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됭 전투

베르됭 전투
제1차 세계대전서부전선의 일부






날짜
1916년 2월 21일 ~ 1916년 12월 20일
장소
프랑스 베르됭, 뫼즈 강
교전국 독일 제국 프랑스 제3공화국
지휘관 2세]]
에리히 폰 팔켄하인
필리프 페탱]]
조제프 조프르
결과
프랑스군의 피로스식 승리
병력125만 명114만 명
피해규모사상자 28만 ~ 43만 4,000명
사망자 14만 3,000명
사상자 31만 ~ 54만 2,000명
사망자 15만 ~ 16만 2,000명
"지옥도 이보다 더 참혹할 수는 없다.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는 미쳤다."

- 프랑스 육군 알프레드 주베르 보병 중위가 사망하기 전에 적은 일기(1916년 5월 23일).[1]

1 개요

제1차 세계대전서부전선에서 독일 제국군프랑스 제2공화국프랑스군 간에 1916년 2월 21일부터 동년 12월까지 벌어진 전투. 마른 전투, 솜 전투와 더불어 왜 제1차 세계대전이 소모전의 시초라고 불리는지 분명하게 보여 주며, 더불어 참호전의 전형적인 양상을 띤, 유례 없는 참혹한 지옥도를 인계에 실현한 전투였다.

2 소개

독일의 슐리펜 계획이 1차 마른 전투의 패배로 실패로 돌아간 후, 육군 원수 소(小) 몰트케 장군의 후임으로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된 에리히 폰 팔켄하인 장군은 1915년에는 동부전선에 주력한 후, 1916년 서부전선에 공세를 기획하게 된다. 그는 극적인 전선 돌파에 따른 신속한 전쟁 종결이 실패로 돌아간 이상,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사실상 요새가 된 전황을 타개해야 한다고 봤다. 우선 최단 거리로 요새를 돌파해서 파리로 나간다는 작전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게 실패할 경우에 대비한 대체 작전이 엄청났다. 일명 '사형터 작전'이라는 것인데 전선의 한곳에 적군을 끌어들여서 적을 소모시키고 그걸 바탕으로 전선을 붕괴시킨다는 것이었다.

당시 프랑스 육군 대위로 참전했던 샤를 드 골의 말을 빌리면 "20세기30년 전쟁". 기간 때문이 아니라 그만큼 잔인했다는 이야기다.[2]

한국군 vs 북한군에 비유하면 한국 육군이 '전쟁이 벌어지면 진격로를 확보하고 빠르게 북진해 평양을 점령하고 전쟁에 이긴다.' 가 아닌 '평양을 미끼로 해서 적을 끌어들인 다음 소모전으로 차근차근 제압한다.' 작전을 세운 셈이다. 이 방법은 의외로 효과적이기는 하다. 북한 정권은 평양 사수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텐데 그 많은 북한의 가용병력 대부분은 평양 진입 과정에서 개인 화기와 공용 화기나 겨우 갖추고 있는 일반 보병이 절대 다수일 것이고, 한국 육군은 예비군조차도 기본 화력을 충실히 갖춘 상황이라 계속 밀려드는 북한군을 차근차근 제압해 나가면 되는 것이다.

소모전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런 전략은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효과적인 교환비로 깎아먹어 아군은 덜 죽고, 적군은 많이 죽는다는 보장만 있다면 정말 안정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쪽수는 그 자체로도 질적인 우위를 점하게 하는 법이다.

이 작전은 모든 것이 계획대로 잘 되었을 경우에 적과 아군 피해 비율이 5:2라는 극단적인 소모전으로 계획되었으며, 독일 육군 참모본부는 프랑스의 군인들을 가장 잘 빨아먹을 장소로 요새 지대인 베르됭을 선택, 공세를 펼치게 된다. 베르됭은 전통적으로 프랑스 육군 최고의 요새 지대였으나 대전 초 벨기에 육군의 리에주 요새 지대가 대구경 공성포의 포격 앞에 힘없이 무너짐으로써 가치가 평가 절하된 상태였다.

