사들은 3년제 전문대출신 간호사들 및 간호보조원들에게 비상식적인 언행을 견뎌내지 못하고 사표를 쓰며 약사들은 보훈처소속 친인척 보조원들에게 폭언을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병원이었다. 문제는 상부관리자들이 이런 실태를 알고도 방치하며 문제개선을 안하는 데 있었다.

1990년대 초 같은 날 출산한 신생아들이 바뀐 사실이 20년이 지나 밝혀져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1997년 7월 병원발전시설이 꺼져버려 업무가 마비되었다. 환자들의 항의와 환자불편이 빗발쳤다.

1997년 3월 약제부에서 소아과 의사가 잘못 처방한 orfil시럽이 잘못 투약 나가서 영유아가 3일간 사경을 헤맸다.[1]

1997년 4월 albumin 주사제 과량반출 부정사건으로 보훈처에서 경고받았다.[2]

대표적인 부정사건으로는 1998년10월 소속약제부 수령인 김진애(이대약대졸)부장이 도매상신용산과의 뇌물 수수사건으로 구속기소 e된 사건이 있다. 위 소아과 사고에서도 알 수 있듯이 김부장은 공은 가로채고 책임은 미루는 전형적인 악질상관으로 약사들에게 원성이 자자했다. 약제부부장으로서 인력의 감사 및 업무분담협조는 방치한 채 개인적 치부로 판명되어 직위해제되고 구속수감되었다.

본디 국립병원의 입찰과정에서 문제가 많았던 보훈병원은 도매상 신용산이 직접 부장이었던 개인과 입찰을 용이하기위해 뇌물을 준 것으로 판명되었다. 한 두번 받은게 아니라 1995년부터 1998년까지 달마다 수백만원씩 떡값내지 월급식으로 뇌물을 챙겨 업체직원들의 제보로 발각되었다. 김진애 부장은 19년간 보훈병원에 재직했으나 부장으로서의 업무관리는 방기한 채 편중된 인사와 병원약사들의 과도한 업무를 노와주려는 노력은 무시한 채 비약사들의 청탁과 고위층 내지 이사장 친인척 직원들의 편의를 보아준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또한 약제부 보조원들을 제대로 관리못한 채 상부보훈처직원들의 눈치를 보는 인사와[3] 학연 지연에 편중된 업무관리를 해와 약제부약사들의 비난을 샀다. IMF당시 이 병원도 인력감원을 했으나 당시 약제부장이 보훈처에 인맥이 친인척으로 있는 보조원들은 손을 못대고 배경이나 지인이 없는 약사들을 상대로 사소한 트집을 잡아 감원내지 면직시킨탓에 약사들의 원성과 불만이 자자했다. 오죽하면 보훈병원은 의사 약사가 아니라 허드렛일하는 보조원들 천국이라는 말까지 있었다.[4] 장기상이용사들의 내원 환자들로 업무강도와 피로가 누적된 약제부약사들은 불만의 표시로 상관인 김진애약사 구명운동을 거부하고 새 부장의 발령조치를 요구하였다. 후덕하게 하면 후덕하게, 악하게 하면 악하게 돌아온다는 흔한 사례라고 하겠다.

2004년~2005년에는 약제부입찰 신용산과 또 뇌물 스캔들이 불거졌다. 이때 검찰수사가 흐지부지되어 서울보훈병원의 약제부장은 달마다 계좌로 들어온 돈을 빌려준 돈이라고 잡아떼어 대구보훈병원 약제부장 백모씨만 구속되었다.

의사들도 툭하면 기기도입이나 기타 리베이트에서 종종 걸려 실형을 선고받는 경우도 있었다. 그 결과 이 병원은 검찰청 단골메뉴로 인사청탁과 뇌물수수라는 불명예로 걸리게 되었다.

그리고 병원규모를 늘린뒤 의사 .약사 .간호사등 실무를 할 인 전문인 채용 및 선발에는 인색하고 쓸데 없는 사무직 직원만 늘린다는 비판 외에 보훈처예산이 엉뚱한 데로 흘러 들어간다는 제보와 불만이 국정감사에서 빠지지 않고 지적되고 있다. 실제로 2012년 국정감사시 모 국회의원이 병원직원중 보훈처 친인척이 너무 과다하게 많다는 항의에 보훈처장이 병원 특색상 할 수 없는 일이라며 답변하기도.
  1. 당시 김진애부장은 면책 받고 최용순과장이 경위서를 씀
  2. 역시 최용순과장이 경고처리
  3. 보조원 김정문은 약사들에게 폭언과 망언을 수시로 퍼붓는 문제직원이었다. 김혜란 약사(중양대졸)의 뒷배경세를 믿고 업무를 태만히 하였다.
  4. 당시 정부부처의 주도로 국공립 및 위탁관리 병원들이 민영화 선진방안으로 정직원을 줄이고 계약직 내지 임시직 직원을 늘리며 직원수를 줄이는 계휙에 착수해 있었다. 그결과 의사 몇 명 약사몇 명 식으로 감원하라는 지시가 내려온 상태였다. 또한 보훈병원내 타 직원들도 해고 용역조치해 노조의 반발이 많았으나 현재까지 이 병원이 가장 정부의 지시를 잘따른 병원으로 판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