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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콜라이 2세 일가. |
역대 러시아 제국 차르 | |||||
알렉산드르 3세 | → | 니콜라이 2세 | → | 제정 붕괴 |
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Ромнов(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로마노프).
- 생애 : 1868년 5월 18일 ~ 1918년 7월 17일 (50세)
- 재위기간 : 1894년 11월 1일 ~ 1917년 3월 15일 (22년 140일)
- 대관식 : 1896년 5월 26일[1]
- 장례식 : 1998년 7월 17일[2]
(흑백 동영상을 칼라로 복원한 동영상)
1 개요
제정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황제. 제 1차 세계대전 참전, 피의 일요일 사건 등으로 안정적인 국가 통치를 수행하는데 실패했으며 러시아 혁명 때문에 퇴위당한 이후 볼셰비키에 의해 일가족과 함께 처형당했다. 제정국가 러시아가 무너지고 공산주의 국가연합인 소련이 세워지는 과정의 중심에 있던 중요 인물 중 하나.
2 생애
영국의 조지 5세와는 사촌 지간. 참고로 이 둘은 일란성 쌍둥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닮았다. 친척들(모두 유럽의 왕가) 사이에서는 니키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황태자 시절 일본을 방문했다가 일본 경관에게 습격당한 오쓰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 사건은 의외의 결과를 낳았는데 혁명 후 니콜라이 2세의 유해를 확인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니콜라이 2세가 당시 입고 있던 셔츠가 지금도 남아 있는데 셔츠에는 당시 흘렸던 혈흔이 남아 있다. 사건 당시 여기서 유전자를 검출해서 발굴된 Y염색체로 니콜라이 2세와 가족들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로마노프 왕가의 방계 황족들도 남아 있었지만 이 셔츠에서 나온 유전자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개인적으로는 교양 있고 차분한 사람이었으며 독실한 러시아 정교 신자였으나, 일국의 군주로서는 대단히 무능했다. 성격 또한 유약해서 제대로 된 리더쉽까지 부재한 빵점짜리 황제였다. 자신도 그걸 알았는지 즉위하자 자신은 준비가 안 됐다고 말했다.[3]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 1차 세계 대전'이란 책에 의하면 니콜라이 2세의 아버지 알렉산드르 3세는 니콜라이가 30세가 되었을 때 후계교육을 시키려 했으나 니콜라이가 26세 때 1894년 알렉산드르 황제가 급사하면서 결국 니콜라이 2세는 차기 황제로서의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채 황제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고 한다. 영국의 역사학자로 러시아사 전문가인 올란도 파이지스 교수는 니콜라이 2세가 러시아가 아니라 동시대 영국의 국왕이었다면 모두의 사랑을 받는 모범적인 군주로 역사에 남았을 거라고 했다. 즉, 선량한 인품과 교양, 사교술 등 입헌군주제 국가의 이상적인 군주의 자질을 모두 갖추었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통치할 국가는 전제군주정이었다는 게 불행이었다. 그러면 능력 있는 신하들의 말을 듣거나 그들한테 국정을 맡기면 그나마 낫겠지만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굉장히 독선적이었고 황제로서의 권위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보니 절대 그렇게 안한게 큰 문제였다. 이렇게 유약하고 무능한 주제에 독선적이기만 한 성격이니 정치를 잘해낼리가 없었다. 아버지로서는 만점, 그러나 국왕으로서는 빵점이었다. 특히 아무리 버러지같은 인간말종이라 하더라도 자기가 황제가 되면 "감사합니다!"를 외치며 냅다 받아먹는데도 불구하고 니콜라이 2세는 엄청 특이하게 황제가 되는 상황에서 "나는 아직 준비가 안되어있다"라고 말했는데 이 정도라면 자신이 황제로서 부적합하다는 것을 본인 스스로도 뼈저리게 느끼는 수준이라 할 수 있다.
황태자 시절 헤센 대공국의 알릭스(러시아식 이름은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4]와 열렬한 연애 끝에 결혼했다. 부부 금슬은 좋았으나, 정치적으로 아내에게 휘둘리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독일인이며 빌헬름 2세의 사촌인 알릭스의 평판이 러시아에서 극히 나빴던 데다가, 알렉산드라 황후가 그리고리 라스푸틴[5]을 중용했기 때문에 이는 니콜라이 2세의 정치적 입지에도 큰 타격을 입혔다.
