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언 존스

Lewis Brian Hopkin Jones
(1942~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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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록밴드 롤링 스톤즈의 창립 멤버이자 초대 리더였던 인물.

조용하고 대중의 인기에 연연하지 않는 성격, 특유의 귀족적인 외모와 화려한 패션 스타일로 초기 롤링 스톤즈에서 가장 인기있던 멤버였다.

밴드 내에서는 키스 리처즈와 함께 기타 파트를 맡았지만 60년대 중반부터는 기타에 흥미를 잃고 다양한 악기를 배우고 연주하는데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2 생애

1942년 2월 28일 영국 첼트넘 (Cheltenham)에서 웨일스 혈통의 중산층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브라이언 존스의 부모님은 음악에 관심이 많아서 그에게 피아노오르간을 비롯해 색소폰, 기타등 다양한 악기를 가르쳤고,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하게 하기도 했다. 학교에서 그는 반항적이고 저돌적인 행동을 많이 하기로 악명 높았지만, 타고난 머리가 굉장히 좋았기에[1] 시험에서는 항상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

1959년경 브라이언 존스는 학교와 집을 떠나 영국의 북부를 떠돌면서 세션 뮤지션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는 동시에 블루스에 심취했다. 또한 이 때 롤링 스톤즈의 매니저가 되는 앤드류 루그 올드험 (Andrew Loog Oldham)을 만난다. 이후 런던으로 거처를 옮긴 브라이언 존스는 여러 뮤지션들과 교류하며[2], 슬라이드 기타 등의 다양한 테크닉을 습득하게 된다.

1962년 브라이언 존스는 '재즈 뉴스 (Jazz News)'지에 밴드원 모집 광고를 하고, 건반 주자인 이언 스튜어트 (Ian Stewart), 드러머 찰리 와츠, 베이시스트 빌 와이먼, 보컬 믹 재거, 믹 재거가 데려온 기타리스트 키스 리처즈 등의 멤버를 받아 같은 해 밴드 롤링 스톤즈를 결성한다. 허나 그간 자신이 삼류음악으로 경멸했던 로큰롤로 밴드가 흥행하자 키스와 믹을 내세운 밴드의 매니저인 앤드류 올드험 (Andrew Loog Oldham)에 의해 밴드 주도권을 빼앗기고만 브라이언은 신경쇠약에 걸려 약물 복용을 시작하게 된다.

결국 심신이 지친 브라이언 존스는 자신의 약혼녀이자 패션 모델인 아니타 팔렌버그와 새로운 밴드를 결성하여 새 출발을 하기로 마음먹고 멤버들에게 밴드에서 탈퇴한다는 말을 한다. 하지만 매니저인 앤드류 올드험은 남아있는 계약기간 동안 밴드 활동을 지속하지 않으면 소송을 걸겠다는 협박을 했고 결국 그 요구를 받아들인 브라이언 존스는 밴드에 재가입하기 전에 지친 심신을 치료하고자 요양소에 입원한다.

그러나 요양소에서 퇴원하고 아니타와 동거 중인 집에 돌아온 브라이언이 목격한 것은 자신의 침대에서 아니타와 키스가 관계를 맺는 장면. 이 광경을 본 브라이언은 집기를 부술 정도로 몹시 화를 내었고 직후 아니타는 브라이언이 자신을 폭행했다며 일방적으로 결혼식을 취소한다. 이후 브라이언은 마약만을 하면서 1년여를 완전히 폐인으로 보내고 1969년이 되자마자 공식적으로 밴드에서 해고당한다. 밴드에서 해고당한지 1달 뒤 브라이언은 자신의 집 수영장에서 익사체로 발견된다. 그 때 그의 나이는 겨우 27살에 불과했다. 브라이언이 사망하자마자 키스 리처즈와 아니타 팔렌버그는 공식적으로 동거를 시작해서 1980년에 키스 리처즈에게 파혼당할 때 까지 사실혼 관계를 맺었다.

