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實相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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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국보 National Treasures Of Korea | ||
공식명칭 | 한글 | 남원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 |
한자 | 南原 實相寺 百丈庵 三層石塔 | |
영어 | Three storied stone pagoda in front of Baekjangam Hermitage, Silsangsa, Namwon | |
분류번호 | 국보 10호 | |
소재지 | 대한민국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975 | |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탑 | |
시설 | 1기 | |
지정연도 | 1962년 12월 20일 | |
제작시기 | 통일신라시대, 828년 |
1 개요
지리산 북쪽 남원시에 위치한 신라시대의 사찰. 호국사찰로 잘 알려져 있다.[1] 현재는 매우 아담한 절로, 쌍 석탑과 하나의 석등과 조그마한 전각들이 있을 뿐이지만, 과거에는 상당히 규모가 컸던 절로 추정된다. 심지어는 2000년 즈음에야 국내 최대의 목탑지가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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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각 옆의 거대한 목탑지가 보이는가?
2 역사
신라 흥덕왕 3년(828)에 지장대사의 제자인 증각대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와 그의 고향이었던 지금의 자리에 실상사를 건립했다. 증각은 선종의 승려로, 그가 세운 아홉개의 절인 구산선종(九山禪宗)의 첫번째가 이 실상사다.
흥덕왕은 이 절을 세울 수 있게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해줬고 왕은 태자인 선광(宣光)과 함께 이 절에 귀의했다. 이 때문인지 증각은 선종의 유행을 일으켰고, 실상사도 계속 번창했다. 이후 통일신라 시기에 쌍탑식의 가람을 받아들여 두 개의 석탑을 세우게 된다.
조선시대 이후로는 수난이 끊이질 않는데, 세조 때 1468년에 원인모를 화재로 전소되었다는 설과 그 뒤 정유재란 때 왜구에 의해 전소되었다는 설이 있다.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이후 숙종 5년(1680)까지 실상사의 승려들은 실상사 안의 백장암이란 작은 전각에서 생활해야 했으며, 실상사 터에는 철불, 석탑, 석등 등만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숙종 때 왕에게 승려들이 상소문을 올려 36채의 건물을 중건하였고, 이후 순조 21년(1821)에 다시 중건을 하게 된다.
그러나 고종 19년(1882) 근처 유생들이 숭유억불과 절터를 가로챌 목적으로 방화를 해서 또 홀라당 타버리고, 중생들아, 뭘 하려는 게냐! 땅을 계승 중입니다. 스님 결국 고종 21년(1884)에 조촐하게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참고로 조선시대에 이런 유생들의 절 방화는 그리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회암사 참고.
한국전쟁 당시에는 국군과 공비들이 번갈아가며 점령하였지만, 다행이 월정사처럼 불타지는 않았다.
3 실상사 목탑과 발굴
1996년부터 2005년까지 발굴이 실시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초석들의 한 변이 약 23.2m 정도의 크고 아름다운 목탑지가 발견되었다. 이 정도 크기의 초석 면적은 약간(1m 미만)이긴 하지만 황룡사 9층 목탑보다도 더 큰 정도라서 대단히 큰 목탑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거기다가 칸 수도 정면 7칸 측면 7칸으로 황룡사와 같다. 그러나 이와 관련된 기록은 전혀 없기 때문에 현재는 계속 연구중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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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 당시의 모습.
이 외에도 발굴조사 결과 현재까지 30여동의 건물이 발견되었으며, 고대 사찰 가람답게 회랑과 강당 등이 확인되었다. 그 중 승방으로 추정되는 건물은 남북 7칸, 동서 5칸에 면적이 714㎡이라는 큰 건물도 발견되었다. 참고로 경복궁 근정전이 630㎡.
4 실상사 고려시대 정원시설 발굴
현재의 실상사는 매우 아담하고 작은 규모이지만 여러가지 발굴 조사 결과 예상을 뛰어넘는 비범한 면모가 속속들이 확인되고 있는데, 그러던 와중 정말 뜬금없이 거의 완벽에 가깝게 보존된 고려시대의 거대한 정원 유적이 발굴되었다. 이곳은 원래 최근에 실상사를 중건하기 위해 새로 건물을 지으려고 하던 자리였다.
그야말로 크고 아름답다. 발굴 결과 강돌을 바닥에 촘촘히 깐 평면 타원형의 독특한 모습의 연못과 여기에 물을 끌어들이는 입수로(入水路)와 물을 빼내는 배수로, 그리고 이와 관련된 것으로 생각되는 건물터 2동을 비롯한 정원시설이 발견되었다.