이후 러일전쟁 패전 이후 벌어진 경제난에 뒤이은 피의 일요일 사건 등에서 병크를 퍼트리고, [6] 나라꼴을 생각안하고 섣불리 참전한 제1차 세계대전의 전황이 악화되어 통치력을 상실하였다. 이 후 1917년 초 발발한 제1차 러시아 혁명으로 퇴위해 우랄 산맥 근처의 토볼스크에 연금되었다.
당시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이끌던 임시 정부는 니콜라이 2세를 친척이 있는 영국으로 망명시키려고 했으나, 영국은 이 계획을 거절하였다. 영국에서도 평판이 나쁜 니콜라이 2세의 망명을 받아주었다가는 영국인들이 소요사태를 일으킬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영국 왕실과 영국 정부는 러시아의 개막장인 사정을 잘 알고 있어 특사까지 보내서 니콜라이 2세에게 개혁의 중요성과 러시아 민중들의 고통과 분노를 경고하며 차르에게 의회 설립과 민생 안전책을 제시하였으나 니콜라이 2세는 오히려 이를 거절하다보니 러시아와 니콜라이의 무능과 부패에 질린 상태였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케렌스키가 니콜라이 2세를 재판에 회부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으나, 케렌스키는 니콜라이 2세를 끝까지 보호했다. 이것과 함께 케렌스키는 독일과의 전쟁을 계속하기로 결정하여 평화를 원하는 민중들의 인심을 잃었다. 결국 블라디미르 레닌이 이끌던 볼셰비키당이 이른바 1917년의 10월 혁명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자 니콜라이 2세 일가의 운명은 풍전등화가 된다.
레닌의 공산 정권에 반대하는 반혁명군이 여기저기서 일어나자(적백내전) 볼셰비키는 차르일가가 반혁명군에 구출될 것을 우려해 여기저기로 옮긴다. 1918년 5월 최후로 안착한 곳이 예카테린부르크의 이파티예프 하우스였다. 이때 반혁명 세력이 예카테린부르크를 위협하자 볼셰비키는 일가를 처형하기로 결정하였다. [7]
처형 직후 찍은 처형 장소
1918년 7월 16일 새벽 2시, 볼셰비키의 보안 조직인 체카 요원들은 취침 중인 이들을 깨우며 "곧 이동할 테니 모두 행장을 갖추고 지하실로 내려오라"고 통보했다. 가족과 시종들이 지하실로 모두 내려오고 황제와 황후는 의자에 앉았다. 체카 책임자인 유로프스키와 그의 부하들은 "니콜라이 로마노프 씨, 반혁명 세력이 당신들을 구출하려다가 실패했소. 그리고 우랄 노동자 소비에트는 당신들에게 사형을 선고했소."라고 통보한 직후 차르 일가에게 총을 난사했다. 니콜라이 2세가 마지막에 남긴 유언은 "뭐라고 했나? 잘 들리지 않는데..."[8][9] 이 말이 끝나자마자 머리에 총을 맞고 즉사했다고 한다. 이렇게 다급하게 죽인 것은, 당시 황제를 지지하는 백군이 이들을 구하러 온다는 첩보를 들었기 때문.
당시 별별 이야기들이 많았는데, 황후와 공주들은 총에 맞아도 한동안 안 죽었다. 보석과 장신구들을 몸에 숨겨서 총알이 튕겨졌기 때문에 피투성이가 되어 한동안 살아있었다. 그래서 개머리판과 삽자루로 머리들을 때려 확실히 죽였다[10]는 이야기가 꽤 소문으로 퍼졌다. 하지만 당시 처형한 당사자들은 황제 식구들은 전재산을 압류한 상황이라 사실 몸에 걸친 비싼 보석은 전혀 없었기에 헛소문이라고 일축했다. 하지만 공작 부인의 옷에서 많은 다이아몬드가 나왔다는 증언도 있다. 황족 처형에 가담했다가 1935년에 사망한 에루마코프는 죽기 직전에 시체를 묻기 위해 군홧발로 걷어차 시체를 굴리자 아직까지 숨이 붙어있던 공주 1명이 비명을 질렀고 이에 병사들이 개머리판으로 때려죽였다는 증언을 하기도 했다. 그 다음에 시체들을 옷을 모두 벗긴 후 기름을 붓고 불태워 대충 파묻었다고 한다. 이때 나온 이야기가 NTR이나 시간설 등이 있는데 백군의 프로파간다일 가능성도 있다. 거기에 니콜라이 2세를 살해한 사람들은 나중에 스탈린에 의해 전부 숙청당했다.
