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실로프 공세

EasternFront1916b.jpg

브루실로프 공세
날짜
1916년 6월 4일 ~ 1916년 9월 20일
장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갈리시아 일대
교전국1교전국2
교전국러시아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독일 제국
지휘관알렉세이 브루실로프콘라드 폰 회첸도르프(오)
알렉산더 폰 린징겐(독)
병력러시아 남서집단군
650,000명 이상(초기)
3,000,000명 내외(누적)
500,000명 이상(초기)
1,500,000명 내외(누적)
피해 규모사상 및 포로 50만~100만여 명사상 및 포로 78만~132만 5천여 명[1]
결과
러시아 군의 승리
서부/이탈리아 전선 동맹국 공세계획 중단
기타
오스트리아군 군사력 급감
러시아 전쟁수행능력 급감

1 개요

1916년 6월부터 동부전선의 오스트리아 방면으로 가해진 러시아 제국의 대규모 공세. 대전 이래 러시아군 최고의 공세작전이었으나, 역설적이게 러시아 제국의 붕괴를 촉발시킨 공세였기도 하다. 공세명은 공세를 지휘한 러시아 남서집단군 사령관 알렉세이 브루실로프의 이름에서 따온 것.

2 배경

개전 이래 러시아 제국의 군사작전은 철저하게 프랑스서부전선에 대한 압력을 덜어주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 이는 독일이 최소한의 전력으로 러시아를 막는 사이에 전력으로 프랑스를 무너트린다는 서부전선 중시 전략에 따른 것으로, 탄넨베르크 전투에서의 참패 이래 러시아는 동부전선에서 독일을 상대로 적극적인 공세를 하지 못했다.

반면, 동부전선의 남부를 맡고 있던 오스트리아를 상대로는 1914~15년에 걸쳐 성공적인 공세를 펼쳤고, 오스트리아 영내 깊숙이 진격할 수 있었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오스트리아는 독일과 공동으로 1915년에 동부 공세를 펼쳐 러시아군에 심각한 피해를 입히고 잃어버린 오스트리아 영토를 거의 대부분 탈환했으며, 러시아 제국령 폴란드와 벨로루시[2] 일대를 장악하였다.

러시아군의 1916년 공세 계획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준비되었다. 먼저 1916년 초에 북부전선 빌나에서 독일을 상대로 하는 공세가 있었지만 신나게 털렸고, 러시아는 독일군이 맡은 북부전선에서의 공세를 포기하고 대신 오스트리아가 맡은 남부전선으로 대규모 공세를 펼치기로 했다.

1916년 남서집단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알렉세이 브루실로프(Aleksei Brusilov)는 후방에서 쏟아지는 대규모 병력과 화기를 지원 받으며 차근차근 전력을 증강시키고 오스트리아군의 헛점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군이 이탈리아 전선에서의 공세(5월 토렌티노 공세)를 위해 10개가 넘는 사단을 빼며 전선에 공백이 생겼다는 것을 간파했다.

한편, 같은 해 초 서부전선에서 독일군의 대공세가 진행되었고 말 그대로 병력이 녹아내리고 있던 프랑스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러시아에 동부전선에서의 공세를 요청했다. 본래 영국-프랑스-이탈리아 3국은 1916년에 서부전선에서 대공세에 나서고 1915년에 큰 피해를 입은 러시아가 현 전선을 유지하게끔 배려하기로 하였지만 베르됭 전투의 급박함은 그러한 배려조차 잊게 만들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궁정은 프랑스의 이 요청을 대 오스트리아 공세와 연계시키기로 했다.

3 과정

3.1 양군의 준비

1915년에 큰 피해를 입은 러시아지만, 누가 러시아 아니랄까봐 1916년 시점에 러시아 육군 군단은 60개로, 개전 당시의 35개에 비하면 거의 배에 가까이 늘어나 있었고 편제도 충실하게 갖춰져 있었다. 무기도 자국의 빈약한 산업시설을 최대한 가동시키고 영국과 프랑스로부터의 수입품에다 오스트리아군으로부터 노획한 장비까지 합쳐서 어떻게든 편제 이상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병력의 질은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규모 공세를 펼칠 수준은 되었다.