특히 중앙의 연못인 원지(苑池)와 관련 수로 시설은 그 규모와 완벽한 상태, 그리고 아름다운 건축 양식이 단연 관심을 끈다. 길이 16.05m에 폭 8.06m인 연못은 바닥에 강돌을 대체로 한 줄씩 편평하게 깔아 처리하는 한편 주변 호안석축(湖岸石築) 또한 같은 종류의 강돌을 쌓아올려서 만들었다. 바닥 중앙에는 다른 강돌과는 달리 청색 빛이 도는 돌을 안치했다. 이는 아마도 원지를 만들 때 기준점을 표시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돌 사이에는 명황색 점토와 숯을 깔아 방수를 했고, 뻘층이 확인되지 않는 것을 보아 연꽃류는 기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42.6미터에 달하는 직선 입수로와 그것에 맞대어 만들어진 곡선형 수로는 마치 경주의 포석정처럼 술잔을 띄워놓고 풍류를 즐기는 용도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곡수 형태의 수로는 길이 13.8m에 폭 1.0m이다.
또한 이 일대에서 고려 초기 유물이 집중 출토하는 점으로 보아 이 정원시설은 실상사 경내 목탑과 거의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생각된다.
사진에서 보이는 담장 왼쪽이 현재의 실상사 영역이다.
게다가 이 연못은 현재의 실상사 강역 바깥(!)에서 발굴되었는데, 따라서 고려시대의 실상사 규모는 지금보다 훨씬 더 거대한 모습이었을 가능성이 더욱 높아졌다. 물론 이러한 추측은 거대한 목탑지의 발견으로 인해 어느 정도 예견되긴 했지만, 이번의 연못지 발굴로 인해 더욱 힘을 얻게 되었다.
일본의 헤이조쿄에서 복원된 선종 양식 연못. 실상사 연못 또한 이것과 유사한 모습이었으리라 추측된다. 이렇게 바닥에 강돌을 깔고 맑은 물이 흐르게 만들어진 연못은 특히 선종 불교에서 선호되던 양식인데, 한반도에서 선종 양식 정원 조경의 명맥이 거의 끊기다시피한 상황에서 발굴된 유일한 정원 유적이라는 점에서 이 연못의 학술적, 예술적 가치는 정말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는 복원, 활용 방안을 검토하며 훼손을 막기 위해 비닐을 덮고 흙으로 복토해놓았다고 한다.
5 석탑과 석등
대한민국의 국보 | ||||
9호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扶餘 定林寺址 五層石塔) | ← | 10호 남원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 (南原 實相寺 百丈庵 三層石塔) | → | 11호 익산 미륵사지 석탑 (益山 彌勒寺址 石塔) |
국보 제10호로 지정된 백장암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석등(보물 35호)과 함께 상당히 정교한 통일신라 조각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의 아담하고 투박한 실상사 건물과 같이 보고 있으면 밸런스가 안 맞는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 큰 것이 특징으로, 실상사 목탑이 거대했을 것이란 추측을 가능하게 해주는 단서 중 하나다. 크기 때문에 별도로 마련된 사다리 모양의 돌 위에 올라가야만 석등을 점등 시킬 수 있는데, 이 사다리 모양의 돌은 실상사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이라고 한다.
특히 실상사 삼층석탑은 탑 위의 상륜부까지 온전하게 남아 있는 매우 드문 케이스로, 불국사 석가탑의 상륜부도 이 실상사 삼층석탑의 상륜부를 본떠서 다시 달아주었다. 다만 석가탑의 경우에는 안 어울린다는 평가도 있다.
6 호국사찰
실상사에는 "일본이 흥하면 실상사가 망하고 일본이 망하면 실상사가 흥한다"는 구전이 있는데, 실상사에는 유독 일본, 왜구와의 얽힌 설화가 많이 전해진다. 실상사가 전소된 계기를 정유재란으로 보고 있는 기록에서는 일본과 관련된 전설을 엿볼 수 있다.
약사전의 약사여래불은 지리산 천왕봉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그 방향을 쭉 따라가보면 일본의 후지산이 있다는 말이 있다.....만 사실이 아니다. 천왕봉과 일직선을 그으면 바다가 나온다. 아무튼 가람배치도 이 약사여래불의 시선을 따라 동남쪽을 향해 있다.
실상사 동종의 아랫 부분에는 일본 열도의 지도가 그려져 있는데 매일 매일 이 종을 두들겨 치는 동안 다 닳아 없어져 홋카이도와 규슈지방만 제 모양으로 남아 있다. 이건 사실이다. 다만 동종 자체는 통일신라의 것으로, 일본의 지도는 후대에 덧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7 기타
- ↑ 일본이 흥하면 실상사가 망하고 일본이 망하면 실상사가 흥한다라는 전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