3 음악적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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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타르를 잡은 브라이언 존스

그야말로 천재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은 뮤지션으로, 주 분야였던 기타를 비롯해 시타르, 하모니카, 건반 악기, 마림바 등 무수히 많은 악기를 자유자재로 다루었다.프린스? 그의 편곡/악기 연주 실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앨범이 롤링 스톤즈의 Their Satanic Majesty's Request. 원래 다룰 줄 알던 악기도 많았지만 밴드 활동을 하면서 배운 악기도 여럿 있는데, 주변의 증언에 따르면 악기를 배우는 것이 굉장히 빨랐다고 한다. 비틀즈 등 동료 뮤지션들의 음반에도 여러번 참여했는데 어째 기타리스트임에도 불구하고 색소폰, 퍼커션 등 다른 악기로 참여한 기록이 더 많을 정도 (....)

기타에 관한 평을 덧붙이자면 브라이언 존스는 그 지미 헨드릭스가 천재라고 공공연히 언급했던 인물이다. 더불어 슬라이드 기타 주법을 대중음악계에 처음으로 도입한 뮤지션 중의 하나로 일컬어진다.

다만 송라이터로서는 활동/재능이 없었다고들 흔히 이야기하는데, 이에 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롤링 스톤즈의 모든 자작곡들은 모두 재거/리처즈의 명의로 앨범에 수록되었고 매니저 앤드류 올드험 또한 "본래 브라이언 존스는 작곡에 흥미가 없어서 작곡을 하지 않는다."고 거듭 강조해서 말해왔기 때문에 브라이언 존스가 롤링 스톤즈에서 작곡한 곡들마저 모두 재거/리처즈의 곡으로 알려지기까지 했다. 1965년 잡지 인터뷰에서 인터뷰어가 존스에게 "당신은 작곡을 하지 않으세요?"라고 묻자 브라이언 존스는 "작곡을 해보려고 노력을 하기는 한다. 이미 블루스 스타일의 곡을 몇 곡 작곡하기도 했다."라고 말하며 앤드류 올드험의 발표를 반박하기도 했다. 다만 브라이언 사후 키스 리처즈는 "브라이언 존스는 밴드 멤버에게 자신이 작곡한 곡을 들려준 적이 없었다."며 이를 부정했다. 롤링 스톤즈가 60년대 발표한 곡들 중에서 재거/리처즈의 이름으로 발표된 브라이언 존스의 곡들이 얼마나 있는지 정확한 확인은 불가능하나 마리안느 페이스폴과 빌 와이먼의 증언에 의하면 Nanker/Phelge로 발표된 곡들,[3][4], <Under My Thumb>, <Paint it Black>, , <She's A Rainbow>, <No Expectations> 등이 브라이언 존스가 작곡하거나 작곡에 참여한 곡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과 관계 없이 믹 재거는 여전히 브라이언 존스의 작곡을 부정하며 '내가 본 사람 중 최악의 작곡 실력을 갖고 있었다' 고 평했다.[5]


추가바람

  1. 기록에 의하면 IQ가 135였다고 한다.
  2. 대표적으로 크림베이시스트인 잭 브루스 (Jack Bruce)등이 있다. 브라이언은 잭과 함께 밴드를 하다가 롤링 스톤즈를 결성하였고 브라이언의 후임으로 당시 신인이었던 기타리스트 에릭 클랩튼이 가입한다.
  3. 더불어 빌 와이먼은 '낸커/펠지'로 발표되어야 했을 곡 (즉 밴드 공동으로 작곡한 곡) 중에서도 '재거/리처즈'로 크레딧에 오른 곡이 여럿 있다' 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4. 브라이언 존스는 평소 레논/매카트니, 재거/리차즈 같은 작곡 콤비 스타일을 부러워했다고 한다.
  5. 해당 단락 롤링 스톤즈 항목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