공세 직전 브루실로프는 40개 보병사단과 15개 기병사단으로 이뤄진 총 60만여 명의 병력과 이를 충분히 지원할 화포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브루실로프는 이 병력을 총 4개 군으로 나누고, 오스트리아 전 전선에서 일시에 공세를 펼치기로 했다. 그리고 독일군의 지원을 막기 위해 북부전선에서도 독일군을 상대로 하는 견제 공세에 나서기로 합의가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가장 남쪽에서 공세를 펼치는 제9군의 역할이 중요했다. 9군은 오스트리아-루마니아 국경 일대에서 공세를 펼칠 예정이었는데 루마니아는 당시 연합국과 비밀리에 접촉하여 참전대가를 놓고 거래를 하고 있었다. 9군의 공세가 성공적으로 진행된다면 오스트리아로부터 받는 압력이 덜해질 루마니아가 조기에 참전할 가능성이 있었고, 그럴 경우 오스트리아에 대한 공세는 보다 더 쉽게 진행될 것이다.

전반적으로 브루실로프 공세의 최대 특징은 명확한 전략적 목표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적의 특정 세력을 격멸한다거나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를 점령한다는 목표가 없었고, 그냥 되는대로 공세를 펼쳐 가능한 만큼 진격을 해서 적에게 출혈을 강요한다는 개념이었다. 이는 브루실로프 공세가 내부적으로는 1915년 패전을 만회하려는 정치적인 목적에서, 외부적으로는 서부전선에 가해지는 독일의 압력을 약화시키고 루마니아를 참전시킨다는 목적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러시아에 공세를 요청한 프랑스 입장으로선 러시아군이 참패하건 말건 공세를 펼쳐서 독일군 1개 사단이라도 동부전선으로 빼내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처럼 뚜렷한 전략적 목표가 없었지만 준비는 철저히 진행되었다. 공세 직전이 되면 러시아군 공병대와 보병대는 오스트리아군 참호에서 불과 100m 떨어진 곳까지 전진하였고, 대대적인 항공정찰로 철두철미하게 오스트리아군 진영을 파악했다.

반면, 오스트리아는 1915년에 해낸 반격의 대성공으로 러시아가 당분간은 공세로 나올 여력이 없을 것이라 오판하고 있었다. 때문에 1915년에서 16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기간동안 수십여 겹의 철조망과 삼중사중으로 구축된 참호선으로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했고, 1915년에 연합국으로 참전한 이탈리아에 맞서기 위해 10개가 넘는 사단을 이탈리아 전선으로 보냈다. 그 병력의 공백은 강력한 방어선으로 만회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때문에 오스트리아군이 전선에 투입할 수 있었던 것은 공세 당시 기준으로 39개 보병사단, 10개 기병사단 약 50만여 명이었다.

3.2 공세 초기

1916년 6월 4일, 오스트리아군 전 전선에 걸쳐 러시아군의 일제 포격이 개시되는 것으로 브루실로프 공세의 막이 올랐다. 러시아군은 꾸준한 항공정찰과 관측으로 이미 오스트리아군 참호선의 중요 시설과 취약점의 위치를 파악한 상태였고, 정확하기 그지없는 포격으로 오스트리아군 참호선은 곳곳에서 기능이 마비되었다. 이는 오스트리아군 예비 병력이 제대로 전선에 투입되는 것을 막았고, 초기 러시아군의 공세를 막아내지 못하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포격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브루실로프는 충격 부대(Shock Troops)라 불리는 특임대들을 방어선 곳곳으로 침투시켜 오스트리아군을 강타했다. 공세 불과 며칠 만에 오스트리아군 참호선 곳곳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고, 러시아군은 전 전선에서 성공적으로 방어선을 돌파하며 서진했다. 약 1주일여 만에 오스트리아군은 약 20만여 명(최대 30만)에 달하는 경악할 인명피해를 입고 전선이 붕괴되는 수준에 이르렀다. 공세 약 2주 만인 6월 18일에는 부코비나를 점령하며 오스트리아-루마니아 국경 일대를 제압하는데 성공했다.

빈의 오스트리아 정부는 멘붕에 빠졌다. 오스트리아는 러시아가 이렇게 강력한 공세를 펼칠 줄은 예상조차 못했으며, 안 그래도 이탈리아 전선에서 불리한 상황에 놓인 상황이어서[3] 도저히 자력으로는 러시아군의 대공세를 막아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공세 개시 다음날인 6월 5일, 오스트리아군은 독일에게 정식으로 구원 요청을 했다.

