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사 3층 석탑

모형탑으로는 들어올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국보
20호
경주 불국사 다보탑
(慶州 佛國寺 多寶塔)
21호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
(慶州 佛國寺 三層石塔)
22호
경주 불국사 연화교 및 칠보교
(慶州 佛國寺 蓮華橋 및 七寶橋)
대한민국의 국보
National Treasures Of Korea
공식명칭한글경주 불국사 삼층석탑
한자慶州 佛國寺 三層石塔
영어Seokgatap
분류번호국보 21호
소재지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시 불국로 385, 불국사
분류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탑
시설1기
지정연도1962년 12월 20일
제작시기통일신라, 751년

1 개요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進峴洞) 불국사 경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화강암 석탑.

정식 명칭은 불국사 3층 석탑이며 이러한 이름이 현대에 와서 붙은 것이니만큼 석가탑이라는 건축 의도를 담은 이름이 더 많이 쓰이고 있다. 혹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이라고도 하며, 아사녀의 전설로 무영탑(無影塔, 그림자가 없는 탑)이라 불린다.

2 상세

일반적으로 김대성이 불국사를 창건(혹은 중창)했을때 건설된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구체적으로 751년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연대이지만, 석가탑 중수기를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742년에 완공되었다고 볼수도 있다고 한다.

직선미와 균형감으로는 한국의 석탑 중에서 최고로 꼽힌다. 아닌 게 아니라 이 '균형'의 기준이 석가탑으로 잡히는 경우가 잦다. 신라시대 3층 석탑의 완성형. 비례 뿐만이 아니라 크기에 있어서도 기준이라고 할 만한 탑이라서 석가탑보다 좀 더 빨리 만들어진 감은사지의 석탑을 보면 왠지 너무 크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같은 불국사 안에 있는 다보탑과 비교해도 다보탑이 화려한 느낌을 주는 데 비해 석가탑은 담백하면서 세련된 맛이 있다. 운수 좋은 날로 유명한 소설가 현진건수필 "불국사 기행"에서 다보탑을 예쁘고 화려하게 치장한 미인 즉 성장미인(盛裝美人)으로 석가탑을 기초화장에 수수한 옷을 입은 미인 즉 담장미인(淡粧美人)으로 비유했다. 현진건은 이 수필 외에도 석가탑을 소재로 아사녀 설화에 기초한 소설 '무영탑'을 썼다.

고려시대에 지진으로 두번이나 무너져서 1024년과 1038년에 중수했다.

전설에는 백제 출신 석공이 건설했다고 하지만 전설은 전설일 뿐이다. 통일신라의 석탑 자체가 백제 양식의 영향을 받기는 했다지만, 이미 이 시기에는 감은사지의 석탑 등을 거쳐 통일신라의 석탑 양식이 완성된 시기이기 때문이다. 불국사 석가탑은 통일 신라인들의 미의식이 집약된 석탑의 결정체이자 전형이다.

반면 바로 옆의 다보탑은 양식적으로 매우 독특하면서도 고립되어 있다. 이 탑은 부분적인 영향은 짐작할 수 있지만, 전체적인 양식에서는 이전과 이후의 탑에서 유사한 예를 찾을 수 없다.