3 독일 제국군의 대공세

하여튼 독일 육군은 이 지역을 선택, 1916년 2월 21일 최고급의 사단들을 투입해 공세에 나서고 프랑스 육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는다. 2월 25일에는 최후의 전방 보루인 두오몽 보루(Fort Douaumont)가 독일 육군에 함락되었다. 이 때 전술이 우선 1,500여 문의 야포에서 30만 발을 쏟아 붓는 압도적인 포격으로 요새를 마비시키고, 그 뒤를 이어서 보병이 진격한다는 것이었다. 대략 1km 단위로 포격과 진격을 반복하였고 그 결과 프랑스 육군 사상자가 10만 가까이 나오는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3]

그러나 뚝심 하나만큼은 최고였던 조제프 조프르 장군은 당황하지 않고 앙리 필리프 페탱 장군을 전선 사령관으로 임명해 방어전에 나서게 했다. 전선에 도착한 페탱 장군은 프랑스군과 독일군의 전력비가 1:3까지 벌어진 것을 알고 최단기간에 20만 병력과 그에 필요한 군수 물자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4] 그리고 병력 보강이 끝나는 즉시 전투에 들어갔고, 결국 잃은 영토를 원상복구시키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그 뒤부터는 철조망기관총이 피를 빨아먹는 전형적인 참호전이 벌어지게 된다. 결국 프랑스 육군을 제압하기 위해 이쪽도 치명타를 입지만 어쩔 수 없다던 팔켄하인의 5:2 플랜까지도 깨져서, 마지막 순간에는 5:4까지 근접하게 된다. 그야말로 동반자살에 가까운 상황. 이렇게 되자 더 이상의 공세는 의미가 없어졌다. 게다가 동부전선러시아 제국까지 상대해야 하는 독일은 인구 문제도 있었기에[5] 결국 공세를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동년 7월에 영국군의 솜 공세가 실시되며 독일군의 추가적인 공세 여력은 사라지게 되며 베르됭 공세를 취소하게 된다. 최종적인 인명 손실은 독일 육군 43만 4000명~35만 3000명, 프랑스 육군 54만 2000명~40만 2000명 정도였다. 전사 및 실종자는 이 가운데 각각 10~15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6] 오죽 지독했으면 프랑스군은 이 전투를 분쇄기라고 불렀다.[7]

4 양측의 피해

베르됭 전투 전체의 양측 손실 비율은 5:4였지만, 초기 공세 기간의 급격한 손실을 제외한 나머지 전투 기간 동안의 프랑스와 독일 양측의 병력 손실비는 거의 1:1에 근접하게 된다. 이는 이전까지 독일군에게 밀리던 프랑스군의 전투력이 독일군과 비등해졌으며 더 이상 독일군이 우월한 전투력을 바탕으로 공세를 통해 프랑스군에 소모전을 강요할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실제로 베르됭 전투 이후 솜 전투, 제2차 아라스 전투, 니벨 공세, 제2차 이프르 전투 등 1917년 내내 독일군은 수세적 입장에서 전쟁을 수행하게 된다.[8]

이 작전의 실패로 팔켄하인 장군은 참모총장에서 물러나 동부전선으로 가게 되었고, 페탱 장군은 구국의 영웅으로 떠받들어지게 된다. 페탱 장군은 이때의 명성으로 후일 비시 프랑스의 수반이 되기도 했지만, 그 뒤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안다면 뭐...

페탱 장군을 변호하는 쪽에선 이 베르됭 전투 당시의 경험이 페탱 장군으로 하여금 비시 정부의 수반으로 활동하며 독일에 대해 유화적인 입장을 취하게 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베르됭 전투 당시 프랑스군이 입은 엄청난 피해가 페탱에게 큰 충격으로 남았고, 또다시 조국에게 그런 희생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는 것. 페탱 항목에서도 언급되다시피, 1차 대전 당시 그의 가장 큰 공은 프랑스 육군 장병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개선하는 것을 통해 장병들의 항명, 태업 사태를 진정시킨 것이다. 그는 이러한 과정에서 독일군과의 전투나 병력 동원을 극단적으로 회피했으며, 이로 인해 영국과 마찰을 빚어 결국 연합군 총사령관의 자리를 페르디낭 포슈 장군에게 양보해야 했다. 전쟁에서 공을 세운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호전적이거나 장병들의 희생을 쉽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페탱의 친독 부역 행위와 관련해 큰 논란거리로 남아 있다.