한편 독일은 브루실로프 공세와 함께 개시된 북부전선에서의 러시아군 공세를 가볍게 막아냈으나, 오스트리아 전선이 무너질 경우 동부전선 전체가 무너질 수 있다는 공포감에 황급히 예비 병력을 긁어모아 오스트리아 전선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특히 당시 최대 격전지였던 베르됭 전투에서 급히 3개 사단을 차출했는데, 이것이야말로 프랑스가 바라던 상황이었다. 동시에 오스트리아도 이탈리아 전선에서 5개 사단을 차출하였고, 안 그래도 불리한 이탈리아 전선은 더더욱 이탈리아군의 우위가 굳혀졌다.

한편, 독일군은 오스트리아군 지휘관인 페르디난트 대공의 해임을 요구, 관철시켰으며 이후 오스트리아군 지휘권은 사실상 독일군이 쥐게 된다.

3.3 공세 후기

브루실로프는 공세의 성공적인 마무리를 위해 철도교통의 요충지인 코벨의 탈환에 전력을 기울였다. 동원가능 병력은 많았지만 산업화의 미비로 철도 총연장거리나 노선 접근성이 안 좋았던 러시아는 예비병력의 전선동원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고,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철도로 병력을 대규모로 증원하면 승산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시작된 코벨 전투(7.24~8.8)는 러시아군의 패배로 끝났다. 병력면에서는 러시아군이 2배나 많았지만 급히 차출된 독일-오스트리아 병력들은 성공적으로 지연방어전을 치뤘다. 브루실로프의 주특기였던 정밀포격과 충격부대의 기용은 제공권을 쥔 독일군에 의해 제대로 된 항공정찰을 하지 못하게 됨으로서 제대로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물론 전장의 주도권은 여전히 러시아군이 쥐고 있었지만 초전의 기세를 더 이상 이어나가지 못하고 진격이 둔화된 것이 문제였다. 그리고 브루실로프의 우려대로 코벨을 탈환하지 못함으로서 독일군은 서부전선에서 계속해서 병력을 차출했다. 특히 문제의 베르됭 전투가 7월에 종료되면서 독일군도 서부전선에서 방어전으로 전환하고 남는 전력을 동부전선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는 결정적이었다. 여전히 러시아군은 6월 4일과 비교해서 훨씬 서쪽인 약 100km 깊숙히 진격한 상태였지만 코벨에서의 패배 이후 공세능력을 상실해 버렸고 전선이 돌출부를 형성하게 되어 역으로 조금씩 후퇴해야 하는 지경이었다. 그러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지휘부는 공세를 지속하길 원하며 북부전선의 예비전력과 자원을 쏟아 부었는데, 러시아의 낙후된 철도환경은 이러한 예비전력의 효율적 재배치를 가로막는 장애물이었고, 무의미한 공세만 지속시킬 뿐이었다.

브루실로프는 더 이상의 공세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진작 깨달았고, 계속 상부를 설득하여 9월 20일부로 공세를 종료했다.

4 결과

4.1 동맹국

브루실로프 공세 종료 직후 독일은 동맹인 오스트리아의 형편없는 전투력에 절망해야 했다. 브루실로프 공세 기간 동안 동맹국 병력 피해는 약 78만여 명이었는데 이중 64만여 명이 오스트리아였다.[4] 때문에 기존에 동부전선을 남북으로 나눠 서로 균등하게 담당했던 것과 달리, 공세 이후 독일이 동부전선의 거의 90%를 담당하고 오스트리아는 나머지 10%와 이탈리아 전선을 맡는 것으로 정리되었다.[5] 말 그대로 동맹의 리더인 독일의 눈물겨운 하드캐리. 그리고 오스트리아군에 대한 지휘권은 이때부터 독일이 장악하기 시작한다.

동시에 동맹국은 서부전선 및 이탈리아 전선에서의 모든 공세를 포기해야 했다. 병력피해가 누적되던 베르됭 전투야 독일도 곧 손을 놓을 것이 확실했다지만 베르됭 전투의 지속 가능성을 날리고 서부전선에서 1916년의 남은 반년을 방어로 전환해야 했던 것은 브루실로프 공세 때문이었다. 이탈리아 전선에서 기획한 오스트리아의 토렌티노 공세 계획도 같은 이유로 취소.