한동안 러시아 제국을 몰락시킨 암군으로 여겨졌지만 소련 몰락 이후 재평가가 이루어졌고, [11] 2001년 가족들과 함께 러시아 정교회에서 수난자로 인정받아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2008년 10월 1일 러시아 대법원이 '황제와 그 가족이 부당한 정치 탄압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판결을 내려 정치적으로도 복권되었다. 이를 두고 국내에서 "나라 말아먹은 인물인데 뭐하러 시성하느냐?"라는 의견도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일단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므로 다시 원위치시키는 일은 곤란하다고 볼 수 있다. 정교회 성인으로서의 축일은 7월 17일이다.
이콘으로 그려진 황제 일가 |
총살당한 후 암매장되었다가 나중에 발견된 황제 일가의 유해는 DNA 검사를 통해 신원이 확인됨에 따라 사후 80년만인 1998년 7월 17일 선대 차르들이 안장된 상트페테르부르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의 성당에 안장되었다. 옐친의 추모사 장면 2015년 9월 23일, 러시아 정교회의 요청을 받은 러시아 연방수사위원회가 2007년에 발견된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 황태자와 마리야 공주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유전자 감식을 실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현 러시아 정부가 니콜라이 2세를 재평가하는 이유는 현 러시아 연방 내 소수 민족들을 통합시킬 구심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소련 시절에는 소수 민족을 공산주의 이념 아래 통합시키는 것이 가능했지만, 현재는 소련과 공산주의 이념이 붕괴되면서 그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로마노프 왕조의 잔재라도 이용하여 민족 열기를 억누르고 소수 민족들을 통합시키기 위한 정치적 계산도 있었다. 즉 우리는 소련 이전에도 차르라는 구심점으로 뭉친 역사를 갖고 있다.라는 식으로 소수 민족들을 달래기 위함이다. 당시 체첸 분리 운동에서 낭패를 본 옐친의 눈물 겨운 정치적 한수였다.
3 음모론
황실 일부 인사들이 생존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12] 그 중 유명한 케이스가 아나스타시야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공주(사진 맨 오른쪽)는 꽤 오랫동안(자그마치 70년 동안!) 음모론[13]의 주인공이었던 것으로 유명하다.(영화도 있고, 심지어 애니메이션도 있다!)
게다가 혈우병으로 항상 오늘내일 하던 황태자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사진 중간, 세일러복을 입은 소년) 또한 적군의 총격을 피해 1977년까지 생존해 있다는 음모론이 있는 등 아무래도 마지막 황가라는 매력(?)이 원인인 듯하다.
명탐정 코난 극장판 '세기말의 마술사'에서도 3녀 마리야 공주가 생존하여 일본으로 도망쳤다는 설정이 깔려있다. 이 극장판이 개봉된 1999년만 해도 마리야 공주의 유해가 발견되지 않아 작내에서 '아나스타샤 공주보다 마리야 공주 생존설이 더 말이 된다'는 발언이 있었다.
니콜라이 2세의 어머니이자 황태후였던 마리아 표도로브나[14]는 니콜라이 2세 일가가 처형당했다는 사실을 평생 믿으려 하지 않았고 생존하여 어딘가에 숨어있으리라 믿었다고 한다.
1989년 니콜라이 2세 일가의 유해가 발견되었으나, 마리야 공주와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의 유해는 발견되지 않아 음모론을 뒷받침했는데, 결국 2007년 마리야와 알렉세이의 것으로 보이는 유해가 발견되고 DNA 검사까지 끝나면서 이 음모론은 근거를 잃게 되었다. [15] 이때 DNA 검사를 위해 알렉산드라 황후와 가장 가까운 친척 중 현재 생존한 왕족으로, 알렉산드라 황후의 첫째 언니인 밀포드헤이븐 후작부인 빅토리아의 외손자이자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부군인 에든버러 공 필립 마운트배튼의 DNA가 샘플로 제출되어 화제를 모았다. 자매지간인 알렉산드라 황후와 밀포드헤이븐 후작부인이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이므로, 모계 유전으로 전달되는 미토콘드리아의 특성상 알렉산드라 황후 본인 및 자녀인 올가, 타티아나, 마리야, 아나스타샤, 알렉세이와 밀포드헤이븐 후작부인의 외손자인 필립 공의 미토콘드리아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4 가족관계
4.1 형제자매
4.2 알렉산드라
- 황후 :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1872년 6월 6일 ~ 1918년 7월 16일) - 독일의 헤센 대공국의 국왕 루트비히 4세와 앨리스 공주의 4녀이며 원래 이름은 알릭스. 그녀의 언니인 엘라도 러시아로 시집갔다.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연애결혼이었고, 남편의 착한 성품 덕에 결혼생활은 행복했다. 당시 러시아 제국 황실은 사생활이 문란하기로 유명했으나 차르 부부는 서로 애인을 두지 않고 배우자에게 충실했다. 기품있고 아름다운 외모에 자상한 인품을 지녔으나, 대중에 노출되기를 꺼려하고 늘 신경쇠약에 시달리며 살았다. 또한 외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의 혈우병 보인자 유전자를 지니고 있기까지 했다. 결국 이 유전자로 인해 어렵게 얻은 외아들 알렉세이 황태자가 혈우병 환자로 태어났고, 이는 나중에 그리고리 라스푸틴이 득세하는 배경이 된다.