3 아사녀 전설

널리 알려진 설화로 아사달, 아사녀의 전설이 있다. 백제 출신의 석공 아사달이 신라에 초청되어 석가탑을 짓게 될 때 아사달과 사랑하는 사이였던 아사녀는 신라에 찾아갔으나 건축 현장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이에 석가탑이 완성되면 영지(影池)라는 연못에 그림자가 비칠 것이라는 말에 아사녀가 찾아갔으나 탑이 보이지 않자 그녀는 강에 스스로 몸을 던져 자결했다. 아사달은 뒤늦게 그 소식을 듣고 영지 주변에서 아사녀를 찾다가 그녀가 자결하기 전 벗은 짚신을 보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이 전설은 현진건의 소설 '무영탑'의 영향을 받은 이야기로 원래의 설화와는 전혀 다르며 아사녀는 아사달의 누이동생이었고 탑에 그림자가 비치지 않은 것으로 끝일 뿐 자살했다는 비극적 결말은 소설의 내용일 뿐이라고 비판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은 설화가 시대에 따라 변화해 왔음를 고려하지 않아서 다소 지나친 것이며, 아사달이라는 이름이 현진건의 소설에서 유래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비판의 주요한 근거가 되는 것은 일본의 도쿄도서관에서 소장중인 '화엄불국사고금역대 제현 계창기'에 기록된 설화의 내용으로 여기서는 석공의 이름은 전하지 않으며 당나라 사람이라고만 밝히고 있고, 그를 찾아 온 사람은 누이동생의 이름이 아사녀(阿斯女)라고 언급하고 있는 거로 보아 분명히 이 내용이 설화의 원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 일제시대에 기록된 경주의 설화에서는 석공이 백제 출신으로 아사녀가 석공의 아내로 언급되며 탑 그림자가 비치지 않자 아사녀가 몸을 던져 자결했고 석공도 불상을 조각한 후에 연못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 (#). 즉 일제시대에 아사녀 설화는 이미 아사달이라는 이름을 제외하면 현재 널리 알려진 내용과 거의 차이가 없다.

4 이모저모

1966년 도굴꾼들이 도굴하다가 미수에 그쳤고, 그 과정에서 탑을 훼손시켜 탑을 수리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도굴된 층 외의 다른 층에서 사리함이 발견되었으며, 사리함 안에서 나온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로 알려져 있다. 중국에서는 정황상 빠르면 후한, 늦어도 수당 교체기를 전후해 목판인쇄가 시작했을 거라 주장하고 있고 이능화의 조선불교사에서는 백제 성왕 때 승려 겸익이 인도로 유학갔다 돌아온 후 불경을 목판으로 인쇄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어느 쪽이든 실물이 전해지지 않으므로 석가탑에서 나온 이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 유물로 공인받고 있다.

함께 들어있던 중수기의 내용이 알려지면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고려시대 중수할 때 넣은 것으로 보는 설이 생겨났으나,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지진 당시 외사리함만이 깨지고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들어있던 내사리함은 멀쩡한 상태였던 것으로 결론을 내려 통일신라 설의 손을 들어주었다. 참고로 도굴하려고 했던 도굴범들은 잡혔으며, 놀랍게도 황룡사지를 도굴했던 도굴범들이었다.

사리함이 발견되기 전에 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옥개석이 추락해서 탑이 크게 손상된 것은 한국 문화재 사(史)의 커다란 오점으로 남아있다. 어이없게도 이 때 탑을 해체할 때 쓰인 게 크레인 같은 전용 기계도 아니고 나무 전신주로 지주를 세워서 옮겼는데, 이 전신주 속이 썩어서 그만 부러져서 탑 옥개석이 떨어져 버렸다. 문화재에 대한 인식부족도 있겠지만, 당시 변변한 장비조차 없었던 가난한 국가 사정을 보여주는 일화. 오히려 도굴범 쪽이 황룡사지 도굴에도 썼던 체인블럭과 유압잭 등의 장비들을 투입했지만 이쪽은 석가탑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다. 다행인...가?[1] 그리고 옥개석 손상 사건에 묻히지만 또 다른 파손 사건도 있었다. 사리함 내에 있던 사리병을 승려가 옮기다가 그만 떨어뜨려서 산산조각나고 말았으며 다행히 파편을 모아서 이어붙여 복원에는 성공했다.

오랜 세월동안 석가탑의 상륜부에 있는 금속 장식들은 없어졌지만, 실상사 삼층 석탑의 상륜부를 복제해서 석가탑에 달아주었다. 다만 단정한 석가탑에는 안 어울린다는 평도 있다.

2010년 안전 점검 과정에서 기단과 몸돌에 균열과 기울어짐이 발견되어 2013년 5월 16일에 보수를 위한 해체작업을 시작했다. 이 공사는 2015년 12월 31일까지 진행되기로 했으나 다소 연기되어 2016년 5월 14일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마무리되었다. #

5 관련 항목

  1. 이때문에 석가탑 상부가 기울어져 붕괴 직전까지 몰려서 급하게 해체작업을 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