그 밖에도, 브루실로프 공세 기간 동안 오스트리아군 병력 중 슬라브인들 상당수가 러시아에 투항하는 일이 있었다. 대전 종식 후 제국의 해체를 예고하는 모습이었다. 이외에도 유제프 피우수트스키가 이끄는 친동맹국 폴란드 여단이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에 가담하여 코스티우흐누브카(Kostiuchnówka, 현 우크라이나의 코스튜흐니우카)에서 2~3배에 이르는 러시아군을 상대로 선전하지만 폴란드와 협력하던 헝가리 군이 졸전하면서, 단 3일 만에 거의 1/3에 이르는 대 피해를 입으며 결국 패배했다. 이 폴란드 여단은 후에 폴란드가 독립하면서 신생 폴란드군의 주축이 된다.

4.2 연합국

동부전선으로만 보면 브루실로프 공세는 대성공이었다. 성과를 보면 카르파티아 산맥까지 전선을 움직여 안전한 방어선을 구축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무력화시켜 이후 동부전선에서 사실상 손떼게 만들었고, 루마니아가 러시아 편에 가담하도록 자극하는 대성과를 거두었다.[6]

대신 서부전선에서 한참 위기에 몰려있던 프랑스는 독일이 동부전선에 병력을 집중하면서 한시름 놓고 재충전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프랑스 대신 영국이 솜 공세를 떠맡아 몸빵하는 동안, 프랑스군은 1916년의 나머지 기간을 재정비하며 1917년을 준비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군 역시 오스트리아를 향한 공세작전에 보다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7]

그러한 연유로 공세를 지휘한 브루실로프는 온갖 훈장을 수여받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궁정으로부터 수많은 축하도 받았으나, 정작 본인은 막대한 병력 피해와 유의미한 전략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것에 아쉬워했다. 반면에 차르 니콜라이 2세와 전쟁지도부는 여태까지 연패하던 전적을 어느 정도 만회할 수 있었기에 드디어 서방 연합국에 체면치레를 했다며 매우 만족해했다.[8] 실제로도 일반적으로 브루실로프 공세 자체는 러시아의 대승리이자 러시아군의 절정기로 인정되며, 가장 나쁜 평가도 이 공세를 러시아의 상처뿐인 승리로 보는 정도다. 역사가 그레이던 턴스톨은 브루실로프 공세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있어서 1차세계대전 최악의 위기로 보며, 영국-프랑스-러시아 3국 협상에게 최대의 승리로 평가하고 있다.
  1. 사상자의 3/4는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의 피해였다.
  2. 현재의 벨라루스. 한국에선 벨로루시로 표현하다가 본국의 요청으로 표기를 바꿈.
  3. 이탈리아 전선은 1917년 카포레토 전투 이전까지 줄곧 이탈리아가 우세하였다.
  4. 일부 자료에 의하면 오스트리아군의 피해만 120만 명, 독일군 피해 35만에 이른다는 이야기도 있다. 오스트리아군 피해가 60만이건 120만이건 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이 괴멸지경에 이른 건 사실이다.
  5. 그러나 오스트리아군은 이탈리아 전선도 제대로 못 견뎌서 1917년 중반 제11차 이손초 전투의 패배 이후 동부전선의 나머지 10%도 독일이 맡아 달라고 요청했고, 결국 보다 못한 독일군이 이탈리아 전선에 개입하니 그것이 카포레토 전투이다.
  6. 이로 인해 독일에서는 에리히 팔켄하인 총참모장이 파울 폰 힌덴부르크로 교체되기까지 한다. 그러나 루마니아의 선택은 다음해 잘못된 것으로 드러났다.
  7. 그러나 거창하게 평가한 것과 달리 이탈리아군의 성과는 미미했다.
  8. 그러나 그 체면치레의 대가는 너무나 가혹했다. 브루실로프 공세는 3년에 걸친 대전을 치루고 있던 제정 러시아의 모든 여력을 쏟아 부은 공세였고, 가지고 있던 대부분의 에너지를 소진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