4.3 OTMAA로 불렸던 자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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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노프 황가의 남매들 OTMAA. 왼쪽부터 마리야, 타티야나, 아나스타샤, 올가, 알렉세이. |
당대로서는 특이하게도 네 황녀들 모두 성인이 되어도 결혼하지 않았는데, 부모인 니콜라이 2세와 알릭스가 자신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녀들 또한 연애결혼을 하길 바랐기 때문에 정략결혼에 크게 적극적이지 않았다고 한다.
- 장녀 : 올가 니콜라예브나 여대공(OTMA의 O , 1895년 11월 15일 ~ 1918년 7월 16일) - 머리가 상당히 좋고 뛰어난 통솔력과 통찰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리더쉽 역시 발군이었다. 불과 17살의 나이로, 그것도 여자의 몸으로 기병대장을 역임하며 훌륭하게 임무를 수행했다. 그래서인지 알렉세이를 낳기 전에 알렉산드라 황후는 차라리 장녀 올가가 황위에 오르기를 바라기도 했다고 한다.[17] 그러나 훗날 어머니가 남동생을 위해 등용한 그리고리 라스푸틴이 어떤 인물인지 일찌감치 간파한 탓에 처음부터 그를 멀리했고, 이 때문에 라스푸틴을 맹신한 어머니와 대립하기도 했다고 한다. 루마니아[18]나 영국[19]과 혼담이 오갔으나 러시아를 사랑했고 혼담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나는 러시아인이고 러시아에서 살다 죽겠다.'며 거절했다. 만 22세를 일기로 가족과 함께 총살당해 죽었다. 여담이지만 혁명으로 축출되어 유배 생활을 시작하기 직전에 잠깐 만난 러시아군 장교와 애틋한 사랑을 나눴다는 비화(야사)가 있다.
- 차녀 : 타티아나 니콜라예브나 여대공(OTMA의 T, 1897년 6월 10일 ~ 1918년 7월 16일) - 올가와 2살 터울이 나는 바로 아래 여동생으로, 올가와 함께 방을 썼다. 올가와 제일 친했고 1차 대전 때 부상을 입은 병사들을 위해 올가와 함께 간호사로서 봉사활동을 하기도 했다. 니콜라이 2세의 네 딸들 중 가장 키가 컸고 제일 뛰어난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가장 아름다운 황녀였으며 당시 제정 러시아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미인이었다고 한다. 특히 황실에서 무도회라도 열리는 날이면 남자 귀족들은 서로 타티아나의 댄스 파트너가 되어 보려고 줄을 섰으며, 유럽의 내로라 하는 왕국에서 많은 혼담이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나 올가처럼 가족의 곁을 떠나기 싫어서 끝내 모든 혼담을 내쳤다.
차라리 저때 누구와 결혼해서 국외로 떠났다면 비참한 죽음은 모면했을지도 모르지만(…)[20]올가와는 정반대로 매우 순종적이었다. 아버지인 니콜라이 2세의 비서로 일했다고 한다. 나중에 니콜라이 2세의 가족들이 총살당한 후 DNA를 추적한 결과 그녀의 키는 166cm[21]인 것으로 밝혀졌다. 만 21세의 나이로 총살당해 죽었다.
- 3녀 : 마리아 니콜라예브나 여대공(OTMA의 M , 1899년 6월 26일 ~ 1918년 7월 16일) - 부친의 숙부인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은 마리야를 "사랑스러운 아기"라고 부르며 예뻐했다. 왼손잡이였으며 스케치가 취미였고 그림 실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바로 아래 여동생인 아나스타샤와 어렸을 때부터 방을 함께 써서 매우 친했다. 만 19세의 나이로 죽었다.