5 그 외

본래 연합국 주요 4개국(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회담에서는 1915년에 큰 피해를 입은 러시아를 배려하여 동부전선에서 현상 유지를 하고 나머지 3국이 일제히 서부전선에서 총공세를 펼치기로 합의가 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공세에 나서기도 전에 선수를 친 것이 바로 베르됭 전투. 상황이 급해지자 프랑스는 합의건 뭐건 때려 치고 러시아에 급히 헬프를 치고 러시아가 이에 호응하여 벌어진 것이 제정 러시아 최후의 공세 작전 브루실로프 공세이다.

훗날 프랑스 해군 원수가 되는 프랑수아 다를랑 제독위관급 장교로서 해군 육상 포병 부대의 일원으로 이 전투에 참전했었다. 그밖에도 샤를 드 골 육군 보병 대위가 이 전투에서 포로로 잡혔고, 독일 측에서는 프리드리히 파울루스가 육군 위관급 장교로 참전했다. 드레퓌스 사건의 주인공이자 피해자였던 알프레드 드레퓌스 육군 포병 소령도 참전했다. 얼마나 참호전이 처절했던지, 100년이 지난 지금도 베르됭 일대의 지형은 포격으로 패인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을 정도.그리고 아직 일부지역은 출입 통제지역이라고 한다. 이유는 아직 발견되지 못한 불발탄 및 지뢰.

6 창작물

6.1 게임

  1. 출처: <참호에서 보낸 1460일>.
  2. 몇몇 역사학자들은 제 1차세계대전과 2차세계대전과 그 사이의 기간을 합하여(1914~1945년, 대략 30년정도 된다.)제2의 30년 전쟁이라 부르기도 한다.
  3. 이 방법을 1차 솜 전투에서 영국군이 그대로 재현하려고 시도했으나 대차게 실패했다. 사거리를 고려하지 않고 포만 쏴댄 결과로 유효탄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고, 굳건히 방어선을 형성한 독일군 참호 앞으로 보병을 들이민 꼴이 된 것이다. 지휘부는 작전이 당연히 성공했을 것이라고 보고, 중간 결과 파악이 안 된 상황에서 병력을 진격시켰고 피해를 입지 않은 독일군 방어선 앞에서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었다. 반면 영국군이 이런 삽질을 할 동안 솜 동부에서 조공을 맞은 프랑스 육군은 매도 맞아 본 놈이 잘 맞는다고 솜 강을 도하해야 하는 악조건 속에서도 순조롭게 공세를 진행해 주공인 영국 육군보다 더 많이 진격했다.
  4. 이 계산을 전장에 도착한 지 반나절 만에 계산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5. 실제로 러시아 전선에서 입은 손실이 미국 참전과 겹쳐 결국 패전의 빌미를 제공한다.
  6. 이게 얼마나 거대한 피해인지를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한국 전쟁을 벌였을 때 대한민국 국군 전체 사상자가 3개월간 49만 명으로 추산되었을 정도.(그마저도 북한군 포격을 굉장히 과대평가한 것이었다)
  7. 훗날 제2차 세계대전독소전쟁에서 벌어지는 르제프 전역도 소련군독일 국방군 양 측간 인명 손실이 막심하여 르제프 전역의 별명은 르제프 고기분쇄기(Meatgrinder)였다.
  8. 이 상황에 대해 독일 황태자는 이런 말을 남겼다. "전쟁 전부터 그나마 남아 있던 정예병은 대부분 베르됭에서 죽었고 그나마 남아 있던 병사는 전부 솜에서 죽었다."