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은사

感恩寺(址)
Coiled Temple

1 개요

아! 감은사, 감은사탑이여. 아! 감은사, 감은사탑이여. 아! 감은사....

- 유홍준나의 문화유산답사기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55-1번지에 소재한 통일신라 시대의 사찰....은 훼이크고, 현재는 건물 터와 감은사지 3층 석탑(국보 제 112호) 둘 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터만 남아있기에 현재는 감은사지라고 불린다. 사적 31호. 문무대왕릉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만큼 문무왕과 관련된 전설이 남아있는 절이다.

2 가람

통일신라의 대표적인 가람배치인 2탑식(2탑 1금당식)이며, 그에 따라서 석탑이 두 개가 세워져 있다. 강당도 있지만 절 자체는 그리 큰 편은 아니다. 두 개의 탑은 사진으로 보면 꽤 작아보이지만 막상 실제로 보면 생각보다 크다. 특히 주변이 허허벌판이라 상대적으로 두 개의 탑(과 탑 정중앙에 꽂혀있는 침)이 더욱 두드려져 보인다. 생긴 것은 불국사 석가탑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크기는 훨씬 크기 때문. 원래 석탑 문화가 빈곤했던 신라가 백제 미륵사의 거대한 석탑을 받아들이는 도중에 있는 과도기적인 탑으로 추측된다. 그 때문에 통일 신라 시기의 석탑 중에는 가장 크다.

3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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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사의 복원 모형.

창건 연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신라 제 35대 경덕왕 18년(서기 759년)에 "감은사성전"을 "수영감은사사원(修營感恩寺使院)"으로 개칭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봤을 때, 그 이전인 7세기 말이나 혹은 8세기 초에 설치된 듯하다. 일반적으로는 만파식적에 얽힌 전설 때문에 신라 제31대 신문왕이 부왕인 문무왕의 뜻을 이어 창건하였다고 추측되고 있다. 감은사는 언제 폐사되었는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이 된 문무왕을 모시기 위해 세워졌다고 하였는데, 발굴 조사 결과 사실인 것으로 드러났다.

문무왕은 해변에 절을 세워 불력으로 왜구를 격퇴시키려 절의 이름을 진국사(鎭國寺)라 하였으나, 절을 완공하기 전에 위독하게 되었다. 문무왕은 승려 지의법사에게 "죽은 후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킬 것"을 유언하고 죽자, 이에 따라 화장한 뒤 동해에 안장하였으며, 신문왕이 부왕의 뜻을 받들어 절을 완공하고 감은사라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 절을 완공하면서 금당 아래에 용혈을 파서 용으로 변한 문무왕이 해류를 타고 출입할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감은사지의 부근인 동해바다 가까운 곳에는 문무대왕릉으로 알려진 작은 바위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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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터에 대한 70년대의 발굴 결과 용이 된 문무왕이 물길을 따라 감은사에 도달할 수 있도록 절의 금당 밑에 공간을 만들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절의 금당 건물 밑을 인공 연못으로 만들어 물을 채워놓고는 그 위에 돌을 쌓아서 건물을 세웠던 것이다! 한국 사찰 중에서도 대단히 특이한 구조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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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이런 걸 본 적이 있나?

그런데 감은사 근처에는 바다가 없어서 물길이 감은사지 앞을 흐르는 대종천이라는 강과 연결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2007년 대구문화방송에서 창사 특집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감은사 앞을 파서 토양 분석을 의뢰한 결과 창건 당시에는 감은사 바로 앞까지 바다가 있었던 증거가 발견되었다. 천년 넘게 흙이 쌓이면서 바다가 감은사에서 점점 멀어진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고증 결과,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서는 682년설을 정설로 채택해 문제를 내고 있다.

그 밖에는 동탑과 서탑에 '팔'이라든지 세모 같은 긁어서 생긴 낙서 자국들이 여기저기 보이는 게 특징. 어두울 때 가면 간접조명이 비쳐서 매우 눈에 띈다. 낙서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는 근현대 생긴 것도 있겠지만 감은사가 지금처럼 폐허로 바뀐지가 오래 되었으므로 낙서 등도 상당히 오래되었을 가능성이 적지않다. 아무튼 문화재청에서도 당연히 누구보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고, 다만 보수를 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훼손이 일어날 수 있음을 우려해 현장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아래는 문화재청 입장.

안녕하십니까. 우선 문화재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우리 청 홈페이지를 방문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귀하께서 지적하여 주신 동서 삼층석탑의 낙서는 동,서탑 보수정비 및 2008년도 국고보조사업으로 시행한 보존처리 시에 이미 확인 되었던 것입니다. 이 낙서는 석탑 자체를 파서 생긴 훼손으로 다른 재료로 처리 등을 시행할 경우 또다른 원형 훼손의 우려가 있으므로 당시 관계전문가들의 의견 등을 종합 검토하여 현재 상황으로 유지되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귀하의 지적에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문화재청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 부탁드립니다.

답변이 2013년도에 있었으므로 그 이후 전개 과정은 추가바람.

4 만파식적

삼국유사에는 감은사와 문무왕에 얽힌 만파식적이란 악기에 대해 자세히 나온다. 신문왕이 즉위 직후 아버지 문무왕을 위해 감은사를 지었는데, 그 뒤 신문왕 2년에 신문왕이 동해에서 해룡이 된 문무왕에게 만파식적이란 피리를 받아와서 불어봤더니 외적이 데꿀멍하고 나라가 평안해지더란 이야기. 결국 잃어버린 것으로 이야기는 끝맺는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대금의 원류로 이 만파식적을 소개하면서 괴이해서 못 믿겠다고 평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고. 아무튼 이 전설이 감은사의 창건 시기를 신문왕으로 추정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되고 있다.

5 교통

경주시내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감은사지를 통과하는 경주시버스 노선은 총 3개 노선이다.
130번 - 3회
150번 - 60분
150-1번 - 4회

경주시내~감은사지 : 150번
보문단지~감은사지 : 150-1번

6 기타

참고로 바닷바람도 마시고 근처에 있는 문무대왕릉이견대까지 같이 볼 생각이라면 모를까 감은사만 보러 가는 것은 비추다. 가보면 다 알겠지만 절터 자체가 협소하고 볼 거리가 석탑 2기와 법당 터 하나가 전부이다!!! 교통도 불편한 오지[1]에 위치하고 있으니 감은사에 미련이 없다면, 차라라 오고가고 하는 시간에 경주 시내에 가까운 남산이나 둘러보는 것이 비용 대 효용 비에서 더 낫다.근데 경주 스탬프 투어를 완수하려면 가야 된다는 물론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같은 책을 보고 필이 꽂혀서 오는 것이라면 말리지는 않지만... 유홍준은 숫제 대놓고 책 처음부터 끝까지 "아! 감은사, 감은사탑이여..."로 채워버리고 싶다고 써놨다 경주 동부 동해안 지역이 경주 시내와 거리가 상당히 멀고 경주 버스 150 등 대중교통의 배차간격이 매우 긴데다, 지도상으로 보면 바로 옆에 있는 것 같은 문무대왕릉, 이견대, 읍천 주상절리 모두 상당히 떨어져있다.

  1. 2014년 12월 30일 4번 국도의 개통으로 가기가 편해졌다. 그래도 경주시내-불국사-4번국도-감은사로 이어지는 거리가 꽤 멀기 때문에 계획을 잡고 움직이는게 좋다. 참고로 4번 국도가 감은사, 문무왕릉과 이어진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2016년 완공되는 한국수력원자력 본사로 가는 용도로 만들어진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