- 4녀 : 아나스타시야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 OTMA의 A , 1901년 6월 18일 ~ 1918년 7월 16일 ) - 일명 아나스타샤이다. 만 17세에 사망했다. 생존했다는 음모론 때문에 여러 매체에서 다뤄져 형제자매 중 가장 유명하다.
- 외아들 :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 ( 1904년 8월 12일 ~ 1918년 7월 16일 ) - 니콜라이 2세 부부가 오래 기다려 겨우 얻은 후계자이나 유전적 결함으로 인하여 태어날 때 혈우병을 갖고 태어났다. 아나스타샤 못지 않게 생존설이 계속 돌았었다.
5 여담
커맨드 앤 컨커 레드얼럿 2에 나오는 알렉산더 로마노프는 설정상 그의 후손이다. 물론 말 그대로 게임상 설정이고 니콜레이 2세의 후손은 모두 몰살되어 남아있지 않으므로 의미는 없다.[22]
베르사유의 장미로 유명한 이케다 리요코의 다른 만화, 올훼스의 창은 저 당시 실제 유럽의 역사가 배경이기 때문에 당연히 니콜라이 2세와 주변인물들도 비중 높게 등장한다.
대한제국의 고종, 순종 등이 그와 비슷한 수난을 당했다는 의견이 있는데, 이는 틀린 말이다. 고종은 적어도 이렇게 끔찍한 죽음을 맞지는 않았으며, 순종은 실권은 없더라도 일본 제국의 덴노보다 밑이지만 다른 귀족들보다는 높은 이왕으로 예우받으면서 아주 편하게 좋아하는 커피 마시고 당구 잘 치면서 여생을 보냈다. 메이지 덴노의 배려로 군함을 타고 유람을 가기도 했을 정도. 니콜라이 2세처럼 이들 부자가 평이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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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2세 일가의 가족 사진 | 프린세스 메이커 5의 오프닝에 나온 가족 사진 |
프린세스 메이커 5의 오프닝 영상에 나오는 가족 사진은 니콜라이 2세의 가족 사진을 패러디했으며, 오프닝에서 혁명이 일어나 왕가가 몰살당하고 프린세스 후보인 딸이 게임상의 인간계로 피신했다는 설정이 붙었다.
5.1 도플갱어?
영국의 조지 5세와 사촌 관계로, 몹시나 닮았다. 둘이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 쌍둥이로 보일 정도. 덕분에 조지 5세의 결혼식에 참석했던 니콜라이 2세는 피로연에서 신랑으로 착각한 사람들에게 축하받느라 고생했다고. 거기에 러시아 혁명 이후 모국인 덴마크로 망명한 마리야 황태후가 영국을 방문했을 때, 조카인 조지 5세를 보고 아들이 살아돌아온 것으로 착각한 적도 있다.
한번 비교해보자. …누, 누가 누구지? M자 탈모가 심한쪽이잖아 세 사진 모두 왼쪽이 니콜라이 2세다.[23]
조지 5세와 니콜라이 2세는 이종사촌 관계인데 둘 다 자매관계인 어머니를 닮았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조지 5세의 어머니인 덴마크의 알렉산드라와 니콜라이 2세의 어머니인 덴마크의 다그마르가 자매 관계인데 이 둘도 쌍둥이처럼 닮았고 그녀들의 자식들인 두 왕이 각자의 어머니를 닮았기에 이종사촌간에 얼굴이 쌍둥이처럼 닮게 된 것.
왼쪽이 영국의 왕비가 되는 알렉산드라, 오른쪽이 러시아의 황후가 되는 다그마르
- ↑ 하필 얼마 뒤 30일날 있었던 축제에서 1389명이 죽는 압사사고가 일어났다.
- ↑ 당연히 소련에서는 총살시켜 죄수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장례식조차 치루지 못 했는데 유해의 행방을 찾지 못한 것도 그 이유이기도 했다. 결국 1990년에 소련이 무너지고 그가 죽은 지 80년이 지난 1998년에야 유해를 수습하고 러시아 연방의 보리스 옐친 대통령에 의해 정식으로 장례를 치루게 된다.
- ↑ '산드로(니콜라이 2세의 매제),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난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네. 신하들에게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도 모른다네.'
이정도면 강화도령급이네 - ↑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이며 독일의 빌헬름 2세와는 사촌이다.
- ↑ 황태자 알렉세이의 혈우병을 자신이 치료하겠다고 주장하며 황후에게 접근했다. 이후 각종 괴상한 정책들을 제안하여 국가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그를 지지하는 사람은 알렉산드라와 니콜라이밖에 없었고, 상류층과 하류층을 막론하고 그리고리 라스푸틴을 싫어했다. 특히 니콜라이 2세의 장녀 올가 공주는 어찌나 라스푸틴을 싫어했는지, 어머니 알렉산드라 황후에게 라스푸틴을 참수하라고 조언했을 정도였다.
- ↑ 이때 사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동생인 미하일 대공이 양위받기를 거부했다.
- ↑ 레프 트로츠키는 후에 이것이 레닌의 명령임을 암시하는 정황을 회고록에 기록했다. 그러나 누가 처형 결정을 내렸는지는 아직도 역사가들의 의견이 갈린다.
- ↑ 유로프스키가 타고 온 자동차 엔진소리가 커서 잘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꺼낸 질문이라고.
- ↑ 다른 의견 : 빅토르 세르주가 "그럼, 우리가 다른 곳으로 이동되는 게 아니란 말이지?"라는 기록을 남겼다.
- ↑ 또는 머리를 쏴서 확인 사살.
- ↑ 사실 재평가라기보다는 동정론에 가깝다. 국가 지도자로서는 실격이지만, 인격적으로는 선량한 사람이었기에.
- ↑ 역사소설가 로버트 매쉬에 의하면 황제 자신이 백발 노인으로 런던 거리를 지나가는 걸 봤다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근데 그거 조지 5세랑 착각한거 아닌가... - ↑ 사살 직전 도망가서 유럽 어딘가에 살아남았다는 음모론.
- ↑ 본명은 마리 조피 프레데리카 다우마로, 덴마크의 왕 크리스티안 9세의 차녀다. 장남 일가의 몰살 소식을 전해듣고 공황 상태에 빠진 그녀는 결코 그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고 절대 러시아 땅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주변으로부터 설득당한 그녀는 언니이자 영국 황태후인 알렉산드라와 그녀의 아들 조지 5세가 보내준 군함 HMS 말버러 호를 타고 1919년 러시아를 떠나 영국에 머물렀고 이후 고향 덴마크에 정착하여 1928년 사망하였다. 유언으로 자신의 유해를 러시아에 보내 남편 알렉산드르 3세의 곁에 묻어달라고 하였으나, 이 유언은 사후 78년 뒤인 2006년에서야 이루어졌다.
- ↑ 한 때 말이 많았지만 관련이 전혀 없었던 마리야 공주와 아나스타샤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와 달리,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와 가장 유력했던 사람으로 바실리 필라토프가 있다. 이 사람은 확실히 알렉세이는 아니었지만 현재 상황에서도 최소한 니콜라이 2세의 친족, 즉 황가의 일족인 것까지는 유전자적으로도 확실하다.
- ↑ 당숙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알렉산드르 2세의 남동생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의 아들)와 결혼해 자녀 7명을 두었다. 이들 중에 큰딸 이리나(1895년 ~ 1970년)는 펠릭스 유스포프(1887년 ~ 1967년) 대공의 아내가 되었다.
- ↑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황녀에게도 황위계승권이 인정돼서 장녀인 올가가 황태녀가 됐다면 알렉세이 때문에 그리고리 라스푸틴이 등용되지도 않았을테니 제정 러시아가 조금 더 오래 유지됐을지도 모른다.
- ↑ 카를 왕자 : 훗날의 카를 2세
- ↑ 에드워드 왕자, 훗날의 에드워드 8세(윈저공)
- ↑ 황녀들이나 공주들이 유럽 각국의 황실과 황실 사이를 오가며 정략 결혼으로 양국 간에 협상 도구로
물건취급시집가는 게 당연하다고 인식되는 당시 사회에 극히 드문 일이다. 올가와 타티아나 전에는 루이 15세의 세 딸들도 저런 결혼을 거부하고 독신으로 남았는데 이 역시 특이한 사례이다. - ↑ 당대에는 이게 여자로서는 엄청 큰 키였다. 이게 남자 평균 신장을 상회하는 수준이었고 오늘날로 따지면 170cm대 후반 ~ 180cm대 초반에 해당되는 수준의 장신이었다. 맨 위의 가족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아버지와 키가 비슷했다.
- ↑ 굳이 시점을 따지자면 아들뻘 정도 된다.
- ↑ 그나마 자세히 보면 눈 부분이 조금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조지 5세 쪽이 조금 더 눈이 부리부리하다.(삼백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